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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삭발은 日 군국주의적 결의 문화가 우리나라에 침투한 것”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9-19 10:45  | 조회 : 2193 
YTN라디오(FM 94.5)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9월 19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노영희 변호사(이하 노영희): 뉴스를 각별한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이죠. 뉴스 탐구생활, 오늘은 바른 역사 시간입니다.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뉴스를 좀 똑바로 들여다봐야 한다, 이건데요. 오늘은 우리 귀한 전우용 역사학자를 조금 일찍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노영희: 오늘은 어떤 뉴스를 좀 똑바로 봐야 할까요?

◆ 전우용: 똑바로라기보다는 그동안 많이들 했었어요. 삭발. 결의를 표시하기 위해서, 노동운동 관련해서 나오기도 했고.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은 세계무역기구, 뭐랄까요. 자유무역에 반대해서 농촌시장 살리자고 한 여성이 삭발했던 게 기억에 남는데. 요즘 또 이제 삭발이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어서 우리가 언제부터 삭발했나, 이 이야기 좀 해볼까 합니다.

◇ 노영희: 역사적으로 삭발에 대해서 한 번 공부를 심도 깊게 해볼 수 있겠습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대한제국 시대에 단발령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전에는 삭발이란 게 없었던 것 같고 우리나라,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머리카락을 자르느니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 이런 분위기였다고 하던데, 맞나요?

◆ 전우용: 청취자 여러분들 한 번 기억을 되짚어보시죠. 계백 장군이 황산벌로 싸우러 나가기 전에 삭발을 했는지, 화랑 관창이 역시 또 계백과 싸우기 위해서 나갈 때 삭발을 했는지. 그런 기록이 없어요. 특히 이제 조선시대 유교 문화에서는 더 지금 말씀하셨듯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니, 불감훼손이 효지일야라. 효를 중시했기 때문에 더 안 했고요. 삭발은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불교 문화권에서는 출가의 상징이었죠. 왜냐하면 머리카락이 나고 자라고 하얗게 새고 그리고 빠져요. 이게 생로병사를 상징하는 신체부위로써 살아있는 동안에 생로병사를 거듭하는 게 눈에 보이는 신체부위로써 머리카락만한 게 없거든요. 불교에서 스님들이 삭발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생로병사의 사고로부터 해탈하겠다. 이게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잖아요. 생로병사의 사고로부터 중생을 해탈시키겠다. 그러니까 그 해탈의 의미로써 삭발을 하는 것이지, 결의라고 한다면 종교적 결의인 것이죠. 이것이 세속적이거나 또는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결의로써 삭발하는 그런 문화는 우리나라에 없었죠.

◇ 노영희: 종교적 결의나 해탈의 의미로 삭발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 하는 것처럼 정치적 의사의 표시로 하는 것은 기존에 우리 예전의 가치관하고는 맞지 않았다.

◆ 전우용: 아니, 정치적 의사를 떠나서 그냥 결의를 이걸로 표현하는 법은 없어요. 한 번도 없었죠. 누가 이런 식으로 머리카락을 잘라서 결의를 표현해요. 그리고 게다가 머리카락은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코드였어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동아시아 다 마찬가지였는데요.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기 전까지도 그랬었고. 남성들의 경우에는 머리를 결혼을 하면 끝을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틀잖아요. 일본 같은 경우에는 앞이마를 조금 밀어서 상투를 틀었고요. 여성은 뒤로 말아서 거기다가 비녀를 꽂아요. 이게 굉장히 성적 상징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상투를 자른다, 이런 것은 마치 거세한다는 느낌을 갖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성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스님들의 경우에는 그런 결의기 때문에 삭발이 됐던 것이지, 남성의 경우에는 이것은 단발 같은 경우는, 단발 자체가 일종의 거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래서 1895년 단발령 내렸을 때 이게 단지 유교적 반발이 아니었어요. 문화 자체로써 이건 한국인의 남성성을 다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그 반발이 그만큼 격렬했던 것이죠.

◇ 노영희: 그렇군요. 오히려 과거에는 단발 삭발 이게 바로 성적인 상징을 의미하고, 거세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반발했다. 그러면 정치적 결의 같은 걸 다질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과거에는?

