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4년 4월 7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김동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성규 : 오늘 모실 분은 사진으로 독립운동의 사적지와 그곳에 살고 계신 후손들을 기록하는 분입니다.김동웅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동우 : 안녕하세요.
◆ 이성규 : 독립운동 흔적을 사진으로 찍으신다고요?
◇ 김동우 : 지난 한 2017년부터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제가 지금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죠. 그래서 한 10개국 정도 다녀본 것 같습니다.
◆ 이성규 : 10개국 정도. 주로 어디에 분포돼 있죠?
◇ 김동우 : 중국이 제일 많고요. 근데 제가 이거를 찾아다녀보니까, 보통 흔히 이제 교과서에서 연해주, 만주, 상해 이 정도 얘기하잖아요? 우리 독립운동하면. 저도 이제 그 정도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북방의 아주 넓은 지역에. 다양한 지역에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런 사적지들이 많이 분포돼 있더라. 그래서 그것들을 지금 기록하는 중입니다.
◆ 이성규 : 제가 이제 봉사활동 때문에 몽골을 갔더니, 몽골 쪽에도 있더라고요.
◇ 김동우 : 예. 울란바트로에 있습니다. 이태준 선생님이라고. 의사였는데. 몽골에 와가지고 이제 의사 활동하시다가. 그런데 이제 그분이 이제 독립운동 때문에 거기 가신 거거든요. 근데 거기서 또 죽게 되죠.
◆ 이성규 : 그래서 이제 누가 또 내몽골 다녀온 사람이 그러는데. 그 쪽에 그 한때는 또 이렇게 비석도 세우고, 이런 게 다 훼손돼서 개울에 박혀 있고 이런 게 막 너무 많아서, 가슴 아프다고 그러더라고요.
◇ 김동우 : 거기도 우리가 저기 농장 같은 거를 하면서 독립 자원도 대고, 독립운동 기지도 하려고 했던 이제 그런 흔적들이 남은 곳이거든요. 이제 기록을 제대로 안 해놓고, 거기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니까 방치돼 있고, 막 없어지고. 막 그런 현상들이 많이 있죠.
◆ 이성규 : 근데 우리 김동우 작가님은 원래는 취재하는 기자님이셨다면서요?
◇ 김동우 : 네, 신문사 이제 다니다가요. 제가 문득 제 꿈과 행복이 회사에 없다는 걸 느끼고 이제 퇴사를 하고,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좀 해보자 해서 이제 이런 활동을 지금 하고 있는 거죠.
◆ 이성규 : 근데 몇 년이나 기자 하셨어요?
◇ 김동우 : 제가 한 7~8년 했던 것 같습니다.
◆ 이성규 : 그런데 지금 사실은 그 때 그 경력이 사적지를 찾아서 막 다니시고 이러는 데도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김동우 : 많이 됐죠. 그러니까 취재를 해본 경험이 없으면 제가 어디로 찾아와서, 어디다 물어야 되고, 이런 것들을 방향을 못 잡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도움이 됐습니다.
◆ 이성규 : 근데 이제 제가 어디서 읽었더니요. 우리 김동우 작가님께서 지금은 이제 사진 작가잖아요? 근데 카메라를 캐논 이런 거 안 쓰신다고 그러더라고요?
◇ 김동우 : 네 저 1번 카메라 안 씁니다.
◆ 이성규 : 아니 뭐 카메라 제품이 좋으면. 그걸 갖고 더 많은 사진을 찍으시면 될텐데. 그 소신이 있으세요?
◇ 김동우 : 사실 일본 카메라가 가성비가 제일 좋죠. 싸고 성능이 제일 좋은데요. 제가 우연치 않게 일본 카메라가 아닌 걸로 이제 시작을 했는데. 그 소신을 계속 지금 지키고 있는 이유는 제가 다니는 지역들 중에 독립운동가들 묘소가 많아요. 그 국외에 지금 이제 아직도 지금 잠들어 계신 분들을 찾아다니는데, 제가 어떻게 일본하고 싸운 분들의 묘소를. 전범 기업이 하는 카메라 회사의 브랜드를 가져가서 그걸 기록한다? 이거 좀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이제 그 카메라를 들고, 일본 카메라를 들고 가서 찍으면. 그 분들이 지하에서 되게 저한테 뭐라고 하실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 소신을 지금까지 계속 지키고 있습니다.
