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이소희 변호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 열다섯 살의 소녀가 어느 겨울, 갑자기 걷지 못하게 됐습니다. 소녀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인생 뭐 있어? 원하는 대로 살아보자. 하늘이 무너져도 방법은 있다. 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 그 후 20여 년이 지났는데요. 이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은 장애를 가지고 법조인과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는 이소희 변호사 모시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이소희 변호사(이하 이소희) : 네. 안녕하세요.
◆ 이성규 : "나는 누구다, 나 이소희" 소개 한번 해 주시죠.
◇ 이소희 : 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변호사로 활동을 하고 있고요. 저는 올 초까지 세종시에서 시의원으로 활동을 했었고. 그리고 올해 4월에 총선에서 국민의 미래 비례대표 19번으로 출마를 했었다가, 아쉽게 18번까지 되는 바람에 살짝 낙선을 했고요. 그리고 지금은 세종시에서 여민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 네. 예금보험공사에서도 일하셨더라고요?
◇ 이소희 : 제가 변호사가 되고 나서 조금 취업이 힘들어가지고.. 다시 한 번 도전을 하는 차원에서. 예금보험공사에 입사를 해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 이성규 : 얼마나 하셨어요?
◇ 이소희 : 총 꽉 채운 4년 동안 했었어요.
◆ 이성규 : 아하.. 그럼 그쪽 전문가시네요. 이제. 금융계는.
◇ 이소희 : 예. 그래서 처음 금융 쪽으로 했었었는데. 그래서 금융 자격증도 몇 개 따고. 열심히 활동했었습니다.
◆ 이성규 : 네. 그래요. 올해 초에 그 바쁜 와중에 또 책도 내셨어요.걷지 못해도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 이 책을 왜 쓰셨어요?
◇ 이소희 : 저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이 '굉장히 빡빡한 대한민국'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제 삶을 통해서 제가 걸어온 삶을 통해서 희망과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어요. 특히 시의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시민들을 되게 많이 만났었거든요? 시민들을 만나면서. 대부분 저는 교육위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학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저한테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을 좀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의 의도 자체가 "너의 삶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미래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면 좋겠다" 이런 의도도 컸었고요. 저도 지금 저와 같은 또 청년 세대들 보면, 무기력하고 포기에 익숙해진 세대가 점점 되고 있는 것 같아서. 희망과 도전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기 힘든 세대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또한 같이 우리 힘내서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보고자 해서 이런 책을 내게 됐습니다.
◆ 이성규 : 네. 근데 요청이 들어온다. 강의 요청이 들어온다.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그 현장을 벗어날 때 어떠세요? 주로?
◇ 이소희 : 우선은 주로 저는 학생들이랑 많이 소통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랑 만나는 것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고요. 그리고 항상 질문을 많이 받게 돼요. 질문을 받을 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저도 해봤던 생각들을 질문하기도 해서 그런 것들이 되게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를 봤냐고. 저한테 얘기를 하면서, 그러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장애인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것 같은지 그런 것도 질문을 하더라고요?
◆ 이성규 : 그건 어떠세요? 생각이? 그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하시겠어요?
◇ 이소희 : 저는 도움 된다고 얘기를 했어요. 왜냐면 적어도 한 번쯤이라도 사람들이 "장애인이 이렇게 사는구나" 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본다면, 그게 또 관심이 있게 되고, 장애인 인식 개선으로도 연결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이 되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인이 좀 익숙해지는 게 장애인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많이 나온다면 사람들이 더 많이 관심을 가져줄 것 같아요.
◆ 이성규 : 또 옛날 얘기 여쭤보면.. 사고가 어떤 종류의 사고였죠?
◇ 이소희 : 저는 의료 사고인데. 다들 의료사고라고 하면, 되게 궁금해하더라고요. 어떤 의료 사고인지. 저는 척추 측만증이라고.. 척추가 S자로 휘는..
◆ 이성규 : 네. 좀 휘었어요.
