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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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서대문형무소 8호실의 노래”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2-26 11:07  | 조회 : 2890 
YTN라디오(FM 94.5) [수도권 투데이]

□ 방송일시 :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 출연자 :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


◇ 장원석 아나운서(이하 장원석):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저항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펼쳐진 3·1운동이 올해 100주년이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시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 또 선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요. 오늘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특별한 시간 마련했습니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관장님, 어서 오십시오.

◆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이하 박경목):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장원석: 반갑습니다. 올해 굉장히 뜻깊은 해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고. 또 다른 곳도 아니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올해 맞이하면서 어떤 기분이 드셨습니까?

◆ 박경목: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하고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00주년이기도 해서 굉장히 감회가 새로운데요. 저는 과거 100년이 앞으로 우리가 준비할 미래 100년의 바로 올해가 시작점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학술적인 이야기도, 학술적인 자료도 준비하고 또 전시도 준비하고. 시민들이 앞으로 미래 100년을 준비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같이하고자 지금 열심히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 장원석: 특히나 역사 그리고 역사관이라고 하면 자라나는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굉장히 교육적으로도 필요한 곳이고 중요한 곳인데, 학생들은 요즘에도 자주 견학하러 옵니까?

◆ 박경목: 지금 방학시즌이라 학생들 많이 오는데, 좀 많이 달라진 것은 학생들만 오지 않고 부모님들하고 손잡고 같이 오십니다. 부모님들이 또 이렇게 알려주면 학생들이 진지한 눈빛으로 관람하고 계셔서 많이 오시고 계십니다.

◇ 장원석: 좋네요. 예전보다 찾아오는 견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이 많아지고 있나요?

◆ 박경목: 계속 증가추세에 있고요. 저희가 1년에 70만 명 정도 방문하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오시는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장원석: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네요. 그런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아무래도 일제 저항의 상징이고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숨을 거두신 곳인데. 규모는 저도 가봤습니다만 상대적으로 생각보단 작지만 수감자들에게는 아주 끔찍한 생지옥이라고 불린 열악한 환경에서 수감자들을 괴롭힌 곳이라고 들었는데. 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설명해주신다면 이곳을 어떻게 소개하시겠습니까?

◆ 박경목: 서대문형무소는 1910년 강제병합, 강제합병 또는 병합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전에 1908년도에 만들어졌습니다. 만든 목적 자체가 일제에 저항하는 우리 한국인들을 수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요. 그러다 보니까 일제 강점기간 내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장소죠. 규모느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운영됐습니다. 감옥 증에서요, 물론. 그래서 규모는 상대적으로 약간 작다고 하셨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작지만, 감옥 안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큰 규모로 운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열악했다는 부분은 뭐냐면 이 감옥에 들어오면 먹을 것을 마음대로 주지 않죠. 그래서 가장 큰 고통이 배고픔. 지금 2월 달인데 한겨울에 영하 20도까지 떨어집니다, 추위에. 난방이 안 되죠. 한여름에는 30도를 훌쩍 넘어가죠, 더위. 당시 동아일보 기사엔 한여름에 ‘초열의 지옥’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당시에는 너무 많은 수감자들이 있기 때문에 기록에 의하면 2~3평 되는 방에 20명 이상 수감돼서 굉장히 많은 인원들이 수감됐다. 이런 기록들이 있어서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수감자들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고통을 당한 곳이죠.

◇ 장원석: 다 같이 앉지도 못하고요. 돌아가면서 앉아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만약 그런 상황이면.

◆ 박경목: 이제 조금 아픈 분이나 이런 분들은 좀 배려를 하고. 이래서 돌아가면서 앉았다 섰다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 장원석: 정말 인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고 끔찍한 기억이 있는 분들, 그리고 그런 얼신들을 보면서 자라온 세대들, 지금 계속 함께 우리가 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건데요. 저는 사실 학창시절에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이라든지, 아니면 서대문형무소 견학을 가게 되면 굉장히 답답했어요. 왜냐면 학생 때는 사춘기니까 감수성이 예민한데 감정이입이 되잖아요. 독립투사들 지금 말씀해주신 것처럼 그런 참혹했던 기록들 살펴보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굉장히 오래 전 일도 아니에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 겪어왔고, 젊었을 때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또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생각하면 굉장히 젊은 나이였잖아요.

