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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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승부] 역사학자가 본 '이건희 컬렉션'과 국보 지정의 의미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1-04-28 21:14  | 조회 : 1838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방송 : FM 94.5 (18:00~19:30)

방송일 : 2021428(수요일)

대담 : 김준혁 한신대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면승부] 역사학자가 본 '이건희 컬렉션'과 국보 지정의 의미

 

 

이동형 앵커(이하 이동형)> 역사를 시사로 풀어보는 시간입니다. <김준혁의 역사시사> 시간입니다. 한신대 김준혁 교수, 연결하겠습니다. 교수님?

 

김준혁 한신대 교수(이하 김준혁)>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준혁입니다.

 

이동형> ,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12조원 이상의 금액을 상속세로 납부하는 동시에 개인 소유의 미술품들을 국립기관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국보급, 보물급 문화재도 많다고요?

 

김준혁> , 상당히 많이 있죠. 기본적으로 이건희 회장이 소유했던 그 미술품들이 국가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증된다는 것에 굉장히 지금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요. 그 과정에서 지정문화재가 한 60건 정도 있습니다. 국보가 14건 있고요. 보물이 46건이 있습니다. 굉장하죠.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데, 국보 14, 보물 46건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건데요. 특히나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로 되어 있고요. 국보 제217호였던 금강전도도 같이 있고요. 단원 김홍도 선생이 그렸던 추성부도도 보물 1393호가 있고 천수관음보살도도 보물 2015호로 지정되어 있는 게 있는데, 정말 엄청난 그런 미술품들 문화재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동형> , 국보 14, 보물 46건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 같은 엄청난 그림인데, 상식적으로 이런 것은 국가가 소유했을 것 같은데 개인이 소유했을까요?

 

김준혁> 이런 작품들 같은 경우가 이제 대부분 국가가 소유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많은 미술품들은 특히나 이제 문화재로 지정된 것 중에 상당수가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또 개인이 소장한 것들을 미술관으로 만들어서 보관하기도 하고요. 혹은 개인이 집안에다가 갖고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동형> , 우선 외국에 반출 안 되는 게 중요할 테고, 지금 이건희 회장의 이런 것들이 출현돼서 개인이 아니고 많은 분들이 함께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굉장히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김준혁> 그렇죠. 사실 매우 중요한 문화재들이 집안에 소장하고 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게 많이 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초상화를 5점 정도를 기증받아가지고 그 중에 4점을 제가 보물로 지정을 시켰었는데 대부분들이 다 개인 집에 그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부분들은 전혀 볼 수가 없었던 거죠. 그런 증손들에게 설득을 해가지고 나와서 이제 박물관에 기증하게 했던 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미술품들을 리움미술관이든 아니면 호안미술관이든 미술관으로다가 이제 전시를 하게 해서 일반시민들이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높이 평가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딱 이건희 회장만 그런 건 아니었고요. 지금 상당수에 많은 재력가들 중에 미술품을 소유하는 분들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곳들도 많이 있긴 합니다.

 

이동형> , 알겠습니다. 최근 구례 화엄사의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 승격이 예고가 됐다, 이런 얘기가 있던데, 이게 국보로 승격 결정하면 딱 국보가 되는 것 아닙니까?

 

김준혁>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대부분 99.9%는 문화재청이 국보지정을 예고를 하면 다 국보가 되는 거죠. 그러나 이제 혹여 라도 요즘 많은 분들의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고 또 전문가들의 판단 문제에 있어서도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제 국보지정 예고를 하고나서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다든가 아니면 또 관련된 분들의 의견을 들어서 문제점을 확인하는 경우들을 하는 거죠. 보통 한 달 정도 이렇게 지정예고를 하고 문제점을 접수 받는데,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거로는 특별히 문제점을 지적받아갔고 국보지정 예고를 철회했다는 건 들어본 적은 없어요.

 

이동형> 그런데 방금 얘기한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원래 보물이었지 않습니까?

 

김준혁> , 그렇습니다.

