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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가 남긴 교훈 “국민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4-18 09:40  | 조회 : 3153 
YTN라디오(FM 94.5)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4월 18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출근길 라디오로 만나는 깊이 있는 오디오칼럼 시간입니다. 목요일마다 역사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해 주는 분이시죠.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나오셨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김호성: 오늘의 오디오칼럼 제목이 뭐죠?

◆ 전우용: ‘쌍팔년도’로 할까요. 쌍팔년도 하면 이제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1988년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 김호성: 글쎄요. 88올림픽 그때 말하는 88년인가, 이렇게 지금 생각하는 거잖아요.

◆ 전우용: 사실은 그전에도 쌍팔년도란 말을 썼거든요. 그러니까 쌍팔년은 서기 1988년이 아니고 단기 4288년, 서기로는 1955년에 해당하죠. 한국전쟁 휴전하고 이태 뒤가 되고요. 우리 사회가 그 당시에 혼란이랄까요. 또 사회 내에 부패·비리 또는 부당한 억압 이런 것들이 워낙 만연해 있어서. 심지어는 전쟁 중에 사용되던 무기가 이른바 깡패들 수중에 들어가서, 그해 사보이 호텔 화장실에서 조직폭력배들끼리 싸우는 와중에 수류탄이 폭발하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그러니까 폭력배 싸움에 권총, 수류탄 이런 것들이 동원되던 시절이었고요. 또 한국전쟁 이전부터, 우리가 얼마 전에 제주 4·3 기념일을 지나왔습니다만, 서북청년단의 후예들이 과거 서북청년단의 행태를 답습하면서 애먼 사람 빨갱이로 몰아서 협박하고 돈 뜯고 심지어 성폭행하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무렵이라, 그 쌍팔년도라고 하는 것은 정말 지금의 쌍팔년도 시절이 아니라 법도 원칙도 정의도 없고, 그냥 힘만 있으면 백만 있으면 막 되던 시절인 줄 아느냐. 이런 말로 쓰던 게 쌍팔년이라는 거였거든요. 내일이 4월 19일입니다만 4·19가 당장 1960년 3·15부정선거로 인해서만 촉발된 걸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렇게 쌓이고 쌓였던, 누적돼 있던 부패, 무능 그리고 이른바 깡패들을 동원해서 이 부패와 무능을 가려왔던 이런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결과였던 것이지, 3·15부정선거만 가지고 4·19가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려웠던 것이죠.

◇ 김호성: 그 시대를 다뤘던 한때 드라마 <야인시대>라는 드라마를 하도 아이들이 보려고 그러기에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보려고 하나 하다가 그래, 그러면 이걸 역사물로 규정해서 함께 시청하도록 하자,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요. 벌써 4·19혁명 59주년이란 얘기잖아요, 박사님. 그때 당시 민주화의 열기, 무법천지였던 시대였으나 민주화의 열기가 과연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 전우용: 한두 가지로 이야기하긴 어려운 거죠. 4·19 자체가 워낙 역사적 사건이고, 우리 헌법에 3·1운동과 더불어 들어가 있는 양대 사건이잖아요. 이것밖에 안 들어가 있어요. 그만큼 큰 사건인데. 말씀드렸듯이 일단 무법천지로 느껴질 만큼 사회가 혼란했던 것이 첫 번째 배경이었고요. 두 번째로는 전쟁 이후에 미국에서 주던 원조물자들을 줄이기 시작했어요. 50년대 후반부터 줄이거나 곧 이제 원조를 끊겠다고 하는 통보가 나온 상태였고, 원조물자를 중심으로 편재되었던 경제 전반이 굉장히 어려워져서 서민 생활이 곤란에 곤란을 겪던 상황이었죠. 4·19가 일어났을 때 미국 쪽 정보기관이나 언론들은 이게 정치적 운동이 아니라 사실은 경제 무능에 대한 심판이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것이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는 이게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진들에게서 나온 얘긴데요. 사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875년생이에요. 4·19 나던 해에 85세, 우리나라 나이로 86세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인 평균수명이 70세가 안 되던 때였어요. 그럼 이제 86세 된 노대통령이 또 출마를 했는데, 헌법을 여러 차례 바꿔가면서. 이분이 대통령이 된다고 임기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그럼 당연히 부통령 자리를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게 마련인데, 대통령 자리를 승계할. 부통령 후보를 자유당의 이기붕 씨로 앉혔던 건 다들 알고 계시죠.