◆ 박경목: 윤봉길 의사는 의거 당시의 나이가, 놀라지 마십시오. 24살이었습니다.

◇ 장원석: 그러니까요. 유관순 열사도 그렇고.

◆ 박경목: 유관순 열사 돌아가실 때 18살.

◇ 장원석: 그러니까 학창시절 때 견학 갔을 때 제 나이와 같은 나이에, 그리고 지금 제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셨는데. 그런 걸 생각했을 때 이런 곳을 찾아가서 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역사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마음 때문에 가기가 꺼려지기도 했거든요. 괜히 죄송스럽고 답답하니까. 그런데 요즘 학생들도 견학 오면 이런 이야기 하나요?

◆ 박경목: 아마 장원석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나 봅니다. 요즘 학생들도 많이 견학을 오는데요. 처음부터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너무 무거운 마음으로 오자고 하면 잘 오기가 꺼려지죠. 일단 가벼운 마음으로 좀 옆에 이런 게 있구나, 한 번 가볼까, 한 번 어디를 놀러가는데 거기도 한 번 가볼까, 그런 게 있다더라. 이렇게 해서 오시면 한 바퀴 돌고 나면 나름대로의 생각과 감회가 있으실 것 같아요. 가벼운 마음으로 오시되 한 바퀴 돌고 나서 뭔가 감회와 느낌을 가지고 가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 장원석: 그렇죠. 저는 선생님들한테 이렇게 교육받았거든요. 여기는 마음가짐도 올바르게 해야 하고, 이 안에 들어가서 장난치면 안 돼. 그리고 복장도 단정하게, 너무 밝은 색 입고 오지 마라. 이렇게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찾아올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예전 역사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찾아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서대문형무소에서 끔찍한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는 지금까지 몇 분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까?

◆ 박경목: 지금 저희가 자료로써 정확하게 추정은 할 수 없습니다. 자료가 조금 불탄 부분도 있고 남아있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지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분들의 기록 가운데 수형기록카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종의 지금 표현으로 빌리자면 범죄자들의 신상기록 카드입니다. 문화재로 작년에 등록이 됐습니다. 등록문화재 730호로, 일제 주요대상 감시인물카드 이런 이름으로 등록이 돼 있는데, 그 카드에 번호가 매겨져 있거든요. 그래서 카드를 연구하고 있는데. 1번 박장록이라는 분부터, 3·1운동 때 참여한 분입니다. 6만5193번까지 카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카드가 다 남아 있는 건 아니고 10% 정도만 남아 있는데, 일단 이 자료로만 봤을 때는 최소 6만5000명 이상은 있었다. 그리고 카드가 1919년 전후부터 본격적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카드가 작성되지 않았던 전 시기, 1908년부터 따진다면 약 9만 명 이상 있을 것으로, 수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입니다.

◇ 장원석: 공식 자료만으로도 이렇게 추정이 되는데, 그렇게 자료에 등록되지 않은 분들까지 합하면 굉장히 그 수가 늘어나겠군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하면 여러 분들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분은 유관순 열사시잖아요. 역시 여기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유관순 열사가 있었던 8호실, 여기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수감생활을 했나요?

◆ 박경목: 네.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여성 수감자들도 수감을 했고요. 유관순 열사는 1919년 8월 달에 공주 감옥에서 서울로 이관이 돼서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 8호실 감방에 당시에 같이 수감되신 분들이 7~8분 정도 계셨는데요. 개성에서 3·1운동을 한 유명하신 분입니다, 이분도. 어윤희, 신관빈, 권애라, 심명철 이런 분들이 계셨고요. 또 요즘 많이 알려지고 있는데 수원기생조합 출신입니다. 김향화라는 분도 계시죠. 일제강점기엔 당시 권번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얘기로 하면 소위 기생이죠. 그다음에 세브란스 간호사인데 당시에 종묘 앞에서 3·1운동을 한 노순경이라는 분도 같이 수감됐던 걸로 알려지고 있고요. 또 경기도 파주에서 3·1운동을 한 임명애라는 분도 같이 수감되셨는데, 이분은 특이하게 만삭의 몸으로 3·1운동을 하다가 같이 수감되셨습니다.

◇ 장원석: 정말 여러 지역에서, 그리고 여러 직업을 가지고 계시던 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또 만삭인 분까지도 3·1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고 수감생활도 하셨는데. 여기에서 또 독특한 기록이 얼마 전에 발표돼서 눈에 띄었어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옥중에 같이 만세도 외치고, 또 노래를 만들어서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어떤 이야깁니까?

