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박귀빈 아나운서(이하 박귀빈):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 이후에 당시 일본에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거나 방화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그러면서 집단적 분노의 표적이 됐고 무참히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간토 대학살 사건이 올해로 101주년이 됐는데요. 이 날의 진상을 알리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지난 광복절에 개봉했습니다. 1923 간토대학살을 제작하신 김태영 감독님, 최규석 감독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두 분 어서 오세요.
◇김태영 감독(이하 김태영): 안녕하세요. 김태영 감독입니다.
◆박귀빈: 네 지금 두 분이 오셨기 때문에 한 분씩 일단 인삿말을 들어보죠. 저희 카메라도 있는데요. 편하게 카메라 보셔도 되고요. 편하게 인사 한 말씀해 주세요.
◇김태영: 만나서 반갑고 시청자 여러분들을 YTN에서 슬기롭게 만나서 더 고맙습니다.
◆박귀빈: 감사합니다. 김태영 감독님이셨고요. 또 최규석 감독님
◈최규석 감독(이하 최규석): 1923 간토대학살을 공동 연출한 최규석 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박귀빈: 짧고 굵게 한마디씩 인사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김태영 감독님의 경우는 그동안 역사나 사회 문화 관련해서 다큐멘터리 작품만 한 70편 넘게 만드셨고 최규석 감독님도 방송 경력이 20년이 넘으셨다고 하는데요. 일단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어떻게 영화를 같이 만드셨어요?
◇김태영: 저희 2004년에 저희 조감독으로 입사했어요. 근데 이제 독립 제작사다 보니까 어려울 때는 딴 회사, 좋은 회사 스카우트 돼서 나갔다가 또 회사가 좋아지면 다시 들어오고 한 두 번 그랬어요. 근데 마지막 들어올 때는 장동건의 백투더북스 방송돼서 아주 좋았는데 영국 편과 미국 편 이런 거 하면서 다시 컴백했다가 이제 이 작품을 4년 전부터 준비를 같이 했죠.
◆박귀빈: 그렇군요. 김태영 감독님의 말씀 들으니까 아니 사실 우리 직원이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그러면 회사에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괜찮으셨어요?
◇김태영: 저희는 좋을 때 부르거든요.
◆박귀빈: 아니 최규석 감독이 왜 나가셨어요?
◈최규석: 우선 감독님하고 같이 있으면 좀 재밌어요. 즐거운 게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이렇게 칭찬을 많이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저도 칭찬받으면 절로 이렇게 일이 재밌고 힘들어도 재밌게..
◆박귀빈: 근데 나가셨다면서요
◇김태영: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면 이제 나갔다가 다시 컴백
◆박귀빈: 그렇군요. 나갔다가 우리 김태영 감독님의 칭찬이 그리우면 다시 들어와서 다시 힘을 받고 어쨌든 두 분의 인연이 이런 인연으로 4년 전부터 이번에 개봉한 영화를 함께 그때부터 만들기 시작하신 건데요. 그러면 일단 이게 어떤 작품인지 좀 소개를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이 합작해서 만든 작품이고요. 앞서 제가 제목을 말씀드렸는데 1923 간토대학살입니다. 어떤 작품인가요?
◇김태영: 일본에서 시민단체 운동가의 리더 4인 그리고 한국의 근대 사진 연구가 정성규 교수 1인에서 5인에 은폐된 그다음에 일본이 철저히 숨겨오는 101년에 간토 대학살의 역사를 추적하는 추적자 이야기입니다.
◆박귀빈: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이 간토대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 게 처음인가요?
◈최규석: 네 맞습니다. 우리나라 영화 자체로 이렇게 극장 개봉까지 한 것은 저희 영화가 최초입니다.
◆박귀빈: 그렇군요. 사실은 101년 전이고 저도 영화를 봤습니다만 이게 엄청난 사건인데 그동안 왜 이것이 이렇게 작품화되면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지니까 근데 이번에 좀 최초라는 것이 조금 놀라기는 했었거든요.
◇김태영: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최초고 세계에서도 최초로 고발하는 일본의 국가범죄 101년 전의 국가범죄 제노사이드인 간토대학살을 고발하는 영화로 세계 최초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예정이 많이 돼 있어요. 프랑스 파리에 11월 29일, 12월 초에 베를린 그리고 내년 초에 아시아 그리고 또 가을에 미국의 주요 대도시의 콜롬비아, 하버드 이런 대학에서 하면서 마지막까지 유엔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최초의 국가 범죄입니다. 일본의
◆박귀빈: 그렇습니다. 세계 최초의 국가 범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101년 전에 일어났던 간토대학살. 이게 어떤 사건인지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해 주신다면요.