◇ 이소희 : 네. 그게 요즘에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이들 척추 측만증을 앓고 있긴 하거든요. 한 20도 15도 정도로 약간 자세가 삐뜬 정도로 근데 저는 한 40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조금 각도가 심했었어요. 그래서 그걸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랑 목욕을 하다가 발견을 하게 됐고. 점점 더 각도가 심해졌었어요. 그래서 한 80도까지 각도가 가게 돼서..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는데. 그래서 척추 수술을 하려고 엄마랑 서울에 손을 잡고 가서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신경을 건드리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가 됐어요. 근데 사실 척추 측만증은 디스크 수술이나 그 외의 척추 수술과는 다르게 신경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수술인 건 아니거든요? 근데 좀.. 의사의 과실로 인해서 척추 수술을 하다가 하반신 마비가 됐습니다.
◆ 이성규 : 40도 휜 허리를 곧바로 피다가...
◇ 이소희 : 쉬다가
◆ 이성규 : 15세. 이게 중학생 때인데요. 딱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을 때.. 처음 들었던 감정은 뭐예요?
◇ 이소희 : 아예 실감이 안 났었어요. 그리고 실제 부모님도 제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 봐.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 선생님들한테.. "이 친구한테, 소희한테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숨기셨거든요? 그리고 저도 화면이 마비가 됐을 때, 아예 감각이 없다고 해야 될까요? 그러니까 감각이 없는 게 내 다리에 감각이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그 느낌 자체가 없어요. 마비가 됐다 안 됐다도 저는 얘기를 들은 게 없으니까 배꼽을 만져보라고 처음에 얘기를 하거든요. 근데 저도 배꼽을 이렇게 보통은 지금 배꼽을 이렇게 만질 수 있잖아요? 보통 사람들도? 근데 저는 그때 저도 계속 더듬더듬 하게 되긴 하더라고요. 그럴 때도 제가 눈치를 못 챘었어요. 제가 하반신 마비가 됐다는 걸. 그래서 뭔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 이성규 : 알게 된 때가 있을 거 아니에요?
◇ 이소희 : 네. 그거를 한 한 달 정도 지나가지고 몸이 다리가 좀 찌릿찌릿하고 아픈 게 좀 있었어요. 그 때 이제 의사 선생님 말로는 마비가 조금씩 풀리는 단계. 그쯤이 되고 나서 병원을 다른 병원으로 옮겼었거든요? 그때 옮겼을 때 그 병원에서는 그냥 의사 선생님이 "이제는 얘기를 하는 게 맞다. 재활도 들어가야 되고. 애가 마비도 조금씩 풀리고 있으니까 얘기를 하자" 해서 그 때 알게 됐어요.
◆ 이성규 : 그래서 재활을 좀 오랫동안 하셨어요?
◇ 이소희 : 예. 한 3년 했습니다.
◆ 이성규 : 3년을.. 한때는 입원도 했겠고..
◇ 이소희 : 저는 3년 거의 내리 입원을 했었어요.
◆ 이성규 : 그래요?
◇ 이소희 : 아니 보통은 더 짧게도 하긴 하는데. 제가 10대다 보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 친구가 걷기를 계속 바랐던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 그래서 이 자체로 나가는 것도 좋지만, 그리고 또 마침 저는 몸이 계속해서 좀 좁아지는 게 보였어요. "이제 움직이지 않네? 좀 나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 되면 몸이 좀 더 좋아지고, 좋아지고 하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좀 더 재활을 더 해보자" 하다 보니까, 3년까지 입원을 하는 생활을 했었어요.
◆ 이성규 : 근데 그 재활의 효과랄까요? 그게 좀 있긴 있었어요?
◇ 이소희 : 저는 이게 어렸기 때문에 더 있었던 것 같긴 해요. 어리다 보니까는 더 재활을 해서 운동을 하고 하니, 근육이 또 발달이 돼가지고. 몸이 처음에는 앉는 것만 되다가. 또 좀 시간이 지나니까 서는 것까지 되고. 좀 지나니까 지팡이 짚고 걸을 수 있게 되고. 그 정도가 되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욕심이 더 나셨던 것 같아요.
◆ 이성규 : 일단 집안 생활부터 이제 난관에 부딪히잖아요? 병원은 병원이라 편할 수 있는데.
◇ 이소희 : 제가 마침 시골에서 당시에 살았었어요.