◆ 박경목: 저도 최근에 이 자료를 접하면서 적지 않게 굉장히 놀랐고, 이런 기록이 남아있구나,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좀 부끄러움도 느꼈습니다, 미리 발굴을 못해서. 한국일보 이진희 기자님이 발로 뛰어서 열심히 취재하셔가지고 이 후손을 직접 만나서 기록을 취재하셨는데요. 유관순 열사랑 같이 수감되셨던 심명철이라는 독립운동가 지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아드님이 지금 현재 생존하고 계십니다. 문수일 선생님이신데, 이 아드님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께서 3·1운동 이후에 1920년 3월 1일 날 옥중 만세투쟁을 하면서 그 8호 감방에 있는 동지들과 같이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래서 그 기록을 쭉 남겨주셨고요. 멜로디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가사만 전해졌는데, 괜찮다면 제가 한 번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 장원석: 물론입니다. 가사 한 번 읊어주시겠습니까.

◆ 박경목: 문수일 선생님이 직접 기록으로 남기신, 어머님께 들은 가사입니다. 1920년 3월 1일 옥중투쟁을 위해서 여옥사, 8호 감방 동지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입니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이런 노래 가사입니다.

◇ 장원석: 길지 않은 가사들인데 그 속에 하나하나 뭔가 아픔도 있고요. 그리고 뭔가 강인함도 담아있는 것 같고요.

◆ 박경목: 우리가 보통 운동을 할 때 서로를 격려하고 또 힘을 얻기 위해서 이런 구호를 외치거나 같이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까. 아마 당시에도 서로 간에 격려하고 힘을 서로 북돋기 위해서 스스로 이렇게 노랫말을 만들어서 불렀던 것 같습니다.

◇ 장원석: 노래가사를 읊으시면서 얼마나 그 안에서 만감이 교차하셨을지.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거기도 얼마나 춥고 딱딱하고 불편한 자리였습니까.

◆ 박경목: 그래서 일복이란 것은 일본이 준 수감복을 얘기하는 겁니다.

◇ 장원석: 그것도 굉장히 누추해 보였어요, 제가 기억하기론, 얇고.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거기서 배식을 주는데 밥도 다 시원찮았겠죠. 어떤 것들을 주로 드셨을까요?

◆ 박경목: 여기서 콩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당시의 식량규정에 의하면 여러 가지 잡곡들이 섞여있고 콩이 40~60%기 때문에 주로 눈에 띄는 건 콩밥이죠. 우리가 소위 감옥 가면 콩밥 먹는다 하는 것들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 장원석: 그렇겠군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개인이 육체적으로 핍박을 받고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약해져 있을 텐데도 ‘대한이 살았다, 산천 바다 그리고 대한’ 이렇게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여기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은데. 여옥사 8호 감방의 노래,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을 발굴해내지 않았으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겠어요.

◆ 박경목: 네, 그렇습니다. 다행히 또 우리 아드님이, 문수일 선생님이 생존해계셔서 생생하게 증언을 해주셔서 이런 자료들이 남아있고. 아마 옥중에서 이렇게 노래를 만들어서 불렀다는 이야기는 저는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자료라고 생각이 됩니다.

◇ 장원석: 그렇군요. 그러면 이제 발견됐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증언을 모은다든지 연구가 진행된다든지, 앞으로 더 무궁무진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겠군요.

◆ 박경목: 실제로 3·1운동 전후로 해서, 또 1910년도 전후로 해서 우리 조선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 창가 형식으로 노래를 만들어서 많이 격려하면서 불렀다. 이런 기록들은 또 남아 있거든요. 여기도 아마 창가 형식으로 멜로디를 붙여서 부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장원석: 앞으로도 이런 자료들이 좀 발굴돼서 우리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도 교육적으로 알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3·1운동 당시에 서대문형무소 주변 일대 분위기 이것도 궁금한데요. 아무래도 그런데 서대문형무소에는 3·1운동 이후에 투옥되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이전에 투옥되신 분들도 많이 계시잖아요. 3·1운동과 동시에 그 이후에 수감된 분들 급격히 많이 늘어났나요?

