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시간 : [월~금] 10:15~11:30
  • 진행: 박귀빈 / PD: 이은지 / 작가: 김은진

인터뷰 전문

'서울의 봄' 지하벙커 지키다 전사한 병장, 형과 나눈 마지막 통화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3-12-15 14:17  | 조회 : 1192 
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3년 12월 15일 (금)
□ 진행 : 박귀빈 아나운서
□ 출연자 : 정운채 목사 (故 정선엽 병장의 형)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박귀빈 아나운서(이하 박귀빈) :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면서, 12.12. 사태로 전사한 한 군인이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당시 23살의 나이로 전역을 3개월 앞둔 故 정선엽 병장인데요.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 제50환경중대 소속으로, 국방부 지하 B2 벙커를 지키다가 전사했습니다. 43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정병장의 죽음이 순직에서 전사로 격상이 됐는데요. 이 희생에 대한 배상 책임은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故 정선엽 병장의 가족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선엽 병장의 형님이신데요. 정운채 목사 전화 연결하겠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 정운채 : 네, 안녕하세요. 정운채 목사입니다.

◇ 박귀빈 : 예, 지금 미얀마에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연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정운채 : 네, 감사합니다.

◇ 박귀빈 : 영화 서울의 봄 시사회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영화 보시고 어떠셨어요?

◆ 정운채 : 네, 마침 귀국했을 때여서 시사회에 초대받아서 잘 봤습니다. 이 영화 때문에 묻혀졌던 동생 사건이, 전사 사건이 많은 관심을 받게 돼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영화를 잘 봤습니다.

◇ 박귀빈 : 이번에 영화가 화제가 되면서 정병웅 제왕이 졸업하지 못했던 조선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를 추진하겠다고 했는데요.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시나요?

◆ 정운채 : 수여하기로. 명예 졸업장 수여하기로 결정되었다고 그러고요. 일정과 방법 등은 아마 내부에서 논의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조선대학교 내 서울의 봄 촬영지에 정선엽 병장 조형물도 세워주시겠다고 합니다.

◇ 박귀빈 : 이 학교가 당시의 영화 촬영장이기도 했군요. 우리 형님도 지금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게 44년 전에 받으셨어야 될 졸업장인데, 이번에 명예 졸업장으로 받으시게 되는 거거든요. 가족분들에게도 의미가 클 것 같은데, 어떠세요?

◆ 정운채 : 그렇죠. 모교인 조선대학교가 정선엽 병장 전사를 명예로운 사건으로 인정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 가족들에게 정말 많은 위로가 되고, 조선대학교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 박귀빈 : 영화 속에서 반란군에 맞서서 육군 본부 벙커 지키다가 전사한 조민번 병장으로 작품에서는 그려지고 있는데요. 사망일자가 12월 13일로 나오더라고요. 당시에.

◆ 정운채 : 전두환 일당이 12월 12일 오후에 정권 찬탈 목적으로 쿠테타를 일으켰죠.그래서 국방부에 난입해서 동생에게 총격을 가한 시간은 자정을 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2월 13일로 사망일자가 되겠습니다.

◇ 박귀빈 : 네. 당시에 목사님은 정선엽 병장의 사망 소식을 처음에 어떻게 전해 들으셨어요?

◆ 정운채 : 제가 그 당시에 서울역 앞의 은행에 근무했었어요. 출근길에 삼각지를 지나갈 때 택시 기사님이 이야기를 하세요. 간밤에 육군본부 국방부 부근에 총격전이 심하게 일어났다고. 그래서 동생이 거기 국방부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가서 면회 신청을 했어요.

◇ 박귀빈 : 걱정이 되시니까 그러셨겠군요.

◆ 정운채 : 국방부를 지키는 헌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면회 신청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에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국방부에서 전화가 왔어요. 국군통합병원 영안실로 오라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 박귀빈 : 그래서 그 때 바로 영화인실로 달려가셨어요. 그래서 동생분의 마지막 모습도 혹시 보셨을까요?

◆ 정운채 : 동생인 줄만 확인을 했고요. 총상이나 그런 흔적 그런 상태를 확인할 정신도 없었습니다.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기억은 전혀 안 납니다. 동생만 확인했죠.

◇ 박귀빈 : 당시에 얼마나 많이 놀라고 황망하셨을까 뭐 저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는데 전해지는 걸로 보면 당시에 네 발의 총탄을 맞았다고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데

◆ 정운채 : 네, 저도 나중에 그 기록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 박귀빈 : 아니 그러면 당시에 동생분이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있었고, 갑자기 지금 돌아가시게 된 거잖아요. 그러면 국방부에서 도대체 어떻게 군인이 갑자기 사망하게 된 건지, 그 경위를 혹시 뭐 말을 해주던가요? 뭐 들으신 게 있어요?