◈최규석: 먼저 간토 우리가 흔히 이제 관동대지진이라고 알고 있잖아요. 근데 명칭 관동이라는 것은 일본 한 일본어를 그냥 한자 음으로 읽었을 때가 관동이 되는 거고 일본 음 발음을 하면 간토입니다. 이제 간토를 왜 하냐면 이 지역에서 간토 제노사이드를 정확하게 국제 여론에 인식을 시켜줘야 될 겁니다. 그러니까 관동 대학살이라고 하면 국내에서만 알 수 있는 사건이거든요. 근데 간토 대학살이라고 해야지 간토라는 명칭이 들어가고 간토 제노사이드라고 해야지 해외에서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간토라는 명칭을 썼고요. 그리고 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발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학살 같은 경우도 1일 날 발생해서 그날 하루 만에 일어난 게 아니라 약 열흘간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박귀빈: 간토 대지진이 그 당시 규모가 7.9면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는 건데 9월 1일 1923년 9월 1일에 그 큰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고, 그때 막 엄청 많이 사람도 많이 죽고 10만 명 넘게 죽고 GDP 대비 37% 손해 있고 그런 큰 대지진이 일어나고 나서 간토대학살이 벌어진 거는 바로 직후부터인가요?
◈최규석: 네 일요일날 저녁부터 열흘간 이제 이루어졌고요. 대지진이라고 해서 대지진 혼란 속에서 그냥 조선인들을 우리 선조들을 죽였을까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제 실질적으로 보면 도쿄와 요코하마 그러니까 가나가와현이라고 하죠. 거기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그 피해가 가장 큽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떨어진 20~30km부터 심지어는 100km까지 떨어진 군마현 지역에서는 거기서도 학살이 일어났거든요. 혼조 경찰서 같은 경우에도 군마현과 바로 밀접한 곳에 있었던 곳인데 거기에서는 혼조 경찰서에서 88명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리고 학살했던 방식이나 그런 것도 굉장히 참혹하게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가 없는 톱으로 팔을 쓰든지 아이 앞에서 부모를 죽인다든지 그리고 죽이고 벚나무에 시신을 걸어둔다든지 그런 그게 굉장히 끔찍하고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굉장히 힘든 내용인데요. 그게 희생당하신 분들이 얼마나 그 공포감이 있었을까를 좀 생각해 보면 만드는 저희들도 굉장히 좀 무서울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한 번에 몰아서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라 끌고 다니다가 끌고 다니다가 기분이 나쁘다 사람 죽이고 그런 식으로 일어난 학살이기 때문에 진상에 대해서 또 더 자세하게 알리려면 이 자료가 다 일본 측에 있다 보니까 일본 정부에서부터 진상에 대해서 알리는 정보를 모든 걸 공개를 해야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박귀빈: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영화다 보니까 이제 의문이 들죠. 말씀을 듣다 보면 아니 도대체 대지진이 일어나고 나서 왜 조선인을 그렇게 대학살 했지 일본 정부는 어떤 이유로 어떤 명분으로 도대체 얼마나 피해를 입은 거야 궁금하실 텐데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취재 이야기하다 보면 아마 그 내용은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 간토대학살 사건을 영화로 다뤄야 되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김태영: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거는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진인데 조지 로스라고 하는 그 당시 영국 해군이 일본 요코하마에 구호를 위해서 혹은 조사를 위해서 왔는데 영국 재산 때문에
◆박귀빈: 지진이 일어났으니까요.
◇김태영: 대사관에 급파됐어요. 귀함이 호킨스 호였는데 거기에 전문 사진가 조지로스 중위가 있었어요. 그 조지로서가 순간적으로 학살 장면을 학살된 상황을 찍은 것이 한 장의 사진이었는데 정성길 교수라고 계명대학의 역사학과 교수가 근대사진연구가의 전문인데 그분이 저한테 맨 처음에 이거 한번 좀 추적해 보실 수 없겠습니까? 팩트를 좀 확인해 보세요라고 했는데 제가 자신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게 하다가 어느 정도 일본까지 가서 취재하다가 그 팩트가 이거 그런 사진이 아니야 하면 저희는 완전 망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최 감독은 감독님 이거 하면 우리 망해요.
◆박귀빈: 그럼 또 나가시는 거 아니에요? 또 나가시는 거잖아요.
◈최규석: 다른 데 찾아야죠.