◆ 박경목: 1908년도에 개소할 때 수용인원은 500명 규모밖에 안 됐습니다. 그리고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 수감자들이 늘어나게 돼서 1500~2000선을 왔다갔다하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그해 12월에 통계자료가 나와 있는데요. 3070명이 수감됐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까 500명이라고 수용인원을 말씀드렸는데 6배 규모 정도 되는 것이고요.

◇ 장원석: 그러면 정상적으로 수용자들의 인권이라든지, 그리고 최소한의 공간을 생각한다면 적정 수용인원이 정해져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을 훨씬 넘겼네요. 

◆ 박경목: 6배를 초과한 거고요. 당시 서대문형무소 상황은 정상적으로 감옥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교도소장이었던 일본인들이 나중에 패전 이후에 회고록을 남기는데, 만약 수용자들이 일시에 폭동을 일으켜서 벽을 허물고 탈옥을 한다면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다, 매우 긴장되는 상황이다. 이런 기록들도 남아 있고요.

◇ 장원석: 그 정도로 마구잡이로 수감시켰군요. 서대문형무소 주변 상황, 유추해보자면 3·1운동 당시 그즈음 해서는 어땠을까요?

◆ 박경목: 충분히 저희도 짐작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신문기사를 통해서 그런 자료들이 보입니다. 3월 27일은 서대문형무소 주변에서 만세성, 성 자는 한자로 소리인데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1919년 5월 24일 옥중에서 또 만세소리가 납니다. 난리가 난 거죠. 또 그해 7월 1일에도 또 옥중에서 죄수가 밤에 기도를 한 후에 만세를 불렀다. 이런 기록들이 또 일제 측 문서에 남아 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이고요. 그다음에 7월 11일자 기사에 보면 서대문감옥 서북쪽 고지에서 수십 명의 조선인들이 만세를 불러서 경계하던 경찰과 병졸들이 급하게 체포하려고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우리 3·1운동 참여하신 분이 갇혀져 있으니까 일반인들이 그 주변에서 만세를 불러서 북돋운 거예요. 이런 기록은 그해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해에 1920년 6월 30일자에 동아일보 보도 기사에 의하면 ‘서대문감옥 뒷산에서 야밤에 만세성’ 이런 또 기사가 있습니다. 수십 명의 군중이 크게 만세를 부르짖었다. 간수의 증언에 의하면 아마 옥 안에 갇힌 수감자들을 북돋기 위해서 만세를 부른 것 같다. 이런 자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 장원석: 수십 명이 근처에서 밤에 그렇게 만세소리를 외쳤다면 충분히 안에서도 어떤 내용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셨을 것 같은데. 당신들이 여기 들어가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혼자가 아니다.

◆ 박경목: 우리는 밖에서 당신들을 지지하고 있고,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운동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고생스럽지만 포기하지 말고 힘내십시오.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장원석: 굉장한 힘을 얻으셨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굉장히 의미 있는 것이 있어서 제가 하나 가져와봤는데.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서 1600건 넘게 일어났다는 정부 조사결과가 있었어요. 국사편찬위원회가 연구해서 조사해서 발표한 건데. 데이터베이스를 보니까 남북한 전체 우리 한반도 국토를 합쳐서 1692건이 발생했다고 하고요. 참여자가 80~1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좀 놀랐던 점이 사망자가 900명이 넘었다는 게 보도가 됐어요. 사실 3·1운동 당시에 나가서 태극기 흔들고 만세를 외친다는 것이 지금 시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위험성을 떠안고 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 박경목: 지금 저희도 가끔 예전에 촛불혁명이라든지, 그럴 때 아주 평화롭게 즐거운 마음으로, 마치 뭔가 축제에 참여하는 분위기로 참여했지 않습니까.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요. 내가 저 대열에 합류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라는 아주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참여한 것이고. 수년 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데이터베이스화 시켜서 전문 연구자들이 수십여 명이 동원돼서 기록을 남긴 것인데. 이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공식적인 기록이죠. 그러니까 저희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기록은 더 있을 것이다. 1920년 박은식 선생님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는 책에서 발표한 자료는, 사망자는 7500명 이상, 참여자는 200만 명 이상, 그리고 그 당시에 수감자, 피체자죠. 체포된 사람은 4만5000명 이상. 이렇게 그 당시에 20년도에 기록을 남기셨는데. 지금 현재로서 이것을 증명할 만한 기록들을 찾다 보니 일단 명확한 것은 이렇게 되고,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부분까지 합치면 더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 장원석: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만들었던 소요사건관계서류, 일본 외무성기록, 판결문, 일본어랑 영어랑 된 것 수만 건을 5년 동안 조사했다고 하는데, 그렇겠네요. 실제로 이렇게 외국 문서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바탕으로 조사해서 이번에 발표한 거잖아요.

