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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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행 : 신율 / PD: 신동진 / 작가: 강정연, 정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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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부마항쟁 당시 부산 다녀간 한 사람, 절대 잊어선 안 돼"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10-16 19:51  | 조회 : 2323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 대담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홍구 "부마항쟁 당시 부산 다녀간 한 사람, 절대 잊어선 안 돼"


◆ 배우 조진웅> “1979년 10월 16일 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 우리들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되어 거리와 골목, 교정과 광장에서 민중의 손에 들려 노동자와 농어민, 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 학생들의 손에서 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 되어 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우리들의 죽음을 무릅쓴 항쟁은 자유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자주와 평화를 위한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이어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역사의 현장 민중의 절대한 힘을 하나하나 찾아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민주투사 만세.”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배우 조진웅 씨가 읽은 故 임수생 시인의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이었습니다. 부산지역과 경남 마산 지역의 학생과 시민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해 일으킨 대규모 민주화운동인 부마민주항쟁이 40년이 지난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정부 주관 기념식도 처음으로 열렸는데요. 40년간 잊힌 부마항쟁 의미와 우리가 계승해야 할 부마항쟁 정신에 대해서 얘기해봅니다. 역사학자인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님 연결합니다. 교수님, 나와 계십니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이하 한홍구)> 네, 안녕하십니까.

◇ 이동형> 부마민주항쟁,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마사태’로 불렸는데요. 40주년 맞았습니다. 그 의미를 설명해주시죠.

◆ 한홍구> 우리가 3·1운동 올해 100주년이잖아요?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4대 민주항쟁을 거쳤습니다. 4월 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그리고 6월 항쟁을 거쳐서 촛불에까지 이어졌는데, 그런 20세기 후반의 4대 민주항쟁 중에서 부마항쟁이 제일 잊혔다고 할까요? 그랬는데 드디어 뒤늦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방금 말씀하셨던 4대 항쟁, 4.19, 부마, 그리고 5.18, 6월 항쟁. 5.18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우리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연도가 가까운 부마항쟁이 홀대받았다고 할까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 한홍구> 그런 의미도 있고요. 또 하나는 너무 빨리 그 승리가 끝났기 때문이지만, 부마항쟁은 처음에 목표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아갔죠. 그랬다가 그게 광주에서 역습을 당해서 잊혔는데요. 부마는 승리한 항쟁이 됐고, 광주는 한이 맺힌 항쟁이 됐고. 그리고 80년대로 들어오면서 살아있는 독재자하고 싸우다 보니까. 이미 죽은 독재자를 상대로 싸웠던 부마항쟁은 잊히고, 전두환이 계속 집권하지 않았습니까? 80년대 내내. 전두환과 싸우기 위해서 광주가 전면으로 부각됐던 거죠.

◇ 이동형> 교수님 ‘한홍구 TV’에서 부마민주항쟁 특집 강연을 몇 번 했다고 하는데, 부마항쟁에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특별한 의유가 있습니까?

◆ 한홍구> 너무 잊힌 것 같아서.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나 의미도 있고요. 그다음에 또 제가 그때 대학교 2학년이었어요. 광주는 3학년 때고. 젊었던 시절에 그걸 겪었던 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부마항쟁은 갑자기 계엄령이 터진 거죠. 부산에서는 5년 동안에 시위가 없었는데, 마른 장작이 더 잘 탄다고 한 번 폭발적으로 그렇게 일어나니까 5만 군중이 참여를 했고요. 그런데 저는 이게 한국형 대규모 집회나 시위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터지더라고요. 3·1운동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4월 혁명도 그렇고, 부마, 광주,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이나 전문가들이 일체가 되었고, 민중들이 이렇게 터져 나왔는데요. 이게 또 70년대 민주화운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로 학생이나 지식인, 종교인들이 주도했었거든요. 그런데 부마항쟁에 이르러서 이것이 진짜 민주항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줬죠.