◆ 이성규 : 영혼의 접합이 잘 안 되는군요.
◇ 김동우 : 그럼요. 뭐라고 하실 것 같아요. 꿈에 나올 것 같고, 막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 이성규 : 그럼 주로 어떤 카메라 쓰세요?
◇ 김동우 : 그래서 처음에는 라이카라는 브랜드로 지금 사용을 했었고요. 이게 독일 거거든요? 근데 지금은 이제 스웨덴 브랜드인 '핫셀블라드'라는 이제 브랜드를 쓰고 있습니다.
◆ 이성규 : 네 아까 한 10개국 정도를 가셨다고 그러는데. 기자를 하셔서 잘 찾으실 것도 같지만. 그게 또 용이할 것만 같지 않거든요. 그 나라에 가서 어떻게 찾아내요? 그 사적지를?
◇ 김동우 :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이게 뭐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에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정리해 놓긴 했는데. 제가 이제 그 자료를 많이 이제 바탕으로 해서 이제 찾아다녀봤는데요. 거기에 나와 있는 그 주소나, 지도에 이렇게 찍어놓은 포인트들이 정확하지 않은 것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가면 아니고, 뭐 또 다른 곳도 이렇게 찾아가 봐서 "여긴 맞겠지?" 하고 가보면 또 아니고. 그래서 지금은 가기 전에 아예 구글맵에다가 자료들을 되게 많이 취합해서, "아, 여기구나" 해서 딱 포인트를 찍어놓고 이제 시작을 하죠. 그래서 이제 또 독립기념관 자료 같은 경우에는 독립운동만 기록해 놓기 때문에. 이주사와 관련된 자료들은 많이 빠져 있거든요. 그리고 강제 징용과 관련된 그런 현장도 빠져 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취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전에 가기 전에 공부를 많이 하고, 그 다음에 어느 정도 자료 정리가 되면, 이제 현장에 가서 이제 작업을 하는 거죠.
◆ 이성규 : 그 비문 같은 것도 보시나요?
◇ 김동우 : 예. 가서 이제 다 기록을 해서, 또 잘 안 보이는 것들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 일단 기록은 다 해놔야 될 거잖아요?
◆ 이성규 : 기록들은 주로 한글로 돼 있나요? 한자가 많나요?
◇ 김동우 : 섞여 있습니다.
◆ 이성규 : 그 한자 판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 김동우 : 그러니까요. 저도 옛날 사람이 아니라서 한자가 뜨문뜨문한데. 그거 갖고 와서 이제 옥편 펴놓고 이제 읽어보기도 하고. 그런데 잘 안 보이는 것들도 있어요. 그런 것들은 또 탁본을 떠야 되는데. 떠놓은 자료들이 있는지, 또 찾아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이성규 : 진짜 복합적인 작업이네요.
◇ 김동우 : 사전 조사도 해야 되고 또 현장에 찾아가기가 또 쉽지 않잖아요? 하와이의 깊은 산속이나 이런 데들 사적지가 아직 남아 있는 것들 찾아가서, 거기까지 가기가 또 힘들죠. 멕시코, 쿠바도 다녀왔는데. 우리 <애니깽>이라는 그런 옛날 또 영화도 있었잖아요? 그 분들 <애니깽> 밭에 가서 일하시다가, 이제 그 돈 모아서 멕시코에다 또 우리 독립군 양성학교를 만들어요. 그런 역사 현장들 뭐 이렇게 이제 찾아가려면 찾아가는 게 일이죠. 셔터를 누르는 거는, 찾아가는 그 노력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또 가서 셔터를 누를 때도 어떻게 이 분들한테 누가 되지 않고,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건지 또 고민스럽고. 후반 작업도 오래 걸리죠.