◇김태영: 그러는데 다행히 우리가 촬영 건물로 일본의 8차에 촬영을 나갔는데 요코하마 도시발전 기념관에 유시다 리치도 박사가 일본의 이 간토의 지진 상황에 모든 사진을 박사로서 했던 그분의 사진을 확인해 주셨어요. 이 사진은 본인도 처음으로 보는 귀중한 사진이다. 이게 영국 외국인이 찍은 사진 맞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게 어떻게 맞습니까 했더니 저희가 갖고 갔던 게 그 당시에는 복사본이 아니라 사진 앨범과 같이 원본을 가져 갔거든요. 마지막에 이게 안 될 것 같아서 원본을 가져왔는데 그분이 확인해 주셨습니다. 근데 이 사진은 일본에서 개봉할 때는 삭제해야 됩니다. 삭제 요구하는 게 몇 개 있어요.
◆박귀빈: 그렇군요. 사진 한 장에서 이제 시작됐다라고 하셨는데 제작 과정에서 그동안 간토 대학살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공개되고 그런 내용이 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금 자료들도 많이 갖고 오셨는데요. 사진도 갖고 오시고 말씀 중간중간에 다 보여주시면서 하셔도 돼요. 저희 보이는 라디오니깐요. 청취자 여러분 YTN 라디오 유튜브로 지금 라디오를 보면서 이제 들으시는 분들은 자료들도 좀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취재를 많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직접 이 사건 취재하시면서 이제 알게 된 것들 이제 하나씩 좀 알려주실까요? 일단 당시에 일본인들은 왜 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원인을 알게 되셨어요?
◇김태영: 일왕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내각이 일왕을 내세워서 일왕의 계엄령을 받아냈어요. 근데 그 계엄령을 받으려면 자문기관의 승인이 거쳐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다이렉트로 일왕한테 지진이 일어났으니까 급합니다. 이게 조선인이 3.1운동 이후에 뭐 뭐 뭐 뭐 할 것 같습니다. 폭동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라고 건의를 해서 일왕에 비상대권이었는데 그 당시 지진이니까 그때 일왕이 계엄령을 승인했습니다. 그 승인하자마자 이제 상황이 민간인인데도 불구하고 조선 민간인과 계엄군대와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거죠. 그래서 군대가 먼저 이제 기관총을 학살하기 시작하고 여기서 200명 여기서 500명 하기 시작하면서 경찰을 또 해서 경찰로 유언비어 다 조작을 하고 가짜 뉴스를 만들고 폭동했다. 그리고 저 요코하마에 저쪽에서 조선인이 몰려온다 습격해 온다 그래서 자기네 민간인인데 자기네 소대가 천 명이 전멸했다. 뭐 이런 유언비어까지 하면서 학살을 했습니다.
◆박귀빈: 최규석 감독님 그러니까 이 학살하는 데에 일반 시민들도 참여를 하게 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자경단이 그렇다면서요. 일반 주민들이 우리 스스로 지켜야 돼 하면서 해서 같이 학살에 참여하고 그게 그러면 유언비어나 이런 것 때문에 발동을 한 거예요?
◈최규석: 유언비어뿐만 아니라 이첩이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에서 자경단을 조직해서 조선인들이 매우 위험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경단을 조직해서 마을을 지켜라.
◆박귀빈: 자경단 조직 자체도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군요?
◈최규석: 네. 그래서 이첩이 상대적으로 이첩에 대한 것은 사이타마현하고 지금 후지오카 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에 있습니다. 이 그 문서들도 사실 굉장히 오래됐기 때문에 그들 지자체에서 보관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다 그냥 없어지고 그러지만
◇김태영: 없애려고 했습니다. 없애라고 했는데 저희가 후지오카에서 최규석 감독이 처음으로 취재를 했어요.
◈최규석: 그러니까 저희 이제 이렇게 번역도 해 주시고 저희 많이 도움을 주시는 무라야마 도시오 일본 선생님이 계신데요. 시민모임 독립의 회원이시도 하신데 그분께서 이제 제보를 해 주셨어요. 이제 후지오카 역사 후지오카 시청 공무원 노조에 계신 분이 사쿠라이 선생님께서 그걸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그것도 시청에서 이전 공사를 하는데 40년 전에 이전 공사를 하는데 그 자료를 불태우려고 하는 순간 저건 좀 중요한 것 같은데 왜 없앨까라고 해서 그걸 보관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그걸 갖고서 보관한다고 해서 바로 저희도 이제 연락을 드렸죠. 근데 저희가 연락하기 한 3일인가 며칠 전에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래서 유가족분들은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이렇게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자료에 대해서 한국에서 찾으러 왔다는 점 자체가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어요.