◆ 박경목: 특히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는 일제 측이 작성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명확한 것들만 일단 1차적으로 조사했고. 또 지역의 현장에 가서 조사하다 보면 구전으로 우리 애 아버지도 참여했다, 아니면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명확하게 자료로 남아있지 않은 부분까지도 있습니다.

◇ 장원석: 이 기록을 발굴해내고 연구를 한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자료들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 박경목: 그래서 이런 연구들이 저희가 그동안 독립운동사가 굉장히 심화되고 많이 연구가 됐다고 연구자들도 스스로 생각했는데, 100주년을 맞아서 이런 연구과제들을 가지고 연구하다 보니까,

◇ 장원석: 더 드러나는 게 많군요.

◆ 박경목: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앞으로 미래 100년을 위해서 앞으로 더 연구할 것도 많고 과제도 많고. 지금 올해 들어서 여러 가지 학술 심포지엄도 많고 자료도 많이 발간되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 바로 100년을 준비하는 역사의 시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장원석: 그렇죠. 조금 전에 낭독해주신 가사, 그런 것도 이제 발견되고 말이죠. 10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지금 우리가 시위라고 하면 나가서 죽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은 절대 안 하잖아요. 그런데 이때는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그냥 일반 시민들이 뛰쳐나가고, 농사일 하다가 뛰쳐나가고, 학생들 공부하다가 지금 공부가 무슨 소용이냐, 뛰쳐나가자 해서 나가서 만세 외치고.

◆ 박경목: 우리 장원석 선생님이 정확한 지적을 해주셨는데요. 당시에 직업분포를 보면 절반 이상이 농업입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죠.

◇ 장원석: 그래요? 영화에서는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에 실릴 법한 대단한 영웅들이나 나가서 다 같이 만세 외칩시다, 이끌고 이럴 것 같은데 일반 농민들?

◆ 박경목: 예, 그렇습니다. 영웅들은 교과서에 나와서 우리가 익히 아는 분들 일부이고요. 우리 3·1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한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나운서님 말씀하신 농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휴교령이 내려지니까 ‘우리도 가서 지금 이 식민지라는 부당한 사회에 우리도 한마디 해야 하지 않겠어, 정의를 외쳐야 하지 않겠어, 부당하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뛰쳐나간 학생들. 유관순 열사도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가서 3·1운동을 전개한 것이고. 또 아까 8호 감방에 같이 있었던 심지어는 기생조합 출신의 기생들도 참여했고. 또 수형기록카드에 신분이나 직업을 적게 돼 있는데 지금 생각으로 사회 저층에 있었던 직업군들, 예를 들면 마차꾼, 차부, 고물상, 지금 표현으로 드리겠습니다, 대금업자, 대필업자. 이런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다 참여를 했죠. 그래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운동이었다. 이렇게 저는 보고 싶습니다.

◇ 장원석: 사실 그분 한 분 한 분들이 다 영웅이죠. 그중에서 몇 분만 드러나는 것이고, 드러나지 않은 분 중에서 얼마나 또 고통스럽게 독립운동을 하시고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바지하신 분들이 계시겠습니까.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분들, 그런 분들 다 찾아서 우리가 조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독립지사들은 과연 서대문형무소 같은 흔히 말하는 감방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고문을 받고 독방에서, 흔히 우리가 많이 알려진 것들, 굉장히 좁은, 앉지도 못하고 서서 어깨를 좁히고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고문기구도 있고, 날카로운 흉기가 달린 고문기구도 있고,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는데, 강제노역 이야기도 있고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전문가 의견도 엇갈리는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록으로 다 남아있는 것들이 있는 거죠?