◆ 이성규 : 여러 사적지를 다니시다가 막 힘들여서 딱 찾으셨어요! 그 느낌이 어땠어요?
◇ 김동우 : 무덤 찾기가 제일 좀 힘든 경우들이 많았어요.
◆ 이성규 : 막 수풀에 이렇게 막 쌓여 있고, 이런 경우도 많을 거 아니에요?
◇ 김동우 : 그런 경우도 있었고요. 아주 큰 공동묘지 안에 한글로 되어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고 그러는데. 그게 독립운동가 묘지예요. 그런데 정확하게 그 넓은 지역 어디에 있다고 나온 자료는 그렇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대략적으로 좀 후손분 찾아가서 약도로라도 좀 그려달라 해서 이제 그 약도를 보고 이렇게 막 헤매다가, 한글을 딱 만났을 때. 너무 이상한 거죠.
◆ 이성규 : 기분이
◇ 김동우 : 그 멕시코 땅 한가운데 한글로 된 비석이 딱 있는데. 한자와 섞여 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죠.
◆ 이성규 :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갈 것 같네요.
◇ 김동우 : 하와이 같은 경우에 이제 우리가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한 7,300명 정도의 한국 사람들이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넘어가게 되는데요. 곳곳에 버려져 있어요. 방치돼 있고요. 우리 한국인들의 무덤이. 그런데 이제 최근에 빅아일랜드의 알라의 공동묘지라는 곳에 150개 정도의 한국 사람들의 무덤이 있거든요. 근데 이제 그 무덤들을 이제 학술팀이 들어가서 연구 조사를 해보니까, 최근에 밝혀진 이제 연구 조사거든요. 안중근 의사한테 의연금을 보내신 분들이 50명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그러니까 연구를 하면, 그렇게 학자들이 연구를 하면, 새로운 사실들이 그렇게 계속 나오고 있거든요.
◆ 이성규 : 그런데 그분들은 사탕수수 노동자로 갔던 노동자로 가셨는데. 거기서 생긴 돈을
◇ 김동우 : 독립 자본으로 낸 거죠.
◆ 이성규 : 이게
◇ 김동우 : 그런데 한 달 월급이 그때 17불 ~ 18불 하던 시기에요. 그런데 이 분들이 낸 그 금액도 다 나와 있거든요? 1불 막 이래요. 그러면 월급의 17분의 1
◆ 이성규 : 거의 십일조네요.
◇ 김동우 : 그러니까요. 이게 작은 돈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무덤들은 계속 방치되고 있는 거죠.
◆ 이성규 : 지금 150구 이상이요. 그렇게 찍어서 내보냈는데, 메아리가 없으면 자괴감 이런 거 안 드세요?
◇ 김동우 : 관심 없어 하시는 분들이 많고 하죠. 그런데 누군가는 계속 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장을 기록하고. 계속 끊임없이 얘기를 해줘야, 사람들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더 남을 거 아니에요? 기억이란게 되게 휘발성이 강해서 누가 얘기하지 않으면 그냥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제가 해야 될 일이 이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이성규 : 기억을 되살리고. 그러면 이런 이런 스토리들이 책에 이제 다 담겨져 있는 거죠? 같이.
◇ 김동우 : 네
◆ 이성규 : 이번에 다시 한 권 내셨더라고요?
◇ 김동우 : 네. 최근에 지난 1월달에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러시아하고 네덜란드에 갔던 우리 헤이그 특사들 이야기, 그래서 그거를 이제 좀 정리를 해서요. <뭉우리돌의 들녘>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 이성규 : 뭉우리돌. 뭉우리돌이 뭐예요?
◇ 김동우 :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순 한글인데요. 이 단어가 둥글둥글하고 넙적한 돌을 얘기해요. 그런데 백범 일지에 뭉우리돌이 등장합니다.
◆ 이성규 : 그래요.