◆ 이성규 : 의성.
◇ 이소희 : 경북 의성에서 살았었고 저희 집은 단독주택으로 보통 시골에 있는 양옥집이었었거든요?
◆ 이성규 : 증개도 있고 그렇게
◇ 이소희 : 맞아요. 그래서 저희 집이 계단이 5개가 있고. 또 그 5개를 올라가면 또 턱이 하나 더 있고. 그래서 현관을 들어가면 또 턱이 있어요. 그래서 그 턱들을 휠체어를 타고 오르내리기도 힘들었고.. 그리고 저는 '워커'라는 보조기구를 짚고 다녔었거든요? 그 때만 해도? 그래서 그걸 이용해도 제가 다리를.. 발목에 힘이 없다 보니까 질질 끌고 다니는 상태에서 문지방을 넘기도 힘들고. 그 턱을 넘기도 굉장히 힘들었었죠. 그래서 화장실 가는 것도 부모님이 옆에서 도와주고 그래야 되는 상황들이 많았었어요. 그래서 그거를 많이 벗어나고 싶었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부모님한테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저도 언젠가는 조금 매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부모님과 언젠가 떨어져야 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좀 홀로서기를 빨리 하고 싶다 이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 이성규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홀로 섰어요?
◇ 이소희 : 네. 독립을 했습니다.
◆ 이성규 : 집을 나가셨어요?
◇ 이소희 : 네. 집을 나갔습니다.
◆ 이성규 : 어디로요? 의성에서 어디로?
◇ 이소희 : 저는 그때.. 저희 외갓집이 대구에 있었어요. 아무래도 혼자 살더라도. 그래서 주변에 SOS를 요청하면 바로 올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다 싶어서. 외갓집이 있는 대구로 갔었어요.
◆ 이성규 : 멀지 않지만 하여튼 대구가 좀 더 도회지 이 냄새가 좀 나겠어요?
◇ 이소희 : 그렇기도 하고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시골에서 어딘가 외딴 집에 가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도심에 있는 게 오히려 안전상으로 더 낫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 이성규 : 자취하면서 뭘 하신 거예요?
◇ 이소희 : 저는 제가 다리를 못 쓰니까.
◆ 이성규 : 네
◇ 이소희 : 홀로 서려면 뭘 할 수 있을까라고 많이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면 다리를 못 쓰니까, 몸은 못 쓰겠네? 그러면 대신에 근데 머리는 쓸 수 있잖아?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때 마침 퇴원을 했을 때가 제가 18살 겨울이었었고. 보통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고. 그 시기가 좀 지나서 19살 때 자취를 시작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때 나이에 맞게 수능 공부를 시작을 했었어요.
◆ 이성규 :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건너뛰고, 거의 검정고시를 하신 거네요?.
◇ 이소희 : 그때 검정고시 과목도 어차피 수능 과목과 비슷하니까.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수능 공부도 같이 준비를 했었어요.
◆ 이성규 : 네. 그러면서 변호사 생각을 하셨나요?
◇ 이소희 : 예. 저는 변호사 꿈을 좀.. 일찍 가졌었어요. 제가 아까 전에도 "병원을 옮겼다"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새로 옮긴 병원에 신경외과 쪽에 최고라고 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분을 보면서.. "자기 전문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게 되게 멋있구나"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 10대의 눈에는 그게 되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거를 생각을 하고 있다가, 제가 장애를 생기면서 사람들 도움을 많이 받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는 제가 그 사람들한테 갚을 수 있는 것은 "고맙다" 말 정도인 건데. 이거 말고, 좀 더 내가 받은 거를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좀 했었어요. 그래서 아까 생각했던 그 전문 분야를 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 그리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면 법률은 안 쓰이는 곳이 없으니까. 법으로 내가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 수 있겠다." 이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변호사가 되겠다 마음을 먹었었어요.
◆ 이성규 : 네 그래서 검정고시 이후에 법대를 가셨고
◇ 이소희 : 네.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갔죠.
◆ 이성규 : 그다음에 로스쿨로 가시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시고. 이제 몇 년 차 변호사예요?
