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시간 : [월~금] 17:00~19:00
  • 진행 : 신율 / PD: 신동진 / 작가: 강정연, 정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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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의 직업 출신은? “보면 볼수록 놀랍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4-12 20:39  | 조회 : 2698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4월 12일 (금요일)
■ 대담 : 이영철 경찰청 산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장


백범 선생의 직업 출신은? “보면 볼수록 놀랍다”


◆ 성우>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할 때 후일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기로 결심하여 나의 호를 백범으로 고쳤다는 것 등을 예로 들며, 평소 나의 진정한 소원이라고 말하였다” - 백범일지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소와 이동형의 뉴스정면승부가 함께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그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앞서 전해드린 내용은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처한 백범의 회고였습니다. 우리 경찰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친일 경찰로 대표되는 노덕술 같은 인물도 있지만, 대한민국 1호 민주 경찰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나 경찰 신분으로 임시정부를 지키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무장 의열 투쟁에 참여한 분들도 계십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분들을 이야기. 지금부터 해보겠습니다. 도움 말씀 주시기 위해서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장을 맡고 있는 이영철 총경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영철 경찰청 산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장(이하 이영철)>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우선 경찰청 안에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사업팀이 있다,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왜 이게 꾸려진 거고,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 이영철> 정부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에 맞춰서 저희 경찰 차원에서도 이 기념사업을 위해서 만들어졌는데요. 단순한 기념사업을 넘어서서 경찰 역사를 재정립하고, 그 속에서 바람직한 경찰청을 지향하는 취지의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꼭 필요한 일일 것도 같고요. 다들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우리 경찰이 과거에 암흑의 역사가 있었잖습니까? 일제 시대 때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해방되고 나서 우리 경찰이 되는 그런 아픈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념사업을 한다는 게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일단 지난해에는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들을 찾아서 보훈처에 서훈 요청을 했다고요?

◆ 이영철> 네, 보통 광복 직후 경찰들은 다 일제 경찰 출신이었던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광부 후에 일본인 경찰들이 다 추방되면서 새롭게 경찰을 2만 명 이상 대거 채용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실제 일제 경찰 출신은 전체의 20% 정도였습니다. 

◇ 이동형> 간부들이 대부분 일제 출신이었죠.

◆ 이영철> 간부 출신은 82%였습니다. 이때 어쨌든 독립운동가 출신들도 상당수 경찰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어느 정도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으신 분들은 간부급으로 특별 채용됩니다. 이런 분들은 경찰국장이나 경찰서장도 맡게 되셨고요. 또 젊은 광복군 출신분들은 상당수가 경찰관이 되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그동안 정리가 거의 안 되고, 연구도 되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아서 이번에 저희 팀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게 됐는데요. 현재까지는 33명 정도 발굴했고, 이중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출신도 4명 포함되어 계시고, 광복군 출신도 17명이 포함되어 계십니다. 그중에서 독립유공 서훈을 받지 못하신 분이 5명 계셨습니다. 이분들에 대해서 작년에 독립운동 유공 심사 요청을 하게 된 건데요. 안창호 선생 조카딸로서 서울 여자 경찰서장을 지내셨던 안맥결 총경은 작년 11월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으셨습니다.

◇ 이동형> 나머지 네 분은요?

◆ 이영철> 네 분은 심사가 보류됐거나 심사가 대기 중인 분들인데요. 간단하게 소개를 드리면, 문형순 서장님이 계십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신데, 제주 4.3 사건 때 계엄군의 총살 명령을 거부하시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구명하신 그런 분이신데요. 이분이 독립군으로 반평생 활동하셨는데, 이때 독립군은 보통 가명을 사용하시는데요. 문시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어요. 이 부분이, 문시영이라는 사람과 문형순이라는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게 입증이 안 된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 이동형> 그러면 유보된 걸로 보이네요?

◆ 이영철> 저희가 작년에 경찰 인사기록을 발견해서 이분이 문시영과 똑같은 독립군 활동이 발견됐는데, 이런 부분들이 광복 이후의 기록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최능진 당시 경무부 수사국장이 계시는데요. 이분이 안창호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서 2년간 복역을 하셨습니다. 이분 같은 경우는 특히 광복 이후에 수사국장을 하면서 경찰 조직 내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시다가 파면되는 일도 있었는데요. 올해 8월에 심사 예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 이동형> 최능진 선생 같은 경우에는 독립운동한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고, 다만 해방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정치보복, 결국은 사형 판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인데요. 8월에 심사한다면, 이분은 어렵지 않게 될 것 같네요?