◆ 전우용: 정치적 결의라고 하는 게 왕실 앞에 왕국 앞에 가서, 최익현이 했던 게 있잖아요. 유명한 얘기죠. 오두는 가단이나 차발은 불가단이라, 내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를 수는 없다. 

◇ 노영희: 목숨을 차라리 내놓겠다.

◆ 전우용: 그렇죠, 머리카락을 자르느니 목숨을 내놓겠다. 그러고는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린단 말이에요. 차라리 죽여라. 무슨 결의라고 하는 것이 여러 방식들이 있지만 이것은 좀 특이한 결의긴 했어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위해서 준비할 때, 준비 직전에 의병활동을 할 때 친한 동료들과 함께 단지동맹회라는 걸 만들거든요. 손가락을 자르고. 지금도 안중근 의사 손가락 하나 없는 손바닥 도장, 이거 많이 로고 같은 것에 붙어 있잖아요. 대한국인 안중근 써가지고. 그런 경우들이 있었고요. 결의라고 하는 것이 피를 흘려서 결의를 할지언정 머리카락을 잘라서 결의를 하진 않았죠.

◇ 노영희: 교수님 아까 머리카락은 예전에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했는데, 그런 머리카락을 자르느니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으면 또 해석의 의미가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삭발이라는 개념이 일반인에게까지 퍼지게 된 건 언제부터라고 보면 됩니까?

◆ 전우용: 첫 번째는 1895년 단발령인데, 단발령은 상투만 자르는 것이었어요. 상투만 자르고 그다음에 머리카락을 어떤 모양으로 할 것이냐라 문제였죠.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발기술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이발기계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고종의 머리도 정병하가 상투를 잘라주고, 그다음에 옆에 있는 일본인 이발사가 다듬어줬다고 하고요. 주로 한국인들에게 근대적 이발기술을 가르치고 이발을 해준 사람은 초기에 중국인 이발사들이었어요. 그런데 이발기술이 좀 늘어나면서 도시 지역에서는 여러 이발소들이 생기는데 농촌 지역에서는 그게 또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180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발명된 바리깡이라고 하는 이발기계가 국내에도 들어왔죠. 이것 있으면, 특히 근대적 초등학교, 1910년대 심지어 1920년대까지도 시골에 왜 그 당시에는 보통학교라고 그랬어요. 보통학교 학생들 중에는 20살 넘어간 사람들도 많았고 상투쟁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런데 머리를 짧게 자르려면 농촌 아이들 같은 경우 많은 경우에 머리를 다듬을 만한 기술은 없으니까 삭발, 그냥 빡빡 민다고 하죠. 이런 경우를 많이 했고요. 그것보다도 이런 위생과 단발 문제가 결합됨으로써 일본군대는 일찌감치 삭발이라고 하는 형태를 군인들한테 강요했죠. 다 삭발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화적 코드가, 역시 문화적 코드가 끼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일본은 우리와 달리 종교 자체가 다양한 역시 아시아의 유교나 불교나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일본 전래의 신도를 중심으로 불교를 종합한 이른바 신불습합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머리를 자른다는 것이 마치 승려, 사람들이 머리를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끊어버리고 오직 국가에만 충성한다고 하는 군국주의 정신의 상징처럼도 받아들여졌던 것이죠. 그래서 일본에서 삭발은 일종의 군국주의 국가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의의 표명이 됐던 것이고. 이런 문화 때문에 나중에 일본의 사무라이들, 특히 본주로부터 소속을 잃은 그런 사무라이들을 낭인이라고 하잖아요. 이 낭인들 중의 일부가 일본 야쿠자의 원조가 된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는 일인데 이 사람들도 야쿠자 집단에 입단할 때 군대에선 받아주지 않는데도 입단할 때 머리를 빡빡 깎는 일들이 종종 있었죠. 지금도 일본 아쿠자 집단 내에서는 머리 빡빡 깎는 삭발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 식의 이른바 군국주의적 결의 문화와 관련해서 우리나라에 침투해 들어왔고요. 초등학생들 중학생들, 저희만 해도 중학교 때 머리 빡빡 깎고 입학했는데, 초등학생들 중학생들 머리 빡빡 깎는 건 하나는 위생적인 관점과 더불어서 이발기술이 부족했던 사안이 관련돼 있고. 성인들이 머리를 빡빡 깎는 건 바로 군국주의적 천황제에 헌신한다고 하는 일종의 상징처럼 일제강점기 국내에 들어왔던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독립운동가들이 삭발한 사례는 제가 알지를 못해요. 독립운동하러 가겠다 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삭발한 것도 아니고요. 독립운동하러 가겠다 하면서 삭발하고 독립운동하러 간 사람 없어요. 백범 선생도 그렇고 어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거기에 복종하겠다. 이런 사람들이 삭발 결의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죠.