◇ 이소희 : 8년 차
◆ 이성규 : 8년 차. 그 합격한 이후에 그때는 좀 뭔가 일이 잘 술술 풀렸나요?
◇ 이소희 : 아니요. 생각보다. 저도 되게.. 변호사가 되면..
◆ 이성규 : 그러니까 변호사 되면 뭔가 좀 하나 붙었고 해결했으니 그 뒤에 변호하면 돈도 벌고 풀리는 거잖아요.
◇ 이소희 : 보통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저도 좀 그럴 줄 알았어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보면 그 친구가 취업이 잘 안 돼요. 장애 때문에. 근데 저
◆ 이성규 : 경증인데
◇ 이소희 : 맞아요. 아무튼 저는 좀 다른 장애지만 저도 장애 때문이라고 저도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제가 당시에 서류에다가 원서에다가 장애 여부를 저는 항상 자소서에 썼었어요. 어쨌든 사람을 뽑는 고용주 입장에서 알고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그래서 항상 썼었는데. 저와 비슷한 스펙을 가진 친구들은 다 붙는 곳인데. 저는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장애 여부를 빼고 한번 서류를 써봤어요. 5분 뒤에 오라고 하더라고요? 면접을 그래서 갔어요. 갔는데. 그분들도 제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니 당황스럽고. 저도 그분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걸 보니 당황스럽고. 그래서 되게 좀 엉망인 면접을 하고 온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거는 안 되겠구나..", 장애를 우선 기재는 꼭 해야 되는데. 기재를 하면 사람들이 나를 안 뽑는구나 싶어서. 눈을 돌려서, 그래서 예금보험공사를 들어가게 된 거죠.
◆ 이성규 : 장애인 쪽에 알려지기에. 서초동의 편의시설이 조금 안 좋습니다.
◇ 이소희 : 그것도 맞습니다. 그것도 맞아요.
◆ 이성규 : 그거 조금 개선해야 됩니다.
◇ 이소희 : 그래서 서류를 쓸 때도 항상 그것도 다 체크를 하고 썼었어요. 내가 갈 수 있는지. 없는지.
◆ 이성규 : YTN 라디오 이성규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강한 마음의 근력을 가진 분 같아요. 이소희 변호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쯤 돼서 우리가 노래 하나 듣거든요? 어떤 노래 하나 추천해주시겠어요?
◇ 이소희 : 저는 제가 힘들 때마다 들었던 곡이 하나 있어요. 그게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라는 노래인데. 그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 저랑 인터뷰하는데.. 지금도 힘드세요?
◇ 이소희 : 아니오. 저는 너무 재밌어요.
◆ 이성규 : 꼭 그 노래를 지금 듣고 싶으세요? 허허.
◇ 이소희 : 그런데 좀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으니까. 그 친구들이 또 이 노래 들으면서 힘냈으면 좋겠어서. 추천하고 싶어요.
◆ 이성규 : 네. 이소희 변호사가 추천한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 듣고 오겠습니다. 네. 이소희 변호사가 추천한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 듣고 오셨습니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걷지 못해도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 라는 책을 통해 많은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는 이소희 변호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책을 봤는데요. 글을 직접 쓰신 거예요?
◇ 이소희 : 네. 직접 썼습니다.
◆ 이성규 : 변호사라 그런지.. 글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 이소희 : 감사합니다.
◆ 이성규 : 잘 읽었어요.
◇ 이소희 : 그 피드백이 사실 제일 좋아요. 그리고 사실 제일 많이 듣는 피드백이기도 해요. 술술 잘 읽힌다고 그래서. 제가 그걸 진짜 많이 신경 쓰고 쓰긴 했거든요. 왜냐하면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서요. 그 친구들이 많이 읽으려면 우선은 읽기 쉬워야 된다, 이 생각이 들어서. 그 무엇보다도 제일 많이 신경 썼던 부분입니다.
◆ 이성규 : 책도 쓰실 거죠? 어떤 내용으로 쓰시고 싶으세요?다
◇ 이소희 : 정치인의 인생을 쓰고 싶어요.
◆ 이성규 : 정치.