◆ 이영철> 그런데 이분이 문제가 수양동우회 사건이라는 게 사실은 당시에 거기서 풀려나오실 때 대부분 국방헌금을 하셨습니다. 국방헌금을 1원이라도 하면 그거 자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씀들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때 당시 국방헌금을 하신 분들 중에서도 이미 독립유공 서훈을 받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부분을 따져봐서 독립유공 심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 이후에도 양한나 경감, 이양전 경감.

◆ 이영철> 네, 여성 경찰분들이신데요. 양한나 경감 같은 경우는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을 했는데, 독립운동 이력은 인정이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 때문에 심사가 보류됐는데요. 사실은 본인이 아닌 가족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런 이야기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이다 보니까 조금 더 이 부분은 검토를 해야 할 것 같고요. 이양전 경감 같은 경우는 부산여자경찰서장을 했는데, 이분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셨고, 그리고 일본 유학생 시위 때 1주년 만세 시위에 가담해서 옥고를 치르십니다. 이분은 특히 일본 유학 당시 최초 여성 계몽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여자시론’의 발행인을 하는 등 여권 운동가이시기도 했고요. 올해 8월 심사 예정이십니다.

◇ 이동형> 그래요. 지금 서훈이라고 하는 게 우리 국가에서나 또 보훈처에서나 알아서 공적 조사를 해주어서 서훈으로 올리는 게 아니고, 대부분 유족들이 조상들의 독립활동 기록이라든가,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던 기록을 찾아가지고 신청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경찰이 이렇게 유족 대신에 해준다고 하면 상당히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 이영철> 그렇기는 한데, 유족분들께서도 열심히 하고 계시고요. 저희도 당연히 이렇게 해서 저희 경찰관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동형> 문형순 서장이 성산포 경찰서장을 맡을 당시에 서장 앞으로 군 당국이 공문을 보내는데요. 이 공문에 대한 문형순 서장의 답변이 아주 걸작이었다고 하는데, 들어봅시다.

◆ 성우> “예비 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 제주도에 계엄령 실시 후 예비구속중인 D급 및 C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 경찰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할 것.”

문형순: “부당함으로 불이행.”

◇ 이동형> 네, 부당함으로 이행하지 않겠다. 경찰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국 국민들을 자신의 손으로 이렇게 학살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서슬 퍼런 시대였기 때문에 쉽지 않을 텐데, 그것도 우리 공무원들을 흔히 ‘영혼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명령이 부당하기 때문에 이행하지 않겠다. 굉장히 단호한 일인 것 같습니다. 사실은 지난 정권 때 있었던 다양한 국정농단 사건도 위에서 내려왔던 부당한 지시를 이렇게 문형순 서장처럼 부당하기 때문에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일어나지 않았겠죠. 결국은 이 일 때문에 200명이 넘는 민간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요?

◆ 이영철> 네, 6.25 전쟁이 터지고 난 다음에 예비 검속자들을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처형을 하게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셨는데, 제주도 성산에서는 문 서장의 역할로 이런 분들이 대부분 구명됐습니다. 이분이 그뿐만 아니라 그전에 모슬포 서장을 하셨는데, 그때는 1948년 12월, 제주에서 정말 초토화 작전이라고 하는 비극이 진행되고 있을 단계였는데요. 그때도 처형 위기에 놓인 지역 주민 100여 명을 자수를 권해서 모두 구명하게 됩니다. 당시 제주도 분위기에서는 이런 행동은 본인까지 소위 ‘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사실은. 모슬포에서 주민들이 이런 문 서장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 지난 2005년에 서귀포시 대정읍에 그의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안타깝게도 퇴직하신 이후에는 경찰에게 쌀 나눠주는 배급소, 이런 곳에서 일을 하시고, 극장에서 매표원 일을 하시면서 어렵게 생활하시다가 향년 70세에 후손도 없이 혼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 이동형> 백범 선생이 경찰 출신이다, 라고 하면 생소한 분들도 계실 텐데요. 경무국장으로서의 백범의 활약상, 어떻습니까?

