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역사
  • 진행자: 김효진 강사 / PD: 박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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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수) 아관파천 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날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2-20 11:07  | 조회 : 842 

안녕하세요? 이야기 들려주는 역사선생님, 김효진입니다.

1897년 2월 20일, 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과 왕세자가 드디어 궁궐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온 궁궐은 원래 살던 경복궁이 아니라, 러시아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이었습니다. 고종은 왜 환궁할 장소로 경운궁을 선택한 것일까요?

1894년 7월 말,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핑계로 한반도에 들어온 청군과 일본군이 청일전쟁을 시작합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청은 패전의 댓가로 일본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타이완 할양과 함께 랴오둥 반도마저 넘겨야만 했습니다. 이때, 기세등등한 일본에 제동을 건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일본의 랴오둥 반도 할양을 반대하면서,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이른바 ‘삼국간섭’이란 사건을 벌입니다. 러시아의 거센 반대에 일본은 하루 만에 랴오둥 할양 의사를 철회하지요. 이를 본 조선 조정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을 길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친러 내각이 구성됩니다.

이러한 조선의 반응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은, 가장 잔인하고 무례한 방법으로 복수를 합니다.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입니다.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결국,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엄상궁의 기지로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지요. 안전한 은신처를 찾은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여러 열강에게 광산채굴권, 삼림채벌권, 금광채굴권 등 각종 이권들이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점차 조선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고종은 백성들에게 환궁할 것을  약속하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미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이 가까운 경운궁으로 환궁하게 됩니다. 그렇게 경운궁으로 돌아온 날이 바로 1897년 2월 20일입니다. 아관파천은 임금의 무능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들려주는 역사선생님, 김효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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