◇ 이동형> 당시 1979년에 일어났는데, 왜 하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을까.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한홍구> 저는 그게 10.26 사건으로 이게 일찍 끝나버렸기 때문에, 판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지 사실은 전국적으로 일어날 항쟁이었죠. 아마 김재규가 10.26 사건을 일으키게 된 계기도, 김재규가 부마항쟁이 터지고 난 다음에 부산에 직접 내려왔단 말이에요.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서울에서 박정희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김영삼을 잘랐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렇게 축소하려고 했는데, 김영삼을 잘랐기 때문에 부산과 마산이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를 보면 이것은 유신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감, 그리고 경제가 그때 엉망이었거든요. 민생 문제에 대한 분노와 불만, 이런 게 폭발한 것이고, 잡혀간 사람들도 보니까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다수였다. 그래서 이것은 김재규가 민란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 민란은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고치든지, 아니면 임기를 단축하고 일찍 물러난다든지, 그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건의했는데 그게 묵살 당했죠. 그리고 박정희는 시위가 확산되는 게 뭐가 고민하느냐, 시위가 확산되면 자신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그렇게 얘기하고 그 당시 경호실장으로 실력자였던 차지철은 그까짓 것 우리도 탱크 100만 밀어버립시다, 이런 극언을 하고 하니까 이거 그냥 뒀다가는 수천 명 젊은이들이 죽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단 말이에요. 4월 혁명 때는 이승만이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200만 죽고 끝났지만, 박정희가 발포 명령을 내리면 수천 명이 죽게 되는데, 그거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 끝에 나온 게 10.26이라고 봅니다.

◇ 이동형> 그러니까 10.26이 만약에 없었다면 당연히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될 것이다?

◆ 한홍구> 그게 유신에 대한 불만이 엄청나게 퍼져 있었고요. 그 증거 중에 하나로 78년 12월, 딱 10개월 전에 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이 예상을 뒤엎고 득표율이 1.2% 야당보다 뒤졌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평행이론이라고나 할까요? 2016년 촛불 일어난 상황하고 비슷해요. 박근혜 정권이 물러나게 되지 않습니까? 2016년 4월 총선에서 아무도 예상 못 했는데, 박근혜 정권이 대패를 했죠. 그리고 개혁이 없이 끌고 가다가 6개월 후에 촛불로 퍼졌는데, 18년 박정희 독재를 마감한 것이나 또 그 딸이었던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나 역사가 한 번은 비극이고, 한 번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는 말도 있는데, 그렇게 불리는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아까 교수님이 차지철에 대해서 잠깐 말씀해주셨는데요. 일단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산, 마산을 직접 가서 부마항쟁을 바라보고 나서 이게 상인들, 시민들, 노동자들, 학생들이 참여한 집회인데, 차지철은 부랑아, 깡패, 넝마주이들이 참여했다고 폄하했거든요?

◆ 한홍구> 차지철뿐만 아니라 박정희가 ‘똘마니’라고 불렀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 이동형> 결국은 이 부마항쟁에 대한 인식 차, 직접 내려가서 보고 들은 김재규와 차지철의 차이, 이런 것 때문에 10.26 발발로 갔다, 이렇게 봐도 되겠네요?

◆ 한홍구> 거기다가 또 한 명 부산을 다녀간 사람, 또 부산에 주둔해 있던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부산을 왔다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부산주둔 보안부대장이 권정달이라고 5공화국 국회 민정당 사무총장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마항쟁을 어떻게 평가했냐면, 군대를 동원하니까, 공수부대를 동원하니까 금방 진압이 되더라. 그런데 괜히 경찰 가지고 어떻게 막아보려고 하다가 각하까지 돌아가시는 그런 불상사가 벌어졌는데, 앞으로 또 시위가 벌어지고 하면 군대를 보내서 초전에 공수부대를 보내서 박살내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80년부터 아주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충정작전이라고 군사훈련을 많이 시켰죠. 그게 바로 5.18로 이어진 겁니다.

◇ 이동형> 김영삼 제명으로 부산, 마산에서 촉발된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요.

◆ 한홍구> 저는 그게 영향을 미쳤다고, 그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운데요. 결국, 그것 때문만은 아니죠. 그게 아마 부산, 마산이 제일 먼저 일어나게 된 요인을 설명할 때는 필요하지만 이미 유신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김영삼 제명 전에 YH 무역사건도 있었잖아요?