◇ 김동우 : 김구 선생님이 형무소에서 고초받을 때 순사가 지주가 전 답에서 무어리돌을 골라내는 게 상례 아니냐 그러니까. 밭을 갈다 보면 돌이 있으면 치워내야 되잖아요? 그리고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다 사회에서 솎아낸다 이제 이런 말씀을 듣고, 거기다 대고 "내가 네놈들 앞에 평생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살겠노라" 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다닌 이 우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들이 다 김구 선생님이 얘기한 그 저항 정신을 품고 있는 그런 장소 같아서 그렇게 제목을 적었습니다.
◆ 이성규 : 뭉우리돌.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유적지, 후손 이런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어요?
◇ 김동우 : 이 질문은 되게 많이 받는데요. 너무 골라내기가 힘든 질문이죠. 너무, 너무 기억에 남는 곳들이 많아서요. 그런데 지금 딱 떠오르는 것은. 만주에 가면, 이번 책에 들어가 있는 이제 중국 사진 중에 한 장인데. 태극기 동굴이라는 곳이 있어요.
◆ 이성규 : 태극기 동굴.
◇ 김동우 : 왕청현 나자구라는 곳에 가면, 한 계곡이 하나 있는데. 거기는 이제 네 발로 기어 올라가야 되거든요? 그 동굴에 가려면?
◆ 이성규 : 그렇게 슬로프가 산 중턱 자리 비
◇ 김동우 : 비탈리 아주 저기 가팔라서 올라가면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요. 거기 한자로 대한독립이라고 써 있고요. 4명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1910년대 그 지역에 서 있었던 우리 나자구 사관학교 학생들이 은신처처럼 썼던 것으로 추정만 되는 곳이에요. 그런데 이제 너무 감동스럽죠. 거기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대한독립, 그리고 4명의 이름이 딱 적혀 있는데.
◆ 이성규 : 위에 이렇게 새겨져 있어요?
◇ 김동우 : 그 동굴 벽에. 그런데 그 장소는 진짜 평생 제가 못 잊을 것 같아요. 너무 뭉클했고. "야, 이분들이 여기 이거 태극기 그리고 이름 적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죠.
◆ 이성규 : 태극기 동굴 4분 저는 이제 지금 그런 말씀 들으니까. 뤼순. 여순이라고 그러죠? 여순, 거기에 한 번 갔는데. 안중근 기념관이라고 해야 되나요? 우리 독립운동, 그 무엇들이 있더라고요?
◇ 김동우 : 네 있습니다.
◆ 이성규 : 잠깐 참배를 한 적이 있는데. 안중근 의사님 시신 문제 이런 거를 막 그 얘기를 하면서, 같이 간 동료들하고. 되게 답답했어요.
◇ 김동우 : 저도 이제 여순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이제 최근에 갔던 게 작년이었거든요? 작년에 제가 여순 감옥에서 한 1kg 남짓 떨어져 있는 한 야산을 찾아갔어요.
◆ 이성규 : 야산.
◇ 김동우 : 거기가 어떤 장소냐면 예전에 여순 감옥에서 사형수들이 죽으면 그 사형수들을 묻었던 장소인 거예요.
◆ 이성규 : 그 통
◇ 김동우 : 맞습니다.
◆ 이성규 : 네 봤어요.
◇ 김동우 : 또 동그란 통에다 사형수를 넣어서 이제 묻었거든요.
◆ 이성규 : 우그려서 넣어야 들어갈 통이더군요. 크기가.
◇ 김동우 : 시체를 접어서 넣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 장소에 안중근 의사가 묻혀 있을 것으로 강력하게 되는 추정이 되는 곳이죠. 이제 근데 안중근 의사는 다행스럽게도 예전에 소나무 관으로 이렇게 관을 짜줬대요. 그 흰 천으로 이렇게 덮어서.
◆ 이성규 : 어떤 의미일까요?
◇ 김동우 :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 안중근 의사의 품행이나, 행실이나, 그 다음에 그 학식에 되게 높은 존경을 많이 표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안중근 의사는 관을 짜줬기 때문에. 거기를 좀 저는 유해 발굴해보면.