 

이동형> 보물에서 국보로 올리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준혁> 그렇죠. 이게 2008년에 보물로 지정이 됐어요. 사실은 2008년에 보물로 지정된 것도 굉장히 저는 늦게 지정이 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제 기본적으로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나무로 만든 건데 높이가 1000미터나 됩니다. 그러니까 현존하는 우리나라에 나무로 만든 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할 수 있죠. 만약에 이게 청동으로 만들었다거나 아니면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이렇게 3미터나 되는 큰 불상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나무로 만든 것들은 흔치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당시에도 이제 보물로 지정이 되면서 실제로 삼신불이라고 하는 것이 화엄경에 나오는 불상들인데 이렇게 삼신불로 온전하게 조성된 것이 화엄사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이제 국보로 지정이 된 것은 문화적 가치가 큰 것도 있지만 실제로 이 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사연에 대한 것이 명백한 기록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불상을 만들기 위해서 1,320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이 시조를 한 거예요. 화엄사에 있는 이 불상을 만들었던 당시에 승려들이 당대 최고의 조각승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이 합작을 해서 만들 거였는데, 각각 승려들이 독자적인 위상을 자치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3명의 승려가 합작으로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들, 그러니까 조선 중기 이후에 이제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당대 최고의 조각승려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들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 더해서 1,32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시조를 읽고 그 명단이 고스란히 나왔기 때문에 그것은 문화적 가치가 더 크다, 라고 판단해서 국보로 지정하게 된 거죠.

 

이동형> , 그럼 화엄사 국립공원 지리산 내에 있다고 하던데,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도 그러면 화엄사 내에 있는 겁니까?

 

김준혁> 당연히 그렇죠. 대웅보전에 있고요. 사실은 화엄사 안에는 각황전이라고 해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그 종각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어요. 그 종각 자체가. 또 화엄사 사사자 석탑, 매우 중요한 유물들이 다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죠. 그런데 기본적으로 화엄사가 말 그대로 화엄이라고 하는 것이 화엄교에서 나온 말 아니겠습니까? 화엄십찰이라는 게 있어요. 화엄경을 중심으로 해서 가장 뛰어난 10개 사찰을 화엄사찰이라고 하는데,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만든 사찰들이거든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지엄스님이라는 분으로부터 화엄학을 공부하고 나서 신라로 돌아와서 화엄학을 전파를 했고 그때 이제 만들었던 사찰이 부석사, 낙산사 이런 절들인데 그 뒤에 그의 제자들이 전국에서 화엄학을 전파하는 사찰들을 만들게 됐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 지리산에 있는 화엄사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이동형> 그럼 이게 한 1500년 이상 된 것 같은데.

 

김준혁> 이거는 710년경 쯤 만들어진 겁니다. 경덕왕 때 만어진 건데요. 신라가 통일하고 난 이후에 가장 중요하게 만들었던 신라의 굉장히 중요한 공력을 들여서 만들었던 사찰로 봐야 되겠죠. 그런데 이제 안타깝게 이 사찰이 임진왜란 때 불 타버렸어요. 만약에 그때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그 모습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거든요. 사실 화엄사 같은 경우는 6.25 때 불타지 않았거든요. 당시에 이제 6.25 때 차일혁이라고 하는 총경이 지리산 토벌대장을 갔었을 때 여기를 불 질러야 된다고 하는 명력이 내려왔는데, 화엄사가 천년사찰이고 굉장히 중요한 곳인데 이곳을 어찌 불 지르느냐, 라고 해서 차일혁 총경이 이 화엄사를 보존하게 했거든요. 만약에 당시에 그런 결단이 없었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가 국보로 지정되는 이 문화재는 전혀 존재할 수 없었던 거죠.

 

이동형> , 우리가 전쟁이 전란이 워낙 많은 국가여서 어떻게 이렇게 오래된 사찰이 보존될 수 있었을까 궁금했었는데 임진왜란 때 한번 화재가 났었군요.

 

김준혁> 임진왜란 때 한번 화재가 났었고 당시 이제 숙종 때 그때 벽암각성이라고 하는 승려가 이 사찰을 좀 복원 주도를 했거든요. 아까 1320명이라고 하는 시조 명단이 나온 것은 삼신불상을 갖다가 만들기 위한 명단이라기보다 화엄사 복원 자체를 하는데 시조했던 사람들이었고요. 실제로 벽암각성이라고 하는 분은 인조 때부터 활동했던 승려였는데 그 유명한 남한산성 축성의 책임자였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남한산성 축성하고 난 이후에 전국에 중요한 사찰들을 보고서 다녔는데 또 이 화엄사 말고 복원했던 곳이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 이것도 벽암각성에 의해서 만들어졌고요. 법주사 앞에 가면 벽암각성비가 굉장히 큰 비가 있고 특히나 이제 또 화엄사 같은 경우도 각성 스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데 당대 뛰어난 승려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찰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에도 왕실에서 상당히 많은 지원을 하면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동형> , 지금 제가 보니까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뿐만 아니고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이 이 화엄사에 엄청나게 많이 있네요?