◆ 이영철> 경찰관의 한 사람의 입장으로 경찰 김구, 이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놀라게 되는데요.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이라든지,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추진력, 이런 것들을 보면 사실 경찰지휘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은 다 갖추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당시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제 경찰이라든지, 밀정들하고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44세에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되시고, 직접 임시정부의 경찰들을 선발해서 구성하시고, 운영하시게 됩니다. 당시 일제가 임시정부를 와해하려고 얼마나 많은 공세를 했겠습니까? 특히 안창호 선생님 같은 임시정부 요인들은 아마 끊임없이 일제의 위협 속에 놓여 계셨는데요. 그 속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호하고, 또 일제의 밀정을 차단해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심장부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게 한 것이 바로 김구 선생님이 이끄신 임시정부의 경찰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임시정부 경찰의 기틀을 확립하시고, 또 1923년에는 교민단에 경찰 조직인 의경대까지 창설하시게 됩니다.  

◇ 이동형> 백범은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 경찰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 성우> “남의 조계지에 붙어사는 임시정부이니만치, 경무국 사무는 현재 세계 각국의 보통 경찰행정과는 달랐다.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해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 이동형> 임시정부 시절 경찰의 역할과 활약상도 대단한 것이었는데, 무장 의열 투쟁에 참여한 임시정부 경찰들도 있었습니다. 나석주 의사, 유상근 의사, 나창헌 선생 같은 분들이 이런 분들인데요. 1925년 11월 1일 독립신문이 경무국의 일제 밀정 차단 성과를 보도하는데, 그 내용을 한 번 살펴봅시다.

◆ 성우> “그동안 우리 경무국은 민활하고 용감한 활동을 계속 이어온 결과 최근 몇 달 거의 무정부상태에 있었음에도 감히 정치적 야심을 갖고 치안을 방해하는 자가 없었으며,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협박하던 강도배들은 무서워 머리를 감싸고 숨어 버려 그 그림자를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의지가 약한 동포를 유인하여 귀화시키며, 우리 독립운동자 서로를 이간하여 반목하게 하고, 우리의 운동계획을 알아내 큰 공을 스스로 과시하며 일본 외무성 또는 조선총독부의 기밀비를 받아 배를 채움으로써 뜻을 이루던 일본 정탐 하나다 나카가와 등은 자신들이 배치했던 정탐선이 끊어져서 매우 당황하며 다시 정탐선을 이어보려고 염치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함부로 정탐이 되어 달라는 문자를 보낸다는 소식은 우리가 요즘 자주 듣는 말인 동시에 우리 경무국의 성의와 용감을 다시 한 번 찬양하고 감탄하게 된다.”

◇ 이동형> 네, 방금 들으신 대로 독립신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임시정부 경찰은 우리 교민들을 위협하는 강도 모리배는 당연하고요. 밀정, 세작들까지 처단했다,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요. 조선인으로서 일본인 편에 섰던 밀정이 있었던가 하면 반대로 일본인 속에서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밀정 역할을 한 경찰도 있다. 맞습니까?

◆ 이영철> 영화 ‘밀정’에 나오는 이정출 경부를 많이 아실 텐데요. 송강호 씨가 연기했습니다. 이분이 ‘황옥’이라는 실존 인물입니다. 저희가 아까도 말씀드렸던 광복 후에 경찰관이 됐던 독립투사 중에 이런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전을생 경사라는 분인데요. 16살의 어린 나이에 형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형은 중국군이 되고, 본인은 일본군에 통역관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일본군의 기밀을 빼내가지고 형에게 넘겨주고, 일본군에는 중국군의 허위 정보를 보고해서 일본군이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하게 되고, 그래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형이 일본군에게 잡혀 처형을 당하게 되니까 위기감을 느끼고 일본군을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돌아간 뒤에도 애국단을 조직해서 일본인들의 신사를 파괴하고, 이런 식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중 광복이 돼서 풀려나게 됐는데, 광복이 된 다음에는 경찰관이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서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데요. 형사로만 29년을 근무하시고 은퇴하셨습니다.

◇ 이동형> 전을생 경사.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들어가서 일본군 기밀을 빼냈다. 목숨을 건 일인데, 훌륭하게 해내셨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경찰의 역사는 이른바 일제 순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미군정이 시작되자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 경찰 요직에 앉히죠. 해방 직후 서울의 미군정 경찰 책임자였던 윌리엄 매글린 대령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성우> “예전 일본인 밑에서 훈련받은 경찰관들을 군정청이 그대로 쓰고 있는 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그렇지만 군정청에 들어온 한국인 경찰들은요, 뭐라고 할까, 경찰관으로서는 날 때부터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일본을 위해 그처럼 충성을 다했다고 한다면 우리 미국한테도 꼭 같이 충성을 다해줄 것 아닙니까. 단지 일본 사람들 밑에서 훈련받았다고 해서 그들을 쓰지 않는다면 공평한 처사는 아니겠지요.”