◆ 이성규 : 나오지 않을까요?
◇ 김동우 : 아, 나올 것 같은데. 이게 안중근 의사 고향이 또 북한이었고, 남북관계 문제도 있고, 우리가 또 중국하고의 관계도 있고, 이런 것들이 잘 풀려서 좀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 이성규 : 빨리 그런 날이 또 더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답답한데. 노래하나 듣고 갑시다. 예. 어떤 노래 추천하시겠습니까?
◇ 김동우 : 오늘 독립운동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대한이 살았다> 이 노래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 누구 노래였죠?
◇ 김동우 : 가수 박정현 선생님.
◆ 이성규 : 김동우 작가께서 추천하신 박정현의 <대한이 살았다> 듣고 오시겠습니다. 네. 박정현의 <대한이 살았다> 듣고 오셨습니다. 김동우 작가님은 독립운동가 후손은 아니죠?
◇ 김동우 : 아닙니다.
◆ 이성규 : 집안일 하는 건 아니죠. 그런데 이 후손분들이 김 작가님이 딱 가잖아요. 가서 나 어떠어떠한 작가다 그러면서 접근하면. 반응이 어때요?
◇ 김동우 : 기억에 남는 분이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 막내 아들님이 살아계셨거든요? 제가 만났을 때는.
◆ 이성규 : 어디 사세요?
◇ 김동우 : LA.
◆ 이성규 : LA.
◇ 김동우 : 그런데 이제 연락을 해서 제가 선생님 만나뵙고 좀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코리아타운의 어떤 한국 식당으로 오라는 거예요. 일단 미팅을 하자 했더니, 갈비탕 사주시면서. "너, 도대체 무슨 돈으로 이런 일을 하고 다니냐?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너무 놀랍다." 그래서 "우리 집이 LA 외곽인데 너 올 수 있겠냐? 차도 없다며?", "우버 타고 가면 됩니다." 그러면서 막 서로 웃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너무 반가워해 주시고. 왜냐면 독립운동 후손이라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 이성규 : 그렇죠
◇ 김동우 : 그리고 너무 반가워해 주세요. 그러면서 막 그 할아버지 때 얘기. 아버지 때 얘기. 막 이렇게 해 주시는 게 눈물 글썽글썽하시면서 그렇게 들었다. 그런 기억이 있다. 너무 얘기하고 싶어 하시고. 본인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는 거에 오히려 감동하시죠.
◆ 이성규 : 네. 그런데 저도 궁금한데요. 우버도 돈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 경비는 어떻게 충당하세요?
◇ 김동우 : 제일 이제 이게 큰 문제인데. 처음에는 제가 이제 뭐 집 판 돈으로 계속 했었고요.
◆ 이성규 : 집을 파셨어요?
◇ 김동우 : 예. 그래서 이제 나중에는 안 되겠다. 이렇게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고. 책도 쓰고, 천천히 하자 그래서. 1년에 프로젝트 하나씩. 어떤 해당 나라 정해서. 그렇게 해서 책 쓰고 그러면서 천천히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이런 것들을 지원해주면 좋겠으나. 아직까지는 이 아카이빙 하고 이거를 기록해야 된다는 거에 대해서 그렇게 인식들이 많이 이렇게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그냥 냅둘 수는 없고요. 이렇게 막 사라져가고. 뭐, 그런 것들이 당장 있는데. 그래서 이준 열사 기념관. 헤이그에 있는. 그것도 우리나라 정부에서 갖고 있는 건물이 아니에요. 네덜란드에서 활동하시던 교민분이 자비로 사서, 지금까지 오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런 현장들이 아직은 많다는 게, 조금 우리가 아직 가야 될 길이 멀구나.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죠.
◆ 이성규 : 우리가 국내에 애국자도 많고. 또 그쪽에 관심 있는 분들도 많고 한데. 아직도 이렇게 그림자진 데가 있군요.