 

김준혁> 보통 사찰이 아닙니다. 화엄사가 아마도 단일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사자석등이라든가 쌍사자, 네사자 석탑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이제 석탑이나 석등은 신라 때 꺼 거든요, 이게 불에 타지 않았으니까 신라 때 가장 화려했던 석조 기술이 완전하게 화엄사에 지금 남아있다, 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동형> , 불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화엄사에 가서 여러 가지 고려시대, 조선시대 유물들을 한번 관람하는 것도 나름 재밌을 것 같네요.

 

김준혁> 그럼요. 저는 작년에도 다녀왔었습니다.

 

이동형> 알겠습니다. 우암 송시열 초상화가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어요, 초상화가 이렇게 보물이 되는 경우가 좀 있습니까?

 

김준혁>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초상화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꽤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우암 송시열 초상화가 보물로 지정된 것이 너무 늦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는 김창엽이라고 하는 조선후기 문인학으로하면 최고의 인물이 그린 초상화고요. 특히 이제 송시열이 굉장히 뚱뚱한 살찐 그런 모습인데 그런 눈매하고 턱 이런 부분들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면서 예술적 가치가 굉장히 높았거든요. 그런데 아마 이게 문화재 지정이 잘 안 된 이유가 개인이 소장하고 그리고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외부로 잘 공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드는데 저는 이번에 보물로 승격되는 점에 대해서 굉장히 잘 됐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동형> , 알겠습니다. 아까 저희가 화엄사 얘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우리나라 보물의 대부분이 불교문화재다. 그런 지적이 있긴 한데 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 것 같긴 해요.

 

김준혁> 사실 신라 때 국교가 거의 불교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고려시대 때도 거의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그 시기에 만들어졌던 수많은 문화재들이 현존 남아있는데 그걸 갔다가 아무래도 년도 오래되다 보니까 국보로 지정이 많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불교적 중심으로 되어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좀 무리가 있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이동형> , 알겠습니다. 오늘 국보, 보물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 한때 청주에서 직지찾기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아직도 못 찾으신 거죠?

 

김준혁> 아닙니다. 직지는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 있습니다. 제가 직접 2016년에 가서 봤고요.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고 하는 책이 이제 청주에 그런 흥덕사라고 하는 절에서 인쇄됐다, 라고 나와 있는데 그 책의 가치를 프랑스 초대 공사였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라고 하는 초대 공사가 알고 그걸 구입을 해서 갖고 갔어요. 그래서 이제 그걸 갔다가 프랑스 재벌한테 팔았는데 그 재벌이 그걸 죽기 전에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 기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료로 보관을 하고 있고요. 직지가 A4지 한 장보다 작아요. 사이즈가. 실제로 얇기도 굉장히 얇은데 이 직지가 어쨌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나라 문화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들이고 청주에서는 그 직지를 가지고 세계기록유산 대회도 열 정도로 직지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운동에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동형> 프랑스는 우리가 돌려달라고 말해도 절대로 안 돌려줄 것 같고.

 

김준혁> 사실은 제가 가서 돌려달라고 이야기했었는데요. 그랬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더라고요.

 

이동형> 국내에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 꺼 말고, 이런 얘기도 있어서 한번.

 

김준혁> 사실은 그런 겁니다. 직지심체요절에 대한 기록이 모리스 꾸랑이라고 하는 당시 프랑스 공사 밑에 있었던 서기관이 썼던 책에 한국 서지라는 책이 있거든요. 그 한국 서지에 프랑스가 갖고 간 자료 말고도 또 있었다, 라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런 내용 때문에 국내에 직지가 있을 것 이다, 라고 해서 찾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안타깝게도 아직도 찾고 있지 못합니다.

 

이동형> 외교적으로 프랑스랑 불가능할까요?

 

김준혁> 제가 볼 때는 프랑스 국립 박물관 담당했던 아시아 관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요. 김영삼 정부 때 프랑스에 갖고 왔던 병인양요 의궤 반환할 때 그때 여자 사서 기억하십니까? 그 사서분이 그 직지를 제가 갔는데 만지지도 못하게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한국 문화가 굉장히 낮은 수준이라고 폄하를 했었는데, 그런데 또 생각을 달리하더라고요. 그 분이 이제 정년퇴직을 하셨기 때문에 굉장히 강성파였거든요? 나머지 밑에 직원들이 절절 매더라고요. 이제는 새롭게 아마도 프랑스 정부하고 프랑스 국립 도서관하고 협력 사업을 좀 더 원활하게 전개하면 저는 완전한 반환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대여를 통해서 우리나라 국립 중앙박물관 혹은 국립도서관에서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이동형> 알겠습니다. 기대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준혁> , 감사합니다.

 

이동형> 지금까지 한신대 김준혁 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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