◇ 이동형> 당시 미군정이 독립한 조선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윌리엄 대령의 이야기만 봐도 알 수 있겠죠. 그들은 친일을 했기 때문에 해방이 된 후에 다시 친미를 할 것이다. 그런 예언을 했고, 또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죠. 그러니까 당시 한반도로 들어왔던 미군은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독립을 하고 싶어 했고,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활동을 했는지, 그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오판을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이 방송에서 노덕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었는데, 노덕술의 횡포로 약산이 월북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고요. 여운형 선생 암살 사건 배후에도 경찰이 있다, 그것도 노덕술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죠?

◆ 이영철> 네, 우선 여운형 선생의 암살이나 김원봉 선생이 월북한 경위,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저도 어떤 말씀인지 잘 알고 있는데요. 어쨌든 역사적으로 아직까지 분명히 증명된 부분이 단정적으로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덕술이라는 친일 경찰에 대해 말씀드리면, 광복 직후에 사실상 국가 기능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경찰뿐이었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인데, 당시 반공 정책을 유지하고, 공산화를 제일 문제시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제 경찰 출신들을 다 배제하고 신입 경찰만으로 공산주의자를 막기가 어렵다고 아마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즉시 전력감인 경찰 경험자가 필요했고, 친일 경찰들을 중용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굽니까. 일반인들에게도 붙어서까지 한국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경찰 고위직까지 했던 사람들이다 보니까 아마 미군정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탁월한 기회주의적 능력을 발휘해서 살아남았던 것 같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는데, 사실 노덕술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양에서 일제 경찰을 하다가 광복 이후에 김일성이 풀어줍니다. 남한으로 내려와서 같은 이북 출신 일제 경찰로 장택상 당시 수도경찰청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던 최연의 도움으로 한국 경찰이 되었고요. 시간 관계상 다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일제 때와 똑같이 이때도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한 2년 정도 경찰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나중에 헌병으로 군에 들어가서 약 5년 생활을 하고 뇌물죄인가로 파면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 이후에는 국회의원까지 출마했었는데요.

◆ 이영철> 낙선했죠.

◇ 이동형> 해방 후에 김구 선생이 경찰에 남긴 당부가 있습니다. “애국, 안민의 민주 경찰.” 지금의 경찰에게도 시사하는 있을 것 같습니다?  

◆ 이영철> 김구 선생님께서 애국, 안민의 민주경찰이 되라고 당부하시면서 “국민의 경종이 되소서” 하는 휘호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70년이 지났는데, 지금 경찰에게도 매우 많은 울림을 주고 있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경찰이 과연 김구 선생님의 당부를 잘 실천했는지 여부는 다시 생각을 해보면서 이런 내용을 앞으로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어쨌든 경찰을 대표해서 나오셨으니까요. 최근 경찰 조직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많이 실망하고, 불신의 눈으로 경찰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한 올해,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민주·인권·민생’ 경찰, 이런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영철> 저도 경찰관의 한 일원으로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매우 안타깝고, 또 매우 무거운 마음에 국민들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들이 예전부터 반복된 일이 있었고, 또 이런 식으로 앞으로 또 반복될 여지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를 통해서 경찰관들이 바람직하게 배워야 할 표상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그것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가 하고 있는 이런 일들이 일시적으로 마감되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서 경찰관들이 진정으로 국민만을 위한 바람직한 경찰 정신을 배워나갈 수 있는 계기로 꼭 만들어나가겠습니다.

◇ 이동형> 네,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 이영철> 감사합니다.

◇ 이동형>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6편, ‘임시정부 뜰을 쓰고 문을 지켰던 사람들.’ 오늘은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팀장을 맡고 있는 이영철 총경과 함께했고요. 이영철 총경 보내드리면서 생존해 계신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김영진 선생의 육성을 전하겠습니다.

◆ 김영진 선생> “17살 때 중국으로 갔어요. 서주에서 광복군 공작원 윤창호 동지를 만나가지고 그분의 소개로 광복군에 입대를 하게 됐어요. 광복군 3지대에 들어가서 김학규 장군 밑에서 훈련을 받고, 상해에 파견돼서 활동하다가 체포됐어요. 18세 때 우리가 광복군을 모집할 적에 여러 군데 공작을 했거든. 그 가운데 누가 배신을 한 거지. 체포된 거예요. 내 과거에 활동 사항. 이것은 사회에 공개 안 하는 게 좋겠어. 경찰관들이 지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상당히 주야 노력을 하고 있는데, 내가 뭘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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