◇ 김동우 : 그럼요. 그래서 저 마음 같아서는 중국에 있는 현장은 우리 정부에서 매입하기가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제 미국 땅에 있는 이제 현장들은 우리 정부에서 조금 예산 투입하면. 매입해서 여러 가지 이제 뭐 기념관이나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미국에 있는 것들만이라도 좀 이렇게 구입해서.
◆ 이성규 : 아까 말씀하신 그 하와이 159.
◇ 김동우 : 예. 그런 것들도 해당이 되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 다시 그 작품 얘기로 돌아가서요. 책을 제가 훑어보니까. 사진들이 주로 선명하지 않고, 약간 좀 흐릿한 느낌이 들었는데. 옛날 기억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하신 거예요? 왜 선명하지 않을까요?
◇ 김동우 : 네.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제가 인물 사진을 현장에서 선명하게 안 찍고, 약간 이렇게 반투명하게 찍어내거든요. 그 이유는 사진을 통해서 이 역사를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그 방식의 이제 일환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역사, 흐릿흐릿해지는 기억. 그리고 그러면 안 된다는 제 뜻이 거기 같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인 거죠. 그래서 인물 사진을 주로 현장에서 그렇게 저는 흐릿하게 찍어내고 있습니다.
◆ 이성규 :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의 수준과 이러면 안 된다는 의지의 표현이 융합된 거네요? 그런데 한 번은 또 중국에서 공안한테 붙잡혀 갖고, 조사받고. 무덤 찍다가 공동 묘지 안에 갇힌 적도 있고. 별별 일화가 다 있을텐데. 그것 좀 얘기 좀 해주세요.
◇ 김동우 : 일화들이 너무 많이 생기죠. 중국 저기 하얼빈에서 이제 올 하얼빈에서 차를 한 대 이제 빌렸습니다. 이제 저기 가이드분한테 차를 한 대 갖고 와라. 한국말 할 수 있는 가이드분한테 그래서 나랑 동행하자. 2박 3일만 해가지고. 이제 비용을 들이고 같이 어디로 갔냐면, 하얼빈에서 1박 2일을 이제 차를 달려서 최북단까지 올라갔어요. 만주 최북단까지. 거기에 가면, 예전에 우리 배달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터가 남아 있거든요.
◆ 이성규 : 배달의 민족이 살던 터가요.
◇ 김동우 : 예. 배달촌. 그래서 거기를 한번 가보고 싶어서 이제 갔다가. 거기가 이제 아무르강. 러시아에서 얘기하는. 그리고 중국에서 흑룡강. 거기까지 가야 돼요. 그럼 바로 이제 강 넘으면 러시아거든요? 국경이다 보니까. 이제 거기 조선족 할머니가 딱 한 분 살고 계시대요. 한국말 할 수 있는 그래서 이제 그 분하고 이제 막 얘기를 하고 있는데. 찾아가서 만나뵙고. 그런데 그 분의 딸이 온 거예요. "당신은 누구냐? 왜 와서 저희 어머니한테 이런 거 물어보냐?" 공안한테 신고를 한 거예요. 그래서 공안이 집에 들이닥쳤어요. 그래서 다 이제 가이드랑 저랑 다 이제 파출소 같은 데 잡혀간 거죠. 그런데 뭐 바로 조사하고 뭐 이렇게 풀어주는 건 상관없는데, 담당자가 또 옆 동네에서 와야 된대요. 또 한참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와가지고 이제 뭐 한국 사람을 처음 본다니까. 담당자가 뭐 이렇게 빨리 조사하고 보내주면 되는데. "당신 신발 신고 있는 거, 이건 어디 거야? 가방은 어디 거야?" 뭐, 이런 이런 것만 묻고 있는 거예요. 신기해가지고. 그래서 촬영 시간은 촉박하고 한데. 그냥 시간만 날리고, 촬영 제대로 못하고. 다음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막 촬영하고 했던 기억이 있죠.
◆ 이성규 : 참 공동묘지에 갇혀 갖고는 어떻게 했어요?
