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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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존재 ‘뼛속 깊은 민족주의자’ 김원봉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4-05 20:47  | 조회 : 3838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4월 5일 (금요일)
■ 대담 : 염인호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한 존재 ‘뼛속 깊은 민족주의자’ 김원봉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와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함께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의 대사로 유명한 말이죠. 대표적인 항일무장단체인 의열단의 단장으로 백범 김구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내걸릴 정도로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독립운동가 입니다만, 월북한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지금껏 서훈조차 이뤄지지 못한 인물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의열단이 창단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북도 남도 버린 인물, 비운의 독립운동가, 우리가 몰랐던 약산 김원봉에 대해서 바로 아는 시간 가져보겠습니다. 도움 말씀주시기 위해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염인호 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염인호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이하 염인호)> 네, 안녕하십니까. 

◇ 이동형>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공중파 방송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금기어였던 적이 있었죠?

◆ 염인호> 네, 오랫동안 그랬던 거죠. 이번에 우리 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밀양을 갔습니다. 갔더니 김원봉 집에 기념관을 만들어놓고, 그 동네 일대가 전부 기념을 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30년 전에 밀양 갔을 때는 김원봉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참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하는 것을 이번에 많이 느꼈습니다.

◇ 이동형> 그 가족들도 사실은 김원봉의 월북 이후로 고초를 많이 겪었습니다. 빨갱이의 자손들이다, 빨갱이 가족들이다, 이런 이유로. 그전에 했던 독립운동의 공은 다 사라져버린 일들이 있었는데요. 아직도 사실은 서훈 문제는 뜨거운 논란거리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약산 서훈의 적절성을 논의하기 위한 토론회도 열렸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 바른미래당 지상욱 의원이 갑자기 나타나서 토론 중단을 요구했었다고요?

◆ 염인호> 네, 맞습니다. 저도 그날 발표자로 참석을 했는데요. 카메라들이 굉장히 많이 설치가 되어 있고, 그분이 오셔서 이것은 짜고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진행은 됐습니다.

◇ 이동형>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 이런 이야기도 야당 의원이 한 것 같은데, 학자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염인호> 우리 사회에서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굉장히 많이 연구가 됐습니다. 대개 많은 학자들의 결론은 일제시대 때 민족주의자, 이렇게 평가가 됐습니다만, 정치하는 분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을 보고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그런 문제가 참 그런 문제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이동형> 백범 선생과 같이 일도 했었는데, 임시정부에서도 있었고요.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 라고 하면 역사학계에는 안 맞는 거다, 이렇게 결론내려도 되는 건가요?

◆ 염인호> 네.

◇ 이동형> 그런데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 이런 말 하는 것은 결국은 마지막에 월북했기 때문에 했던 건데, 이 월북의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본인이 원해서 간 게 아니고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내가 남한에서는 더 이상 못 산다, 내가 죽을 것이다. 그게 친일 경찰 출신들의 괴롭힘 때문에 그런 거죠?

◆ 염인호> 네,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한국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최근의 자료를 보면 중국인이 1952년에 쓴 회고록을 보면, 김원봉 선생은 북한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지만,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견딜 수 없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서 안 좋은 일도 당했다, 이런 얘기도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상황 관련해서는 잠시 후 자세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고요. 약산이 조직한 의열단은 어떤 조직인지, 그리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 염인호> 의열단은 1919년에 만들어져서 1935년에 민족혁명당으로 탈바꿈합니다. 의열단은 16년의 역사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열단은 1919년에 만들어져서 1925년까지 6년간의 활동을 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영화도 전부 1925년까지를 다루고 있는데요. 주로는 뜻이 있는 지사들이 권총이라든지, 폭탄을 가지고 일본의 관공서를 습격한다든지, 주요인들을 암살하는 그런 활동을 해왔습니다.

◇ 이동형> 백범의 대한애국단과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의 라이벌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 염인호> 네, 그렇습니다.