◆박귀빈: 사실 이 사건에 대해서 지금 일본 정부는 다 인정 안 하고 부인하고 이런 일 없다 자료 없다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이제 영화를 보면 일본 정치인 시민단체 관계자 학살 피해자 유족해서 실제 일본인들도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실 것 같아요. 가슴에 느껴졌던 점.
◇김태영: 감성적으로 느끼면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의 42년간 끌고 왔던 봉선화가 80년대 마지막 목격자 마지막 체험자의 증언을 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젊은 세대 20대 그다음에 대학생들 그다음에 아주머니들한테 자기가 이 얘기를 마지막 들은 세대이기 때문에 80년대 이거를 내가 현장에서 증언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이 온몸으로 증언을 하겠다 그 당시 생활을 증언하겠다 하면서 42년 동안 봉사를 해서 아무 조건도 없이 몸 다 망가지면서 결혼도 못하면서 지금까지 지켰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감동을 받았고요.
◆박귀빈: 학살 현장에 가셔서 직접 젊은인들을 데리고가면서 다 그 당시 이야기를 해 주세요. 본인이 직접 들은 이야기를
◇김태영: 소피아 대학 학생들 뭐 이런 데도 많이 하는데 거꾸로 정치인들은 어떻게 했을까라고 했는데 정치인들도 야당의 자민당이 아닌 야당의 정치인들 중에서 이 간토 대학살이 가장 핫이슈입니다. 한국과 풀어야 할 첫 번째 문제가 간토 대학살의 진상 규명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데 야당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중에 특히 입헌민주당의 스기오 히데야 의원님이 국회 내각위원회에서 그걸 추궁을 합니다. 장관들한테 왜 진상규명 안 하냐 왜 그리고 자료가 있는데도 자료가 이렇게 있는데도 안 하느냐 하는데 국방장관과 경찰청 장관은 똑같은 얘기로 말만 바꿔서 그 자료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사실관계가 파악이 되더라도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더 이상 조사를 할 생각이 없다 이런 식으로 가는데 이렇게 자민당 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인들은 지난해 또 야당 여의원이 100년 촛불집회를 했어요.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기에서 강경하게 이거는 일본의 부끄러움이다. 이웃 사람에게 향한 국가 범죄다. 민간인에게 이거는 꼭 해명을 하고 그다음에 한일 간의 문제를 풀어야 된다 이랬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감동적이더라고요.
◆박귀빈: 맞습니다. 사실 이 간토대학살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위령제라든가 추모제라든가 열리고 일본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오신 걸 좀 소개를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최규석: 네네 이거 넋전은 이제 작년이 저희 100년이 되는 날이었고요. 그때 이제 아라카와 강변 도쿄 스미다부에 있는 아라카와 강변이 학살이 일어났던 장소 중에 한 곳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한국에서 한국 1913 한일 추모사업단 함인숙 대표님이 한국식 장례식을 치러주기 위해서 상여나 그런 것을 한국에서 다 가지고 갔어요. 그래서 공주 본영리 상소리 어르신들도 다 이렇게 자비로 이렇게 내주셔서 거기 가서 한국식 장례식을 치러지면서 이 만들어진 넋전을 6,661개를
◆박귀빈: 피해자 지금 숫자로 추정되는
◈최규석: 넋전들을 강변에다 쭉 걸어놨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고요. 거기에서 이제 그들을 위한 장례식을 치러줬는데 하여튼 의미가 굉장히 컸어요.
◆박귀빈: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라디오로 보시는 분은 좀 의미를 되새기면서 보셨으면 좋겠고 김태영 감독님 이번 영화를 보시면서 우리 영화 보시는 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보셨으면 좋겠다 이런 메시지는 내가 꼭 전하고 싶었다 하시는 거 있으면 끝으로 한 말씀 해주세요.
◇김태영: 우리가 이 부끄러운 그다음에 일본의 이 치욕적인 이것을 반일의 문제가 아니라 좌우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대한민국 국민은 꼭 봐야 되는 첫 번째 그날 1923 간토대학살입니다. 꼭 좀 오셔서 보시고 자녀들에게 12세 관람가이기 때문에 좀 같이 가족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귀빈: 네 1923 간토 대학살 영화 여러분 꼭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영화 만드신 두 분입니다. 김태영 감독, 최규석 감독 두 분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