◇ 김동우 : 그거는요. 멕시코 갔을 땐데. 우리나라 공동묘지는 뭐 이렇게 담이 없잖아요? 그걸 찍다가 이제 적당하게 봐서 이제 나오면 되는데. 거기는 다 이렇게 담이 있고, 문을 닫더라고요. 일몰 이후에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좀 약간 일몰 이후에 그 어스룩한 그 빛도 담고 싶어서 그냥 정신없이 찍고 있었죠. 그래서 해 넘어가고 이제 오싹해지니까, 이제 그만 나가야 되겠다 해서 가보니까. 굵은 철 사슬로 문을 잠가놨더라고요. 담은 막 한 3M 이렇게 되고. 그래서 뒷문이 어디 없나 해서 이렇게 이렇게 뒷문까지 가봤어요. 너무 큰 데거든요. 그래서 한참 걸어가고 10분 걸어서 뒷문을 가보니까, 또 뒷문도 잠겨 있더라고요. "이거는 방법 없다. 담을 넘어야지." 그래서 이제 장비 다 이제 넣어가지고 안전하게 맨 다음에 그 문이 한 3~4m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심조심해서 이제 담 넘었던 기억도 있죠.
◆ 이성규 : 그런데 이제 아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좀 지치지 않으세요? 지금 일하시다가.
◇ 김동우 : 지침이 좀 올 때가 있죠. 그래서 허탈하고 좀 힘 빠질 때가 있습니다. 뭔가 이렇게 제가 이거를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는 건 아닌데. 뭘 알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조금 이렇게 큰 지원도 아니에요. 뭐, 이렇게 행정적인 처리 같은 것들을 정부한테 좀 부탁했을 때. 그런 것들이 좀 원활하게 잘 협조가 돼서 되면 좋은데요. 그런 것들이 잘 안 될 때는 조금 힘이 좀 빠질 때가 있죠.
◆ 이성규 : 그러니까 뭐 행정적인 지원이라는 게. 예를 들면, 어느 나라에 뭔가를 좀 가고 싶고 그럴 때. 외교부나 이런 쪽이 같이 움직여준다거나 뭐 그런 요청인가요?
◇ 김동우 :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에요.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 무슨 특혜도 아닌 것 같고. 특혜라고 하고. 그런 여기서 이 자리에서 제가 구체적으로 다 말씀드리기는 좀 뭐하지만. 제가 좀 속상한 경험들이 좀 있죠.
◆ 이성규 : 앞으로 이제 또 지금까지 사적지를 찍으셨는데. 또 다른 작품에 대해서 관심 갖는 경우도 있을까요?
◇ 김동우 : 네. 주로 관심 가는 건 사적지인데요. 조금 다른 종류의 사적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이제 겨울부터 올 초까지 제가 대마도, 북해도. 그 다음에 규슈 지역을 좀 다녀왔어요. 우리 강제징용과 관련된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이제 뭐 조선시대부터 해서 이렇게 쭉 한번 풀어보려고 현장들을 좀 다녀봤는데요. 이제 일본 쪽에 남아 있는 이제 사적지들을 조금 기록해 볼까 지금 생각 중입니다.
◆ 이성규 :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떻게 이런 부분들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잘 헤쳐나갈까 하는 관점에서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 김동우 : 이게 나라가 없어졌기 때문에 분명 우리 조상들이 실패한 역사를 썼지만. 근데 제가 다녀본 현장들은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역사를. 그리고 우리 민족을. 근데 이것들이 계속 우리한테 회자 되려면, 기억에서 기억으로 계속 연결돼야 되거든요. 그래서 3.1절, 8.15 때만 우리가 기릴게 아니고요. 항시 내가 여행 다니는 나라에 우리와 관련된 것들이 없는지 꼭 한번 찾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있거든요. 그렇게 해서 현장에서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 역사를 되새김질을 하다 보면, 이 역사가 계속 또 이어지면서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그런 동질성을 가지면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성규 : 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독립운동의 흔적을 쫓는 김동우 사진작가와 함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법에 대해서 얘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김동우 : 감사합니다.
◆ 이성규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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