◇ 김호성: 양아들이라고 그러고 그랬잖아요.

◆ 전우용: 이기붕 씨가 그러면 대통령이 될 것이냐인데, 사실은 이기붕 씨 건강이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어요. 이기붕 씨도 어떻게 보면 이승만 대통령보다 더 오래 못산다라고 하는 세간의 의혹을 받고 있던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 비서들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사실은 이승만·이기붕 정·부통령 모두가 건강이 안 좋기 때문에 그다음에 자기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려고 했던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욕심이 무리한 3·15부정선거를 낳았다, 안 그래도 되는데. 이게 당시에 이승만 전 대통령 비서진들 사이에서 나왔던 얘기예요. 부정선거가 세 번째겠죠. 이것들이 결합됐던 것이라서 평소에 쌓여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을 일단. 그리고 이승만이야 초대 대통령부터 나름대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어왔지만, 그 밑에서 정치 경험을 쌓고 또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을 했다든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을 했다든가. 거물이었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기에 필적하는 후계들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다 쫓아냈죠. 그러다 보니까 그다음에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대중의 눈에서 볼 때는 정말 간신배 같은 사람들, 이 나라를 맡아서 이끌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 이렇게 보이는데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고. 3·15부정선거가 워낙 두드러지는 부정선거라서 이 사건에 대해서 학생들이, 3·1운동과 마찬가지, 또 1929년 광주 학생운동과 마찬가지로 고등학생들이 먼저 항의 시위를 하고 나섰던 거죠. 왜냐하면 사실 분위기가, 우리가 3·1운동 얼마 전에 100주년 지나면서 일제의 가혹한 탄압 그래서 학생들이 아니고서는 일반 대중이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고 얘기했지만, 50년대 쌍팔년도 상황도 거의 다를 바가 없었어요. 학생들이나 학교에서 모여서 집회가 가능해했던 것이지, 일반 시민들이 반정부 또는 반이승만 발언만 해도 빨갱이로 몰려서 투옥구금 이전에 정치깡패들에게 붙들려가서 호되게 맞고 재산도 빼앗기거나 훨씬 더 심한 일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던 그런 상황이라서. 성인들이 직장인들이 이렇게 시위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조건이었다가, 마산고등학교 학생들이 먼저 시위를 했고, 3·15부정선거 직후에. 얼마 후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이게 전국적으로 시위 운동을 촉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 이건 다 알고 계시겠죠.

◇ 김호성: 경제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그때 당시 학생들이라고 한다면 고등학생들, 10대였을 텐데 말이죠. 지금 요즘 최근에 저희 화두 중에 또 하나가 선거연령을 낮춘다는 거였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러면 그때 당시 10대 후반에 있는 청년들의 정치적 의식도 대단히 높은 것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 전우용: 일단 어디나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죠. 그때만 해도 고등학생 정도면 당시 평균 학력수준에서는 한국인 평균보다 높은 학력 수준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좀 더 배운 사람이다라고 하는 자의식, 예비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것이고요. 늘 그렇지만 3·1운동 이후로는 사실 모든 사회운동에서 학생들이 주도 또는 기폭제, 선봉대 이런 역할들을 쭉 해왔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1970년대 이후로 고등학생들, 입시에 찌들리고 또 교육이 대중화하고, 또 수명이 길어지고. 그러다 보니까 학생들의 정치의식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경향들이 나타났고. 또 80년대까지 학생운동에 대한 정권 차원의 탄압이 워낙 심하지 않았습니까. 저만 해도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대학 가면 데모하지 말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회의 차단심리, 차단논리, 차단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거든요. 이런 것들이 실제로 15~16세 사춘기 지나면서 민감하게 사회와 자기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그러면서 정치의식을 길러나갈 청소년들의 정치의식 또는 사회의식 성장을 가로막아 온 게 아닌가 싶어요. 원래 3·1운동도 그랬고, 우리가 유관순 열사 얘기하지만 10대였고요. 광주 학생운동 역시 10대들이었고, 4·19 역시 10대들이었습니다.

