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시간 : [월~금] 17:00~19:00
  • 진행 : 신율 / PD: 신동진 / 작가: 강정연, 정은진

인터뷰전문보기

이종걸 “100년 전 2.8에는 남과 북이 없었다, 서훈 이념 새롭게 정립해야”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2-08 20:22  | 조회 : 4885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2월 8일 (금요일)
■ 대담 :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종걸 “100년 전 2.8에는 남과 북이 없었다, 서훈 이념 새롭게 정립해야”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100년 전 오늘, 일본 도쿄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청년들의 이름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식민지 국가의 청년 600여 명이 일본 수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을 했다는 건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인데요. 이날의 외침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이후 임시정부 수립도 가능했다는 평가입니다. 100년을 기념하면서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는 2.8 독립 선언 기념행사가 동시에 열렸습니다. 도쿄 행사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 연결해서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의원님?  

◆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하 이종걸)> 네, 안녕하십니까. 이종걸입니다. 

◇ 이동형> 지금 어디십니까?

◆ 이종걸> 일본 동경입니다.

◇ 이동형> 2.8 독립선언 기념식. 매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올해는 100주년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컸겠습니다.

◆ 이종걸> 네, 매년 해왔습니다만, 특히 올해는 곧 북미 정상회담으로 우리의 평화가 열릴 벽두에 있고요. 그리고 또 일본이 초계기 도발이라든지, 기타 미래에 대한 한일 양국의 우호 발전에 역행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 때에 100주년이 됐습니다. 2.8은 당시에 그야말로 일제의 야만적 탄압에 모든 것들을 각오하고 참여한 젊은이들, 600여 명의 한인 유학생들이었습니다만, 그것을 대표하는 열한 분. 열한 분이 서명한 그분들은 그야말로 남과 북도 없었고, 동서도 없었고, 평안도와 함경도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조국의 위기를 구하겠다는 애국의 단심으로 2.8 독립선언을 단행했고, 그래서 3.1에 노장청, 남녀 모두가 하나가 되는 물결을 만들어낸 도화선이 됐습니다.

◇ 이동형>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적국의 심장 아니겠습니까? 수도 한복판에서 우리 청년들이 독립을 외쳤다. 의원님도 독립운동가 후손이시니까 아마 더 가슴이 뛰었을 것 같아요.

◆ 이종걸> 네.

◇ 이동형> 의거가 있었던 그 현장에서 행사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장소는 조금 다른 곳에서 열렸나요?

◆ 이종걸> 예전에 있었던 만주회관은 이제 관동대지진으로 철거가 돼가지고요. 조금 위치를 바꿨습니다. YMCA에서 선언한 열한 분은 히비야 공원이라고 일본 천왕이 살고 있는 바로 지척에서 외치다가 연행, 체포됐죠. 정말 일본의 심장부라기보다 천왕의 심장부 앞에서 그들이 쏘았던 각오는 생명의 희생도 다 던져버린, 모든 것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 이동형> 의원님 이야기대로 당시 2.8 독립선언 현장은 조선 기독교 청년연합. 여기에 회관이 사라졌지 않습니까? 관동대지진 때 붕괴되었고, 지금 새로운 빌딩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혹시 2.8 독립선언 현장을 복원하고, 거기에 기념비를 세우고, 이런 작업도 필요한 것 같은데, 그런 노력은 우리 정부라든가, 또 시민단체에서 하고 있습니까?

◆ 이종걸> 그곳은 완전히 지형이 달라져서요. 예를 들어서 팻말 하나라도 세워서 그곳이 현장이었다는 것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해서 지금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제가 있어서 그 역할도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YMCA 그것이 환지를 받아서 그 인근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 YMCA 재한국기념관이 있고, 그곳에 2.8 비석이 새겨져 있어서 그 YMCA 건물. 그것도 그때 2.8의 외쳤던 어린 크리스찬들의 정신이 이전된 것이라고 본다면, 그 YMCA 기관만이라도 사적지화 해서 이를 복원하고, 또 우리 2.8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 이동형> 2.8 독립선언이 있었던 현장에서 한 600m 떨어진 곳에 지금의 기념관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기념관에는 여러 가지 자료라든가, 사진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있나요?

◆ 이종걸> 네, 사진으로 못 보여드리는 게 안타까운데요. 이번에 특히 그곳에 일본 우익이나 이런 것을 피해서 그 위치에 기념관을 해놨다가 이번에 보훈처와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2층에 기념 전시관을 아주 잘 예쁘게 꾸몄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곳에 모여서 성명도 하고, 특히나 후세 다쓰지라고 하는 변호사분이 노무현 대통령 때 독립장으로 추서되신 분인데, 일제 만행에 대한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행동으로 옮기신 후손들이 오셔서 감동을 더했습니다. 오늘 한 100여 명의 일본 지식인들이 최근 일본의 반성과 성찰 없는 행동에 대해서 일침을 가한 성명서도 같은 뜻으로 저희들이 새겼습니다.