◆ 정운채 : 전혀. 당시 경위를 전혀 설명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 동생의 상관이었던 분은 죄인 모습으로 그냥 영안실을 지키고 그랬어요. 누구한테 많이 얻어맞아가지고.

◇ 박귀빈 : 네, 그러니까 당시에 병원을 가시니까 동생분이.

◆ 정운채 : 당시에 이제 전두환 일당이 국방부를 난입해 들어올 때 다들 투항했다고 그럽니다. 다들 투항했는데, 국방부 장관이 사수 명령을 내려놨었고요. 다들 투항하는 상황에서 정 병장은 투항하지 않고, 목숨 바쳐서 끝까지 지켰지요. 원래 이제 좀 정의로운 사람이었어요. 원래 정의로운 사람이었고. 당시에는 패한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승리한 것 아니겠어요?

◇ 박귀빈 : 당시에 국방부로부터 그 어디로부터도 동생분이 사망하시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설명을 듣지 못하셨는데. 그럼 지금 이런 상황 돌아가시게 됐다는 건, 어느 시점에 아시게 된 거예요?

◆ 정운채 : 맨 처음 듣기로는 제가 이제 이 사건이 나자마자 이제 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같은 교회 교우 중에 국방부 군무원이 있었어요. 국방부 군무원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들 투항했는데 정 병장은 끝까지 무기를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지키다가, 무장 해제를 요청하는 접근들을 오히려 발로 걷어찼다고 합니다. 발로 걷어차니까 쓰러지면서 이제 저쪽에서 총격을 가해서 사살을 당한 거죠. 그렇게 맨 처음 이제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는 이제 진상조사위원회 기록을 통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박귀빈 : 그렇군요. 그럼 그 사실을 전해드리시게 된 거는 동생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 정운채 : 한참 뒤죠. 한참 뒤에. 한참 뒤죠.

◇ 박귀빈 : 그 때까지 정확하게.

◆ 정운채 : 같은 교회 다니는 제 동생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 거죠.

◇ 박귀빈 : 그렇군요.

◆ 정운채 : 전두환이 원수였죠. 저희 가족한테는.

◇ 박귀빈 : 그렇겠네요. 그러셨겠어요. 형으로서 동생 故 정선엽 병장과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도, 특히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는 잊지 못하실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 정운채 : 그렇죠. 정확하게 한 주 전입니다. 사건 일어나기 한 주 전에 동생이 전화를 했어요. 저한테 전화를 해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은 3개월 군 복무 마치고 조선대학교 졸업하면 내가 유학을 보내주겠다 그랬더니, 형님 고맙다고 그랬죠. 그 약속 대화가 동생과 마지막 대화였지요.

◇ 박귀빈 : 일주일 전에요.

◆ 정운채 : 그렇죠. 저는 제가 동생을 위해서 저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은행에 근무하면서 동생 교육을 시켰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 하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충분히 시키고 싶었죠. 그래서 이제 저에게는 동생이지만, 제 희망이고 제 기대였지요.

◇ 박귀빈 : 동생이 황망하게 먼저 하늘로 가시고 나서 우리 형님. 뭐, 당연히 너무나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 부모님 어떠셨어요? 당시에.

◆ 정운채 : 가족 중에 가족들은 충격은 말로도 할 수 없죠. 어머니는. 어머니 마음이 제일 아프지 않겠어요? 사건 이후에 그냥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고, 또 일찍 치매 오셔가지고 고생하시다가. 그냥 힘들게 사시다가 떠나셨죠.

◇ 박귀빈 : 얼마 전에 이제 12월 13일이었으니까요. 얼마 전이 동생분의 기일이었습니다.현충원의 묘역도 다녀오셨나요?

◆ 정운채 : 묘역에. 저는 이제 미얀마에 있으니까 못 가봤고요. 못 가고요. 네 저희 이제 현충원의 추모식에는 저희 누님 두 분이 참석했고. 또 이제 정 병장 아래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정 병장 고등학교 모교인 광주 동신고등학교에서도 이번에 추모회가 있었는데. 거기 참석하고 그랬습니다.

◇ 박귀빈 : 故 정선엽 병장 12.12. 군사반란 때 반란군에 맞서서 육군 벙커를 지키다가 전사한 병장인데요. 그 형님이신 정운채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정선엽 병장이 군 복무 중에 사망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동안 순직으로 기록이 돼 있었다가 전사로 인정된 지가 얼마 안 됐죠. 작년이었던가요?

◆ 정운채 : 작년에 됐죠. 작년에 됐죠. 전두환이 수괴죄, 초병살해죄 등 판결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 초병살해죄는 정 병장 살해죄입니다.

◇ 박귀빈 : 아, 네.

◆ 정운채 : 반란군을 막다가 목숨을 바친 정 병장에게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순직으로 처리돼 있지만. 저는 선교 사역을 위해서 해외에 나와 있어서 이 일에 제가 매달릴 여건도 아니었고요.