◇ 김호성: 강한 10대들의 저력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어떻게 앞으로 발휘될까. 저도 상당히 기대되는 부분도 있네요, 그러다 보니까요. 그런데 결국 그때 당시 4·19혁명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대응은 처음에는 굉장히 무자비했잖아요. 계엄령 선포까지 나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 전우용: 그전에, 늘 그랬어요. 4·3 때 서북청년단을 먼저 보내서 학살하고 그다음에 경찰의 학살이 또 진행되고 했던 것처럼. 이 사건도 일단 시위에 대해서는 50년대 후반부터 사실 시위 진압을 위해서 이승만 정권에서 최루탄을 수입하기 시작해요. 우리가 그 당시 최루탄 생산을 못했거든요. 미국에서 최루탄을 수입해서 처음 쏜 게 김주열 사망사고로 이어진 거예요.

◇ 김호성: 눈에 최루탄이 박힌 상태로 발견됐잖아요.

◆ 전우용: 그러니까 최루탄을 써본 경험도 굉장히 별로 없었고. 그러니까 이걸 바로 쏴서는 안 된다는 건데.

◇ 김호성: 정면을 향해서 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 전우용: 그런 걸 훈련도 제대로 안 하고 최루탄을 나눠줬던 셈이죠. 그게 첫 번째겠고요. 그런데 그다음에 4·18 고대생 데모, 고려대학교는 오늘이 자기들의, 4·19의 시작이다 얘기하는 겁니다만. 일단 서울에 있던 이른바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의 후신이죠. 정치깡패들이 나와서 쇠파이프, 못 박힌 각목 이런 걸로 학생들을 잔인하게 구타하면서 유혈이 낭자하는 사태로 만들어놨고. 4월 19일 당시에 여기에 또 항의해서 서울시내 전역에 대학생·고등학생들이 모여 나와서 시내에서 경무대로 행진하자 했을 때 경무대 경찰서, 당시 경찰서장으로 곽영주였는데요. 발포를 해서 또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최인규-곽영주로 이어지는, 이 사람 둘 다 사형 당했습니다만, 이 라인이 이렇게 잔혹하게 진압한 것에 대해서 과연 이게 이승만이 알았겠느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해요. 불분명하고, 말씀드렸듯이 최인규가 대통령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 좀 무리하게 부정선거를 감행했고 진압도 무리하게 했다고 하는 설이 일부 있으니까요. 그렇게 잔인하게 했고 또 계엄령도 곧바로 선포했지만 군 역시 등을 돌린 상태였고요.

◇ 김호성: 미국조차도 나중에는 등을 돌리지 않습니까?

◆ 전우용: 일단 86세 된 사람이 무리하게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나서 4년 동안 제대로 집권하면서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당연히 안 했던 거죠. 미국 쪽에서도 이것은, 사실은 당시 한국군에 대해서는 미국이 워낙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이,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발포를 거부하고. 이런 건 사전에 미군 쪽하고의 교감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겠죠. 등을 돌렸다라기보다는 미국 쪽에서도 이제 저 노인은 안 되겠다, 라고 판단한 게 꽤 됐던 것 같아요.

◇ 김호성: 저희 세대는 4·19의거로 암기하면서 자라났거든요. 그 의거가 혁명이 되고, 4·19혁명이 59주년이 된 이 시점에서, 오늘의 역사에 던지는 의미는 어떤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까요?

◆ 전우용: 87년도 헌법 개정하면서 처음으로 4·19가 들어갔죠. 그런데 4·19 그때만 해도 정의를 의거냐, 혁명이냐라는 논쟁을 끝내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헌법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불의에 항거한다는 것, 저항권이라는 것이죠.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는 국민이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건 혁명 이래 민주주의의 기본원리 중의 하나다라고 하는 것이라서요.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헌법 전문 자체가 이미, 헌법조항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하더라도 헌법 전문 자체가 국민의 불의한 권력에 저항할 저항권을 선언했다는 것, 이게 첫 번째일 것이고요. 두 번째로는 불의한 권력을 피로써, 피를 흘리면서 몰아낸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굉장히 소중한 자산이고 잊어선 안 될 자산이다. 이런 걸 기억하게 하는 것이 매년 4·19가 주는 교훈이겠죠.

◇ 김호성: 그 정신이 지금도 사실 면면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전우용: 그래 왔다고 봐야겠죠.

◇ 김호성: 알겠습니다. 내일이 4·19혁명 59주년입니다. 그래서 하루 앞서서 전우용 박사님으로부터 4·19가 가지는 의미를 정리해봤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김호성: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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