◇ 이소희 : 왜냐하면
◆ 이성규 : 의원도 하셨고. 이제 곧 국회에 가실 거고
◇ 이소희 : 그러면 제일 좋고. 또 중앙당에서 일을 한 것도 있고 해서. 지금 낸 책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정치하기 딱 이전까지만 쓴 책이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에 제 도전도 더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도 책을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 근데 지금 제가 만나서 얘기하고 있는 이소희 변호사라는 분은, 어디 뭐.. 그늘진 구석 하나도 없고. 맑고 목소리까지 저보다도 더 막 남성다운 것 같고. 그런데 슬럼프 이런 거 없었어요?
◇ 이소희 : 슬럼프는 거의 항상 있죠. 어느 순간마다.
◆ 이성규 : 항상이요?
◇ 이소희 : 네.
◆ 이성규 : 예를 들면요?
◇ 이소희 : 되게 무기력한 순간들은 무언가를 도전할 때마다 항상 찾아왔어요. 왜냐하면 자립도 해야 되고. 저도 요즘 청년들과 똑같이 대학도 가고, 취업도 했었어야 하니까. 그 하나하나 산을 다 혼자 넘었어야 되니까. 그럴 때마다 힘든 순간은 매번 있었어요.
◆ 이성규 : 그럴 때는 어떻게 했어요?
◇ 이소희 : 저는 움직이는 게 제일 베스트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니까 움직인다는 게 사실 저는 휠체어를 우선 타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힘들면. 나가서 뭐 달리기라도 하고, 산책이라도 하라고 하잖아요? 근데 되게 비관적인 생각이 들면 난 휠체어 타니까 산책도 사실 못하고, 달리기도 잘 못하는데. 막 이런 생각도 들 때도 있었어요. 근데 그런 것들을 제 스스로 대비를 해가지고 저는 글을 썼어요.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게, 어려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항상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팬과 노트를 옆에 두고 그런 내용들을 많이 썼었어요. 그래서 쓰다 보면 또 환기가 되고. 그리고 쓴 거를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생각을 했나?" 하면서 또 환기가 되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움직인다는 게. 꼭 밖에 나가거나 몸을 막 달리기를 하고 이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실제 과학적으로도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 이성규 : 변호사님이 쓰신 책 중에 코치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기 이런 게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이소희 : 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이 돼요. 좀 더 떨어져서 약간 제3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게. 저는 모든 상황이나 모든 순간들이 다 장단이 있다라고 생각이 되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장애가 된 것도, 장애가 있는 것도. 물론 잃은 게 되게 많죠.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요즘에 '원영적 사고'라고 해서. '럭키 비키라'고 하면서 오히려 좋아 되게 초긍정적 사고를 많이 얘기를 하는데. 저도 방금 얘기했던 것처럼 모든 상황에 장단이 있고. 최대한 장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많이 노력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그 코치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인식하고, 거기에 장단을 뽑아내고, 좀 장점에 초점을 맞추는 그런 걸로 썼습니다.
◆ 이성규 : 네. "상황을 크게 반전시키고 싶다면, 환경을 완전히 바꿔보라..", 그 환경을 어떻게 바꿔보신 적 있어요?
◇ 이소희 : 저는 크게 두 번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아까 얘기했듯이 19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서 경북 의성에서 대구로 자취를 시작했던 것.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사실 저는 세종시에 지금 현재 있지만. 세종시에 사무실을 내고 있지만. 세종시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새롭게 변호사로 활동을 하고자 해서 세종시로 주거지를 옮겼던 거? 이게 큰
◆ 이성규 : 근데 왜 하필 세종시로 하셨어요?
◇ 이소희 : 되게 현실적인 문제인데요. 변호사 시장이 보통 서초동에 많이 있잖아요? 근데 현재 굉장히 포화 상태라서.. 어차피 저는 혼자인 몸이니까. 전국구, 어디나 갈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디에 갈 것이냐? 라고 생각했을 때.. 세종시는 이제 만들어진 지 한 10년 좀 넘은 도시라서. "이 도시에 가면 나도 같이 성장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좀 했었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세종시의 변호사분들이 한 30분 정도 있었고. 송무를 하시는 여자 변호사님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가서 선점할 수 있겠다 이 생각을 했었거든요.