◆ 한홍구> 그게 사실은 부산대에서도 5년 동안 데모가 없었거든요? 김기춘이 일으킨 재일동포 조작 간첩사건이 부산대 중심으로 75년에 퍼졌는데, 그 바람에 학생운동 진영이 워낙 탄압을 받아서 부산은 5년 동안 데모가 없었고요. 전국적으로 본다면 78년 12월 달에 선거에서 공화당 유신 정권이 패배하는 그런 일이 벌어짐에도 학원에 워낙 경찰이 많이 깔려 있다고 보니까 79년 전국 주요 대학에서 데모가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여성 노동자들이 시민당사에 들어가면서부터 거기서 이게 아주 급격하게 벌어지더니 80일 만에 박정희가 총을 맞는 그런 사태가 벌어진 거죠.

◇ 이동형>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만, YH 무역사건은 결국은 당시에 여공들이 노동을 착취당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어린 여공들이요. 그래서 인간답게 일하게 해 달라, 그런 요구를 하다가 벌어진 사건인데, 최근에 위안부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유석춘 교수가 월간 조선에 기고를 한 게 있습니다. ‘전태일의 경우에도 노동자 착취는 없었다,’ 이런 발언을 했단 말이에요. 어떻게 보세요?

◆ 한홍구> 거기에 대해서는 경제학적으로 임금만 오르면 착취가 없는 거냐, 구매력이나 다른 노동환경이나 이런 반박도 가능하고요. 또 하나는 전태일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말 모르는 건데, 전태일은 청계피복 그쪽의 재단사 아니었습니까? 재단사면 상당히 급여도 높고, 지위도 안정적이거든요. 작업 현장에서. 그런데 점심도 못 사오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도 그것을 겪고, 좋은 위치에 올라갔지만 어려운 동생 같은 동료 노동자들을 잊지 못하고, 그러니까 이것은 전태일이 가졌던 연대의 정신. 그것은 자기만 착취당한다고 한 게 아니죠. 자기만 생각한 게 아니라 전태일이 그런 수많은 노동자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그런 분신을 한 건데요. 그런 전태일의 연대정신을 잊고 본인은 착취 안 당했다는 건 정말 상황을 호도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죠.

◇ 이동형> 네, 알겠습니다. 지금 청취자 댓글에도 마산 사람인데, 너무 늦게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 아니냐, 이런 의견도 많이 있습니다.

◆ 한홍구> 저는 그게 그렇게 늦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부산과 마산이 부마항쟁의 위대한 전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90년 3당 합당 이후에 민주주의 진영을 떠났다고나 할까요? 자기 지역에서 있었던 이런 위대한 항쟁의 정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그것과는 반대되는 쪽에 서 있었던 게 부마항쟁이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히게 만든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산, 마산은 3.15 의거에 항거했던 김주열 열사를 비롯해서 3.15 의거의 전통이 있었던 곳이고, 또 그게 부마항쟁 때 잊혔던 기억이 소환되어 나왔던 것이고요. 저는 부산과 마산, 경남 지역에서 부마항쟁의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던 그 정신을 회복해서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성지로 거듭나기를 부탁드립니다. 

◇ 이동형> 그러면 YS 제명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었는데, YS의 3당 합당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 한홍구> 그런 측면도 조금 있었습니다.

◇ 이동형> 상당히 아이러니하네요. 그런데 지금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됐습니다만, 아직 진상규명, 또 피해자 보상, 이런 것들이 조사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 한홍구> 사실 피해자, 조금 어려운 점이 있는데요. 구금된 분들은 구금일수를 따지는데, 처음에 부마항쟁이 일어나니까, 초유의 민주항쟁이 벌어지니까 잡혀간 분들이 굉장히 고생을 했거든요. 박정희가 죽고 나니까 내보냈단 말이에요. 그때 빨리 풀려난 건 좋은데 고통은 고통대로 다 당했는데, 구금일수가 모자란다고 보상을 안 해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어떻게든 형평성에 맞게 잘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 이동형> 국회에서 나서야 한다고 보십니까?

◆ 한홍구> 네, 지금 부마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거기서 좋은 안을 내서 어차피 그 보상이 되려면 법령에 의거해야 하니까 국회를 거쳐야겠죠.

◇ 이동형>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 있으면 하시죠.

◆ 한홍구> 저는 흔히 1980년을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부산, 마산에서 시작돼서 광주에서 끝났거든요. 그래서 서울 사람으로서 그게 통틀어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부산, 마산이나 광주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번에 부마가 기념일로 지정돼서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한홍구> 네, 감사합니다.

◇ 이동형> 지금까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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