◇ 박귀빈 : 근데 이 이제 순직이라는 것. 그러니까 직무 중에 사망한 것, 적과 싸우다 사망한 전사는 이제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어서. 이 전사로 인정되기까지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싶기도 한데. 그거 왜 그랬습니까?

◆ 정운채 : 그 사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저도 저희 가족들도 요구를 못 했고요.물론 또 제가 또 외국에 나와 있기도 하고요.

◇ 박귀빈 : 순직 처리됐을 때 사망 이유가 오인에 의한 총기 사고, 이렇게 기록이 돼 있었나 봐요?

◆ 정운채 : 그렇죠. 총기 사고. 그러니까 사고로 인한 그냥 순직으로 처리돼 있었던 거죠.

◇ 박귀빈 : 그런데 어떻게 전사로 인정. 작년에 그나마 이것도 아주 늦은 거지만, 작년에 전사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과정은 뭐 어떻게 진행이 된 겁니까?

◆ 정운채 : 그 과정은 군 사망사고 진상조사위원회가 있어요. 그게 기능을 다 하고, 이제 해체가 됐는데. 그 조직에서 수고를 많이 했죠. 정선엽이, 반란군 전두환 죄가 군사반란이기 때문에 반란을 막다가 죽은 것은 전사가 아니냐? 해서, 군 사망사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정정 요청을 해서, 국방부에서 최종적으로 받아들였지요. 그래서 이제 별로 영예롭지 못한 순직에서 명예로운 전사로 정정이 돼서 늦었지만 다행이지요.

◇ 박귀빈 : 네, 그렇죠. 육군본부 벙커 경계 근무서다가 전사한 정선엽 병장이 있고요. 또 한 사람은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중령이 있는데요. 故 김오랑 중령의 같은 경우에는 보국훈장도 추사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선엽 병장과는 조금 이 부분은 다른 점이 있네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 정운채 : 저도 모르겠어요. 김오랑 소령이었는데 중령으로 추서도 됐고, 훈장도 주어졌는데요. 정선엽 병장은 뭐, 글쎄요. 계급이 사병이어서 그랬는지, 어쨌든 뭐 저희 가족에서 요구를 안 해서 그럴 수도 있죠.

◇ 박귀빈 : 네, 그렇군요. 최근에 국가 상대로 소송도 제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소송인가요?

◆ 정운채 : 순직에 따른 보상과 전사에 따른 보상은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43년 동안 국가가 전사가 아니라 순직이라고 진실을 은폐해왔다고 봅니다.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명예로운 전사를 사고로 인한 순직으로 기록해 뒀던 것이죠. 그것은 43년 동안 고인과 유족들에게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죠. 그래서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 박귀빈 : 그런데 국방부에서는 전사자 배상이 있어서, 별도 위자료는 이중배상금지 원칙에 위배된다.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정운채 : 글쎄요. 부모님 생존해 계신 동안에는 순직에 따른 유족 연금이 조금 있었습니다.그것이 전사자 배상금하고는 같을 수는 없죠.

◇ 박귀빈 : 그렇지요.

◆ 정운채 : 그 때 당시에 전사자로 제대로 처리됐다면, 그런 처우가 될 수가 없죠.

◇ 박귀빈 :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면서 전 국민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더불어서 이렇게 정의에 맞서다가 희생된 분들에 대해서 사실 이제 와서 관심을 갖게 된 게 아닌가 싶어서 사실은 저 스스로도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목사님, 끝으로 우리 국민들이 동생분이신 정선엽 병장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바라시는 거 있으실까요?

◆ 정운채 :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군인은 생명을 바치는 것이 사명입니다. 반란군들이 국방부를 쳐들어올 때, 모두 투항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정선엽 병장은 그 사명을 다했습니다. 정선엽 병장 전사 사건은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국가 안보, 국방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이 무형의 자산이죠. 잘 기록하고, 추앙하고, 고양해야 된다고 봅니다.그것이 국민 교육에도 유익하고,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 국가가 정선엽 병장의 명예회복에 대한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 박귀빈 : 목사님께서 지금 미얀마에 계시는데요. 미얀마도 군사정권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정선엽 병장이 계셨던 그 시절의 대한민국과 좀 닮아 있는 부분도 가끔 보고 그러세요?

◆ 정운채 : 아주, 아주 닮아 있습니다. 아주 엄혹한 80년대. 그런 상황에서 참 여기에 이제 어려움 고통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박귀빈 : 지금까지 12.12. 사태 때 반란군에 맞서다 전사한 故 정선엽 병장의 형님이십니다. 정운채 목사님과 이야기 나눴는데요. 멀리 미얀마에서 연결해 주셨어요. 목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정운채 : 감사합니다.

[저작권자(c) YTN radio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목록
  • 이시간 편성정보
  • 편성표보기
말벗서비스

YTN

앱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