◆ 이성규 : 송무라고 함은.. 변론을 직접 하시는 것을.. 송무(訟務)라고 하는거. 법률용어죠?
◇ 이소희 : 네. 맞아요. 소송 업무를 하는
◆ 이성규 : 네. 그래서 그 적중했어요? 그 계획?
◇ 이소희 : 사실 저는 세종에 가서 적중한 것도 있고. 사실 정치 쪽으로.. 정치인의 길을 가긴 했는데. 실제로도 훨씬 더 낫긴 했었어요. 변호사 생활하기에는
◆ 이성규 : 아까 이제 밝히셨지만. 세종시에 가신 뒤에 시의회 의원도 하셨고. 지금은 이제 국회의 예비후보 1위라고 해야 되나요? 그거를? 아쉬움 속에 있는데. 근데 정치하시면서.. 뭔가 조금 인간 이소희가 바뀌던가요?
◇ 이소희 :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냥 빈말로 하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회공헌 내지는 공공선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설사 나중에 정치를 하지 않게 되더라도.. 변호사로서 계속 살게 된다 하더라도.. 제 인생에 적어도 한 귀퉁이에는 사회공헌을 하는 일을 꼭 하자. 그래서 저도 제가 좀 돈이 많아서 인권 변호사나 이런 것들로 하면 좋겠지만.. 저는 생계도 같이 해야 되는 사람이라서. 전적으로 그런 일들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뭐.. 무료 변론을 한다든지, 무료 상담을 한다든지. 그런 방향으로 꼭 사회공헌을 해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되기도 했어요.
◆ 이성규 : 사회공헌
◇ 이소희 : 제가 정치인으로서 크게 대변하고 싶은 파트가 두 분야이긴 하거든요? 한 분야가 청년이고. 한 분야가 장애인인데. 둘 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서 살아온 삶이 있고. 장애인으로 살아온 삶이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현재 힘들게 살고 있는지 너무나도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방향으로. 어떠한 정책을 써서라도. 어떠한 산업 구조를 바꿔서라도 좀 개선을 해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어요.
◆ 이성규 : 네. 청년과 장애인. 근데 지금 보면 에너지가 지치지 않는 에너지형인 것 같아요. 그게 원래 그렇게 태어나신 거예요? 아니면 살아오시면서 이렇게 변하신 거예요?
◇ 이소희 : 저는 변한 거라고 생각이 돼요.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굉장히 조용하고 말도 별로 없고 굉장히 소심했던 아이였던 걸로 제 스스로도 기억이 되거든요.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기억을 하고. 그런데 제가 사고로 장애가 있고 나서 크게 느꼈던 것 중에, "내 일상이 아무렇지 않게 무너질 수 있다" 라는 것을 의료 사고를 통해서 한 번 겪었잖아요? 그래서 그러고 나서부터는 "후회 없이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누구나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다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잖아요? 근데 저는 직접 겪어봤으니까. 그렇게 후회 없이 살겠다 마음을 먹고 나니까, 뭐든 다 도전하고 싶어지고. 그리고 도전을 해보니 많은 경험치가 내 인생을 굉장히 풍성하게 만든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에너제틱하게 살고 싶습니다.
◆ 이성규 : 얼마 전에 수능이 끝났는데요. 우리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하시면서 마무리해 주시죠.
◇ 이소희 : 저는 뭐든지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불법적인 것만 아니면. 보통은 저도 수능 공부할 때 버킷리스트를 적어가면서 했었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운전이었었는데. 그래서 수능 끝나자마자 바로 운전면허를 따고, 자유롭게 많이 다녔었어요. 그래서 뭐 운전뿐만이 아니라 저도 주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얘기하는 게 "Just Do It" 이라고 해서. 생각만 하지 말고. 아니, 생각은 오히려 금지. 생각하지 말고. 생각나는 건 그냥 바로 행동으로 옮기라고 많이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행동들 실천을 통해서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어라. 그러면 언제라도 유튜브도 할 수 있고, 책을 낼 수도 있고, 그걸로 강의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라. 이렇게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 이성규 : 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행동과 실천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이소희 변호사와 함께 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이소희 : 감사합니다.
◆ 이성규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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