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차이나
  • 방송시간 : [월~금] 06:38, 14:53, 20:36
  • 진행자: 임대근 교수 / PD: 신아람

방송내용

11/29(금) 한국에는 왜 화교가 많지 않을까?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11-29 12:22  | 조회 : 396 

大家好! 안녕하세요. 한국외대 교수 임대근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화교에 관한 말씀을 좀더 드릴까 하는데요, 한국에서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역사적인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말기에 들어온 화교는 일제강점기에도 승승장구합니다. 1930년에는 6만 명이 넘는 화교가 살고 있었는데요, 당시 인구 비율로 따지면 2%에 이르는 숫자였습니다. 이들이 조선 땅에서 장사와 노동을 하면서 그 일자리를 놓고 늘 조선인과 충돌을 빚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나는데요, 바로 1931년 중국 장춘에서 벌어진 만보산사건입니다. 중국인 학영덕이라는 사람이 수로를 개척하기 위해 일본에 붙어서 회사를 세우고 조선인들을 농사꾼으로 데려오겠다고 계약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조선인들이 농사를 지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로 개척 공사를 하던 조선인이 중국에 체포당하고 또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일본은 장춘의 토지를 개간하면 중국 침략에도 도움이 되니까 방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농민 400여 명이 나타나 공사를 방해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중국 농민이 서로 위협 사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당시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면서 만보산에서 조선인이 여러 명 죽었다고 오보를 냅니다. 인천 같은 경우, 호외는 7월 2일 밤에 배포되었고, 이튿날 새벽부터 난리가 납니다. 현지 상황을 자세히 알 길이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사람에 대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화교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5천 명에 이르는 군중이 화교들이 운영하던 상점과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화교에 대한 분노는 전국을 향해 퍼져나갔습니다. 한국 화교 사회의 불행한 역사입니다.
감사합니다. 再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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