◇ 노영희: 삭발이라고 하는 것은 문화적 코드로 해석해보면 일본에서 천황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아니었다, 이런 건데. 그러면 우리 현대사회에서는 왜 민주화를 위해서 대의를 위해서 삭발이라고 하는 게 갑자기 이렇게 변화된 겁니까?

◆ 전우용: 이게 우리 의식 속에 굉장히 많은 식민지 시대의 경험들이 극복되거나 성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전에도 여기서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국민의례 할 때 들어가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호국영령이라고 하는 건 전형적인 일본 신도식 개념이거든요. 이것도 역시 1937년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이후에 일본인들의 강요에 의해서 국내 의례에 포함됐던 거예요. 그런데 해방되고 나서도 이게 식민지 잔재라는 걸 인식을 못하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거죠. 나라를 지켜주는 영면한 귀신, 이건 일본 신도에서나 쓰는 얘기거든요. 우리는 돌아가시면 그냥 우리가 제사 지내는 것이지, 나라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돌아가셔까지 나라를 지켜 달라,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한국적 예의론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 노영희: 그분들도 좀 쉬셔야 하니까 그렇군요.

◆ 전우용: 아니, 그렇게 고생하셨으면 이제 편히 후손들한테 대접을 받으셔야지, 나라를 지키다 죽어서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켜야 하느냐. 이렇게 돼버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일본식 신도 개념의, 야스쿠니신사에 모셔놓은 것이 일본의 호국영령들이죠. 그런데 그걸 우리가 잘 모르고 계속 쓰고 있는 것처럼 삭발결의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식되어 왔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몇 십 년간 하나의 습관이 되다 보니까 이게 가능한 것 같다고 첫째 생각한 것이 하나이고요. 두 번째로는 이제 뭔가 결의를 표시해야 하는데, 현대 사회에서. 단식은 너무 강할 것 같고, 단식보다 약하게 결의를 표시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일종의 표시, 결의의 표시로써 이것도 하나의 가능한 방법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삭발을 했던 부분들이 있죠. 그런데 그게 과연 결의의 표시가 될 수 있겠느냐. 좀 특이한 것이, 글쎄요. 일본에서 그러는 사례를 잘 못 봤어요. 중국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잘 못 봤고요. 현대에는 삭발 자체가 일종의 패션, 특히 남성들에게는. 여성들은 일부 간혹 아주 특이하게 삭발하고 다니시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남성들에게는 패션코드처럼 돼 있기 때문에 그게 정말 중대한 자기 신체 일부를 손가락 자르는 것처럼 일부에 위해를 가해서 결의를 표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하시는 분들은 스스로 그렇게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왜냐면 저희 세대가 갖는 경험은 그렇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삭발 다 했어요. 뭐 그게 대수냐,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게 있었어요.

◇ 노영희: 까까머리 중학생 이런 얘기 나왔는데. 사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이언주 의원이 먼저 삭발을 이번에 단행했는데. 그런데 사실 여성분이었단 말이에요. 여자분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게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단발로 자르는 것도 심각한데 삭발을 한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남성의 삭발과 여성의 삭발을 조금 다르게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얘기 있는 거죠.

◆ 전우용: 저는 그렇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여성의 삭발 같은 경우 결의를 그렇게 표시할 수는 있는데, 다만 그 결의 표시 방법이 뭐랄까요. 우리의 역사에 비춰보자면 썩 그렇게 흔쾌해 보이진 않는다라는 거죠.

◇ 노영희: 그렇군요. 오늘 말씀 듣다 보니까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제가 여기까지 들어버렸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노영희: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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