◇ 이동형> 의열단이 했던 의열 투쟁을 보면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또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김지섭 의사의 도쿄일본왕궁 폭탄 투척,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등 20여 회 차례 폭탄 투척이 있었고, 또 김상옥 의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요. 박재혁 의사는 사형을 당했고요. 다 20대의 나이에. 그렇기 때문에 일제에게는 의열단이 굉장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 염인호> 네, 그렇습니다. 당시에 이런 독립운동 단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외교활동을 주로 하는 독립단체도 있고 했습니다만,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해서, 그것도 사람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끄는 서울 한복판이라든지, 중국에서 가장 번화한 상해 한복판에서, 또는 일본 동경에서 벌이는 의열단의 투쟁은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공포스럽게 생각하고, 위험하게 생각했습니다.

◇ 이동형> 의열단의 암살, 파괴 투쟁은 1920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되는데, 조선의 청년들은 대담하게 국내의 조선총독부와 경찰서에 들어가 탄을 던지거나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 성우> (해설)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 부산경찰서는 굉음과 함께 흰 연기로 가득 찼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 집무실로 들어간 27살 청년 박재혁은 하시모토 슈헤이 부산경찰서장과 불과 1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폭탄을 던진다.“  

(쾅!) 

(박재혁) “왜놈 손에 죽기 싫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

(해설) “사형 집행 전, 긴 단식 끝에 박재혁은 순국한다.”  

(쾅!)
 
(해설)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에서 폭탄이 터진다. 수십 명의 관원들이 중경상을 입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7개월간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인물, 의열단원 김익상 이었다.”
  
(김원봉)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오, 이것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오.”
 
(해설) “의열단장 김원봉의 이 말 한마디에 항일투사로 변모한 청년은 법정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김상익, 법정에서)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다.”

(쾅!) 

(해설) “1923년 1월 12일,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진다. 혼란에 빠진 일본 경찰은 천여 명이 병력을 투입해 범인을 찾아 나서는데, 장장 3시간 35분 동안 벌어진 ‘1천 대 1’의 치열한 총격전의 주인공은 의열단원 김상옥 이었다.”  

(탕 탕 탕 탕) 

(해설) “일경과 교전으로 10발의 총상을 입은 김상옥, 결국 마지막 남은 한발로 자결하는데,” 

(탕 – 한발 총소리) 

(김상옥) “대한독립 만세”  

(해설) “11발의 총상을 입고 순국한 34살 청년 김상옥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 이동형> 의열단의 투쟁 가운데, 몇 가지를 구성해 봤는데요. 지금 김상옥 지사 같은 경우에는 왜놈들에게 더러운 꼴을 보이지 않겠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남은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고요. 앞에 박재혁 의사 같은 경우에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오기 전에 김원봉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나중에 도착하지 않습니까? 그 편지를 보면 앞으로 당신의 모습을 못 볼 것 같다, 이런 내용이 나오거든요. 결국은 의거를 이루기 전에 죽음을 무릅썼다,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의열단의 투쟁이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결국,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은 폭력 투쟁이 아니면, 독립을 이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 염인호> 네, 맞습니다. 

◇ 이동형> 이후에 의열단원은 20여 명을 이끌고 광저우로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이유는 뭡니까? 의열투쟁의 한계를 느꼈다, 이렇게 봐야 합니까?

◆ 염인호> 네, 그런 셈이죠. 의열투쟁의 목표는 그런 장렬한 투쟁을 통해서 민중을 각성시켜서, 그다음에 3·1운동 같은 것을 재연해보겠다, 이런 거였는데, 그런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희생자는 많지만, 결과는 그렇게 썩 바람직하지 않은, 그래서 일본의 통치는 더욱 안정되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활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새로운 활로가 결국은 군대입니까?

◆ 염인호> 맞습니다. 군대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중국이 혼란스럽고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안 됐습니다만, 이 무렵에는 중국도 거의 안정기에 접어들고, 육군사관학교도 만들고,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영향도 생기고 해서 그렇게 해서 의열투쟁을 접고 광저우로 내려갔습니다.

◇ 이동형> 중국 군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요?