◆ 박경목: 네, 정확하게 기록으로 확인되는 부분만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 감옥의 일상’ 이런 주제로 논문을 썼는데. 우리가 감옥 하면 굉장히 참혹한 공간이고 열악한 공간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감옥이라는 내부도 어쨌든 6개월이든 1년이든 10년이든 살아가야 하는 일정한 사회구조였죠. 이 구조 안에서 독립운동가들, 소위 그 당시에는 사상범이라고 불렀습니다.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라고 일본이 인식한 거죠.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자기네들 식민지배 체제를 변혁하려거나 바꾸려고 하거나 이런 사람들로 본 거예요. 특히 3·1운동가들도 보안법 위반이나 출판법 위반, 소요, 정치범 처벌에 관한 죄, 이런 것들로 다 죄명을 씌웠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도 바로 사회를 변혁하려는 주체로 일본 스스로 인식했다, 이런 점이 있고. 바로 감옥이란 사회구조에서 그 사람들은 사상범으로 특별하게 취급받았죠. 초창기에는 노역을 시키지 않습니다. 독방이나 좁은 감방 안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하고요.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 같은 걸 시키죠. 그런데 제가 가끔 서대문형무소 오시는 우리 어린 학생들과 같이 해설하면서 하는 때도 있는데, 물어봅니다. ‘아이들아, 우리 감옥 안에서 하루 종일 있는 게 편하겠어, 나가서 힘들게 일하는 게 편하겠어?’ 이렇게 물어보면 아이들은 뭐가 편할까, 이렇게 하는데 사실은 나가서 일하는 게 훨씬 낫죠.

◇ 장원석: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 박경목: 감옥 안에 혼자 있으면 일단 외롭겠죠. 춥겠죠, 덥겠죠.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그냥 있게 하지 않습니다. 정좌라는 자세를 요구하는데요. 바를 정에 앉을 좌 자를 씁니다. 지금 얘기하면 소위 무릎꿇고 있는 자세인데, 하루 종일 그렇게 앉아있어야 합니다.

◇ 장원석: 그러려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피폐해지겠어요.

◆ 박경목: 그 점을 노린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을 통해서 정신을 바꾸려고 하는 거죠, 그들이 의도한 대로. 그리고 사상범들은 식사량을 조절하죠. 식사가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양을 달리하고 있는데, 소위 사상범들은 4~5등급 이하, 그래서 아마 200g 이하의 식사를 주게 됩니다.

◇ 장원석: 200g, 지금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200g 정도 되거든요. 이 정도밖에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삽니까?

◆ 박경목: 최소한의 영양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요. 그러다 보니까 감옥에 수감되면 영양분이 부족해서 영양결핍으로 해서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죠. 지금 저희야 잘 먹으니까 가끔 감기 정도 걸리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면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각종 질병에 노출되겠죠. 실제로 감옥에서 사형을 언도받아서 죽는 비율보다, 자료가 안 남아있어서 이것도 정확하게는 말씀 못 드립니다만 추정으로 이런 질병에 걸려서 돌아가시거나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시거나 이런 비율이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장원석: 그렇군요. 지금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되새기면서도 정확한 자료를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매천 황현을 추모하기 위해서 쓴 시가 최근에 또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는데.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를 그 당시에 어떻게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일제 치하에서. 그렇기 때문에 많이 사라졌고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했는데, 남아있는 자료 소중히 여기고 또 발굴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 앞서도 했습니다. 끝으로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점, 잊지 말아야 할 점 말씀해주신다면요?

◆ 박경목: 네. 금년에 3·1운동 100주년,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요. 100주년이라고 여기저기에서 많은 행사도 하고 관련 자료들도 공개되고 그렇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미디어나 각종 매체를 통해서도 접하실 수 있는데. 제 생각에는 우리 시민들이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이나 자료들을 일상에서 항상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역시 저희 같은 전문 연구자들이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논문이나 이런 것들을 좀 일반화시켜서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또 그런 노력들을 이제 막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 노력들은 주변에 있는 가까운 곳을 잠깐 들르거나 하면서 그런 공간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들을 주변에서 조그맣게, 크게 안 해도 됩니다. 조그맣게 아니면 잠깐이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장원석: 앞서 관장님이 독립정신을 기리고 또 새롭게 연구를 해야 하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시작, 그리고 그 가운데서 조금 더 수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박경목: 감사합니다.

◇ 장원석: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 들어보면서 많은 공부가 됐던 것 같고요. 저도 다시 한 번 이런 좋은 역사적 공부를 한 것 같아서 굉장히 뜻깊게 생각이 됩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박경목: 감사합니다.

◇ 장원석: 지금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박경목 관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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