◇ 이동형> 지금 2.8 독립선언이 100주년인데, 3.1 운동도 100주년이지 않습니까? 이게 2.8 독립선언이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이렇게 평가를 많이 하더라고요. 의원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 이종걸> 네, 그때 어쨌든 우리 청년 유학생들의 선언문이 2주 후 3.1 독립선언으로, 기미 독립선언으로 옮겨지는데요. 그때 외쳤던 선언문의 내용을 보면, 세기 만방의 평화를 애호하고, 민족 자결을 옹호하는 국민임을 선언합니다. 청년 유학생들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고, 국민 주권 민주주의를 펼쳐나갈 독립 국가 구상을 밝힙니다. 그 내용에는 말이 어렵고, 힘들지만, 오늘 재일본 한국인 학생회에서 그것을 낭독하면서 3.1 조선독립선언의 중요한 내용들이 그대로 이전되어 왔다는 것을 보고, 다만 일본의 야만적 탄압에 의해서 우리의 외침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육전의 혈투로 하겠다는 각오가 보입니다만, 그러나 3.1 독립선언에서 나와 있던 평화, 비폭력 운동의 전형이 2.8 독립선언 모습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전 세계적인 평화와 불가침의 뜻을 밝힌 것. 그것이 3.1의 물결을 만들어낸 하나의 원동력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 이동형>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관해서는 활발한 연구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열한 분. 물론 그중에는 변절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열한 분에 대해서는 연구와 평가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이종걸> 네, 오늘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는 저희들을 격려하시고,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해주시면서 2.8 독립선언의 대표적인 열한 분. 열한 분에 대해서 한 분, 한 분 거명해주셨는데요. 모두 이광수, 송계백, 최팔용,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만, 당시에 대부분 현지 유학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전시회에서 나와 있는 내용들을 보면, 각각 송계백은 조도전 대학, 또 최팔용 선생은 조도전 대학, 최근우 선생은 동경 대학, 이렇게 그 대학에 재학한 학생들의 소속이 나와 있습니다만, 재독 청년 독립학생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조직화된 운동으로, 그리고 또 그때 YMCA 영 크리스찬들이 당시에 YMCA라고 하는 한 공간이 하나의 해방구로서 연구하고, 또 탐구하면서 안중근 독립의군부 참모총장께서 방문 후 저격할 때에도 만방은 비꼬았거든요. 한국을 도와주려는 일본을 이렇게 폄하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옳지 못하다고 하는 세의 평가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이후에 세계는 민족 자결의 흐름으로 가고 있었고, 러시아 혁명으로, 물론 약소국의 민족 자결의 본뜻과는 차이는 있었지만, 그것들을 유리한 국제 상황으로, 국제 정세로 받아들여서 독립선언으로 이끌어 나가는데 좋은 국제적 정세의 혹이라는 것을 쉽게 국민들에게 알리고, 자극시키고, 국민들이 선포하게 만들었던, 국제 감각에도 뛰어난 분들이 용기와 희생의 정신으로 독립의 기치를 울렸다는 것. 이것이 저희들에게는 그분들을 한 분, 한 분, 열심히 연구해서 알리고, 그리고 또 그것을 앞으로 독립운동의 동력이 된 그분들의 인생 역경과 경로를 잘 살피는 것. 이것이 저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내일은 또 열한 분의 학술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할 예정입니다. 

◇ 이동형> 의원님, 마지막으로요.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끊임없이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 된 건데, 이른바 월북한 독립운동가 있지 않습니까? 대표적으로 김원봉 선생이 그 예가 될 텐데. 과거에 물론 공산주의자도 있었고,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습니다만, 이분들의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으면 독립에 최우선이 되겠느냐, 이게 더 바탕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결국 우리가 남과 북이 총과 칼로 맞대면서 김원봉 같은 사람이 서훈에서 완전히 제외돼버린 상황에 놓여있거든요? 이 문제는 의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종걸> 한완상 선생님께서 김구 선생에게 재판장에 증인으로 나와서 당신의 직업이 뭐요, 묻습니다. 그때 김구 선생님은 저는 항일독립운동가요. 이렇게 직업이. 아직까지 그분 입장에서는 45년 이후에도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우리가 평화 통일이 완전한 독립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당시에 우리 100년 전에 2.8의 경우에는 남과 북이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독립유공자, 독립의 항일 운동가들은 남이건 북이건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루어서 지금 현재 서울에서도 북이라는 영역에서 장관을 했다거나 이런 그 나라의 직위를 차지한 사람들에게는 서훈을 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들은 또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지만, 그러나 앞으로 우리 벌써 베트남 평화 회담이 열리고, 또 통일로 가는 대한민국, 하나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정에서는 새로운 서훈의 이념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원봉 선생의 경우에는 우리 국민들의 세간의 평가도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분이 북한에서 어떤 장관을 했다가 결국 그들의 총칼에 의해서 무참히 사라지고, 무덤도 없이 되어버린 분이시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그분의 공적을 가지는 것은 지위에 올랐다거나 이런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김원봉 독립 훈장 서훈 문제는 열린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앞으로 세대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의원님, 언제 들어오십니까?

◆ 이종걸> 내일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 이동형> 지금 국회 상황도 좋지 않아가지고요.

◆ 이종걸>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감사합니다.

◆ 이종걸> 네, 감사합니다.

◇ 이동형> 지금까지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었습니다.
 

[저작권자(c) YTN radio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목록
  • 이시간 편성정보
  • 편성표보기
말벗서비스

YTN

앱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