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FM, 조현지입니다
  • 제작,진행: 조현지 / 구성: 조경헌

인터뷰 전문

[같이의 가치] 부정적 장애인식도 일제의 식민잔재였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8-29 14:33  | 조회 : 1157 
[YTN 라디오 ‘뉴스FM, 조현지입니다’]
■ 방송 : YTN라디오 FM 94.5 (12:20~14:00)
■ 진행 : 조현지 아나운서
■ 대담 : 이성규 한국 장애인재단 이사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같이의 가치] 부정적 장애인식도 일제의 식민잔재였다?


◇ 조현지 아나운서(이하 조현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꽤 선진적이었던 우리의 장애인 복지정책과 사회적 인식. 하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크게 후퇴하고 말았는데요. 이사장님. 도대체, 왜 때문에 그런 거죠? 오늘 <같이의 가치>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장애 인식에 대한 이야기 나눠봅니다. 서울시립대 교수이자 한국 장애인재단 이성규 이사장과 함께 할게요.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 이성규 한국 장애인재단 이사장(이하 이성규)> 네, 안녕하세요.

◇ 조현지> 요즘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인해 한일관계에 냉기류가 흐르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반일 불매운동도 꾸준히 진행 중이고요. 현 상황에 대해서 이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이성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현재 한국과 일본이 첨예한 외교, 경제 갈등을 겪고 있는데 과거의 잘못된 부분들은 올바르게 직시하고, 양국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 해결을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조현지> 저도 이사장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앞서 오프닝에서 살짝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 ‘같이의 가치’ 주제도 일본과 관련이 있다고요? 

◆ 이성규> 네 맞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인식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하는데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일제강점기부터 급속하게 확산된 사실을 아시나요? 

◇ 조현지> 지난번에 이사장님과 방송을 통해 조선시대 장애인 정책과 국가차원의 세부 지원이 있었다는 점은 알게 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잘 모르겠네요.

◆ 이성규> 한국 장애인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 이 시기 장애인 수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전차와 철도, 자동차가 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교통사고’가 빈발했고,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부상을 입는 등 각종 ‘산업재해’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태형과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는 독립 운동가들도 부지기수였죠.

◇ 조현지> 그러한 이유로 장애인의 수가 많이 늘었을 거 같네요. 늘어난 장애인에 대한 복지 정책도 마련하기 힘들었을까요?

◆ 이성규> 네, 아무래도 그렇죠. 장애인 복지정책은 조선시대에 비해서도 크게 퇴보하게 되었습니다.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도 전무했고, 문명화를 이유로 시각장애인이 행하던 점복이나 독경 또한 금지되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구걸하는 장애인들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 조현지> 늘어나는 장애인의 수와 구걸하는 장애인이 증가함에 따라 장애 인식도 사뭇 달라졌을 거 같습니다.

◆ 이성규> 네, 맞아요.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달라졌죠. 조선 시대에 장애를 가리키는 말은 잔질, 폐질, 욕질과 같은 질병이었습니다. 또한 민간에서는 ‘병신’이라는 용어를 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병이 있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개화기 무렵부터 ‘불구자’라는 말이 급속도로 퍼졌죠.

◇ 조현지> 불구자라는 용어도 일본어에서 나온 말인가요?

◆ 이성규> 네. ‘후구샤’라는 근대 일본어에서 온 말로 ‘기능이 결여된 인간’을 뜻하는데, 장애인은 “무언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이며 나아가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즉,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사회적 장애인’이 탄생한 것이지요.

◇ 조현지> 인식이라는 게 한 번 정립되면 바꾸기 어려운데, 안타깝습니다. 

◆ 이성규> 인식이 바뀌면 물리적인 환경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요, 장애인을 격리해 수용하는 시설도 이 시기에 처음 생겼습니다. 일제는 총독부의원에 국내 최초의 정신병동을 설치하고,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특수병원을 지었습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는 장애인 걸인을 수용하는 ‘불구자 수용소’가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우생학이 득세하면서 장애인을 사회에서 영구히 추방하려는 움직임마저 일어났습니다.

◇ 조현지> 갈수록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화되고,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제거할 존재로 보게 되었군요.

◆ 이성규> 심지어 일본 내부에서도 1930년대 대륙 침략을 앞두고 전장에 내보 낼 '건강한 인구 획득'이란 국가 목표를 세웠습니다. 반면에 '쓸모없고' 세금만 축내는 장애인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요미우리 신문이 "나쁜 피의 원천을 끊고 민족을 보호하자"면서 여론을 이끌자 군국주의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단종(斷種)법안’을 내놓기까지 했습니다.

◇ 조현지> ‘단종법안’이 미친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이성규> ‘단종법안’ 발의 후, 4년 뒤 일제는 '국민우생법'을 만들어 장애인의 생식 능력을 없애는 단종 작업을 본격화하였습니다. 장애인은 '쓸모없는 존재'를 넘어 '제거 대상'이라는 인식이 더욱더 강화된 것이죠. 이 법 제1조는 "악질적인 유전성 질환의 소질을 가진 자의 증가를 방지한다."라 하여 정신질환자, 시각장애인, 농아인 등에게 단종, 낙태 수술을 강제했습니다. 즉, 국가가 장애인들의 '대를 끊는' 악행을 저지른 셈입니다. 

◇ 조현지> 그러한 인식이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도 미쳤을 것으로 보이네요.

◆ 이성규>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애인 단종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1936년 1월 자 신문에는 "악질의 유전병자는 자식을 못 낳게 해 건전한 민족을 만들자"라는 주장을 펼쳤고, 여러 신문과 사회단체에서도 줄기차게 단종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 조현지>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별다른 저항은 없었나요?

◆ 이성규> 저항이 없을 수가 없죠. 그래서 1944년이 되서야 일본은 조선구호령을 제정해 장애인 등의 기초생존권을 보장하려 했으나, 사실상 원활한 식민통치 수단에 지나지 않았죠. 차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현재의 장애인 문제는 대부분 일제강점 탓에 조선의 진보적 장애 정책과 사회적 인식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한 까닭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조현지> 그렇군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장애인 차별 의식과 편견도 이 무렵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 이성규> 네, 장애인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은 '또 하나의 식민잔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8.15 광화문 집회에 10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되는 등 과거 청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의지가 높은 이번 기회에 장애에 대한 인식도 범국민적 운동을 통해 긍정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현지> 정말 좋은 말씀이시네요.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이 무렵에 불매운동 뿐만 아니라 부정적 장애 인식도 청산될 수 있길 희망해봅니다. 이사장님, 오늘은 어떤 노래 준비해 오셨을까요?

◆ 이성규> 식민잔재를 불태운다는 의미로 ‘애국돌’인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를 준비해 봤습니다.

◇ 조현지> 네, 이 노래 들으면서 인사할게요. 지금까지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걸음이 우리 사회의 장애인식을 바꾸는 거름이 되는 시간. <같이의 가치> 한국장애인재단, 이성규 이사장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이성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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