◆ 염인호> 네, 맞습니다.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김원봉 본인이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장교 훈련을 받고, 의열단원들이 대개 그렇게 했죠.

◇ 이동형> 장제스에게 도움도 요청하고요.

◆ 염인호> 네. 

◇ 이동형> 그러고 나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는데, 그러면 여기는 전적으로 김원봉이 맡았다, 이렇게 보면 됩니까?

◆ 염인호> 그렇습니다.

◇ 이동형> 이 자금은 중국군으로부터 나온 거고요?

◆ 염인호> 자금은 당연히 장제스의 국민정부에서부터 나온 거죠.

◇ 이동형> 여기서 잠시 조선의용대 시절 약산의 연설을 육성을 통해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우> “조선의용대는 두 가지 의의가 있습니다. 첫째는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자기의 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려는 것이오, 또 한 가지는 중국전장 상에서의 일 국제종대인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우의 그 자체로서 중국의 국민을 환기해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조선의용대의 공작의 임무는 대적선전인 것입니다. 조선의용대의 공작의 임무는 대적선전인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더 나아가 10여만의 우리의 인민 동포가 있는 화북으로 가고 어제 의용대의 전투의 전과를 꼽고 꼽아서 우리의 피 끓는 젊은 동무를 모집해 적의 무기를 빼 무장해서 만주로 들어가 우리는 조선혁명군과 연합해서 우리의 조국으로 진입하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아에서 일본제국주의자를 완전히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 이동형> 당시 육성을 복원하다 보니까 잘 안 들리는데요. 내용을 요약하면,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자기의 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려고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 공작 의무는 대적 선전전이다. 또 많은 우리의 피 끓는 젊은 동무를 모집해서 무기를 빼뜨려 무장해서 만주로 들어가 조선혁명군과 연합해 우리의 조국으로 진입하려 한다. 결국은 이 동아에서 일본제국주의자를 완전히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내용의 연설이었고요. 이 조선의용대는 앞의 약산의 이야기처럼 선전전이 가장 주된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호가장전투, 반소탕전, 이런 것도 설명을 해주십시오.

◆ 염인호> 그러니까 38년 10월에 조선의용대가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주로 활동 범위는 남쪽에서 북쪽, 만리장성 이남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하게 되는데, 그런 투쟁이 주로 선전전입니다만, 선전하다가 항상 무장해서 선전하기 때문에 선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맞붙어서 싸우기도 하고 합니다. 호가장이라고 하는 북경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선전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과 접전을 하게 되는데, 그때 조선의용대 4명이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중상을 당하는 그런 일이 있었고요. 42년도에는 태왕산에서 두 분이 전사하시는데, 두 분 다 상당히 급이 높은 분이고, 두 분의 묘는 지금 중국에 있습니다.

◇ 이동형> 호가장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조선의용대 군가, 독립군가, 이런 것을 부르고 있더라고요? 아마 계속해서 대대로 이어진 것 같아요. 그만큼 이 호가장 마을 사람들과 조선의용대 군인들이 합심해서 일제에 대응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고요.

◆ 염인호> 그런 셈이죠.

◇ 이동형> 아까 우리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장제스와 손을 잡았을까. 어떻게 백범과 같이 일을 했을까. 이것은 의문이 들거든요? 어떻습니까?

◆ 염인호> 제가 쭉 볼 때는 김원봉은 아주 뼛속 깊이 민족주의자입니다. 민족의 독립이 가장 우선 목표고, 다만 수단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장제스의 지원 하에서 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진보적인 젊은이들을 포용했습니다.

◇ 이동형> 그러니까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주의자와 함께 일할 수도 있고, 공산주의자와도 함께 일할 수 있다. 목표가 독립이니까, 이런 것이죠? 알겠습니다.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군무부장이면 지금으로 쳤을 때 국방부 장관쯤 되지 않습니까? 

◆ 염인호> 네, 맞습니다.

◇ 이동형> 해방 후 임정요인의 일원으로 귀국합니다. 2진으로 귀국하게 되는데요. 백범 선생 외에 여러분들이 1진으로 귀국했는데, 1진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사실 푸대접 받았는데요. 2진으로 귀국한 사람들은 더욱 푸대접을 받았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그런데 30여 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김원봉 역시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부푼 꿈을 꾸었을 텐데, 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약산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약산이 비주류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 염인호> 약산은 중국에 있을 때는 주류죠. 중국에 워낙 넓고 탄탄한 인맥이 있고 하니까 가능했습니다만, 한반도로 들어오면 한편으로는 토착 민족주의자, 혹은 토착 사회주의자들이 힘이 있고, 더구나 남쪽은 미국과 연계 있는 사람들이 세력을 잡을 수밖에 없고, 북쪽은 또 소련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세력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거기에 비하면 김원봉의 경우에는 세력이 빈약한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우리가 앞에 오프닝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이후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남로당의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 이런 혐의로 약산이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게 되는데요. 해방 이후입니다. 의열단 동지 유석현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정정화 여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 성우> (유석현) “김원봉은 붙잡혀 갈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다. 이어서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한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했다.”

(정정화) “언젠가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의열단의 의백이었고 민혁당의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동형> 친일 경찰 출신에게 수모를 당하고 사흘을 울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그 평생 독립운동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일경에 체포당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요. 그런데 해방된 조국으로 와서 조선독립군을 잡아 가두던 친일 경찰 출신에게 체포되어서 이런 모독을 당했기 때문에 사흘 울었다는 말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는 가는 것 같습니다.

◆ 염인호> 네, 그렇습니다.

◇ 이동형> 그리고 여운형 선생이 이후에 피살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아마 나도 저런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가 평양에서 개최되는데, 이때 약산이 백범 선생과 함께 넘어가게 되는 거죠?

◆ 염인호> 네, 비슷한 시기에 넘어갔다고 생각이 됩니다.

◇ 이동형> 그리고 백범 선생은 다시 돌아왔는데, 약산 선생은 거기에 눌러앉았다. 그렇기 때문에 약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냐, 북한 정권 탄생에 기여한 것 아니냐고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요. 김일성으로서는 혁혁한 항일 투쟁의 공적이 있는 김원봉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염인호> 네, 그렇습니다. 제가 본 자료에 의하면 북한 쪽에서는 김원봉 선생이 남한 주민들한테 상당히 영향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높이 사서 그렇게 환영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 이동형> 그렇게 환영하고, 이용하고, 결국은 숙청당하지 않습니까?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는데, 지금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사망한지는 모르죠?

◆ 염인호> 현재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 이동형> 북한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요?

◆ 염인호> 네.

◇ 이동형> 묘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요?

◆ 염인호> 네, 알 수가 없습니다.

◇ 이동형> 그렇게 된 상태입니다. 결국은 남한에서도 버려졌고, 북한에서도 버려졌다, 그런 말이 이랬기 때문에 나오는 건데요. 문제는 서훈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느냐. 일단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조금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염인호> 네, 맞습니다. 서훈과 관련해서 논란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서훈 과정에서의 논란을 연구자로서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이미 독립운동가 김원봉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이 연구가 되었습니다만, 사실은 월북 이후, 또는 월북 과정이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초보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연구가 충실히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우리 댓글로도 많은 분들이 항일투쟁에, 독립운동에 좌익, 우익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는데요. 당시에 우리는 식민지 시절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분도 계셨고, 또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분들도 계셨고, 무정부주의 이념을 가진 분들도 계셨고, 그분들이 결국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게 가장 컸던 것 같거든요. 마지막으로 약산에 대한 서훈 문제를 조금 불편해하는 분들을 위해서 김원봉을 연구한 학자로서 교수님이 한 마디를 해주시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 염인호> 일단 그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김원봉의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또 연구된 것들에 대해서 이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다, 이런 표현. 이런 것을 보고 제가 느끼는 바는 그렇습니다. 조금 많은 연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국가에서 더 지원해주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다섯 번째 이야기, 오늘은 약산 김원봉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습니다. 도움 말씀주신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염인호 교수님, 고맙습니다.

◆ 염인호>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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