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3년 12월 10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나재필 전 충청투데이 기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27년간 기자생활을 했던 그는 편집의 고수였습니다.짧지만 울림이 강한 제목으로 한국 편집상과 사진 편집상도 받았는데요.평생 팬떼를 잡으며 편집국장과 논설위원까지 올랐던 그가 이제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한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나의 막노동 일지의 저자 나재필 전 기자 오늘의 주인공으로 모셨습니다.안녕하세.
◆ 나재필 전 충청투데이 기자(이하 나재필)> 네 안녕하세요.
◇ 이성규> 나의 막노동일지 제목 그대로 막노동하면서 하루하루 떠올린 생각 느낌 이런 것들을 정리한 책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맞습니까?
◆ 나재필>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막노동 흔히들 좀 노가다라고 하는데요.그 노가다라는 말은 일본어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만 쓰겠습니다.근데 그곳에서 실제 일하다 보니까 좀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엄마 손 잡고 어렸을 때 이렇게 지나가면서 공부 안 하면 저런 식으로 산다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노동자들이고요.과연 그 인식이 맞을까? 실제로 경험을 하면서 그런 인식 자체가 약간 삐뚤어진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고요.그래서 좀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하루하루 땀 흘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노동의 가치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좀 알려주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외양만 보고 우리가 사람을 척도를 따지는 건 아닌가 그 내면에 있는 그 속살도 진정으로 바라봐야 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메모를 하기 시작했고요.그거를 인터넷 언론으로 이제 하나씩 전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그게 30편의 기획 시리즈로 완성이 됐고요.
◆ 나재필> 뜻하지 않게 책으로 엮게 됐습니다. 저한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 이성규> 출판사에서 그걸 본 거예요.
◆ 나재필> 출판사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줬고요. 처음에는 155만 명 정도 건설 노동자가 있는데 20년 30년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오신 분이 있는데 1년도 채 안 된 제가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한다든지 한다는 게 약간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고는 싶다 그런 생각에 용기 내서 출판하게 됐습니다.
◇ 이성규> 근데 그 글을 하루하루 써서 올린다는 게 보낸다는 게 일하고 나면 피곤하실 텐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네요.
◆ 나재필> 퇴근해서는 거의 초죽음이었고요. 쉬는 시간 틈틈이 핸드폰 애플 메모 앱을 통해서 틈틈이 기록을 해 나갔죠.그거를 주말에 한 편으로 이제 정리를 해서 전송을 하게 됐고요.
◇ 이성규> 27년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드렸는데 기자로 잘 나가시다가 주로 서울 대전 이쪽에서 기자 생활을 하셨더라고요.그런데 갑자기 그 일을 그만두신 이유가 있나요?
◆ 나재필> 누구나 퇴직의 변은 많을 겁니다. 직장 상사와 동료의 문제, 월급의 많고 적음의 문제 직장의 미래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지금 마지못해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갈등이 많을 텐데요.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이것 말고도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리고 한편으로는 항상 가슴에 사표를 좀 들고 다닐 정도로 기자생활 30년 가까이 하다 보니까 약간 타성에 젖은 면도 있었고요.어느 순간 좀 내려놓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퇴까지는 10년도 채 안 남았는데 조금 더 빨리 은퇴하는 그런 거니까요.미련 없이 내려놨고요. 당시 마지막에 신문사 간부 시절에는 거의 1인 7역을 했습니다.편집도 하고 데스크도 하고 논설도 쓰고 회사 돈 되는 경영에도 좀 참여를 했거든요.그러니까 회사 인간 좀 일하는 그런 거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았고요.그런 모든 것들이 사표를 내게 된 조금 이른 나이에 사표를 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 이성규> 요즘 젊은 친구들 저희 학교 졸업한 애들 여기저기 취업한 이후에도
참석자 3 네
◇ 이성규> 찾아와서 아름다운 사표 행위 뭐 이런 걸 얘기를 많이 해요.자기들은 그거하고는 좀 많이 갑이 다르네요.
◆ 나재필> 제 생각에는 아름다운 사표라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진짜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오는 몸부림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아름다운 사표는 조금 낭만적인 서사가 아닐까 싶습.
◇ 이성규> 일단 30명 가까이 기자 하셨다고 그랬는데 그동안에 그래도 기억나는 내가 쓴 기사 중에 이것이 기억난다 하는 게 좀 있습니까?
◆ 나재필> 저는 낮에 필의 필이라 그래서요.
◇ 이성규> 낮에 필의 필 느낌 느낌
◆ 나재필> 그래서 그 전문 인터뷰를 한동안 진행했었어요. 그 지역의 유명 인사나 연예인, 경제인, 과학자 각 분야의 전문가들하고 인터뷰를 좀 많이 했는데요.그 인터뷰 기사들의 반영이 괜찮았고 좋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있습니다.한 독자인데요. 출근했더니 50대 후반에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그 사연을 들어보니까 좀 삶이 좀 막막하다. 그래서 생애 끈을 놓으려고 했던 순간에 제가 쓴 칼럼을 읽고 다시 살아볼 용기가 생겼다고 하더라고요.저는 그 떨리던 여성의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요.저의 글이 한 사람도 살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석자 3 예 예.
◆ 나재필> 글이라는 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무기라고 생각하거든요.그때 그 기억이 가장 강렬했고요. 기자든 정치인이든 유명인이든 사실은 완장만 떼면 바로 이웃 사람이잖아요.그냥 일반인이 되는 거기 때문에 기자로 살아왔다고 해서 뭐 벼슬이 결코 아니고요.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주변과 공생하고 상생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기자 생활을 통해서 많이 느꼈습니다.
◇ 이성규> 퇴직을 하시고 그 후에 한식 조리사도 하시고 경비원도 하시고 또 여러 가지 일용직들을 많이 경험하셨더라고요.이때 얘기 좀 해주세요. 그 음식도 잘하세요
◆ 나재필> 잘하는 편이라고 듣습니다. 그리고
◇ 이성규> 평가는 어떠세요?
◆ 나재필> 만족해 하는 편입니다.
◇ 이성규> 사모님한테 속마음을 물어봐야 되겠죠.
◆ 나재필> 원래 설거지를 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부모님이 남자가 설거지하는 걸 이렇게 보면 자식이 설거지 하는 거 보면 뜯어말리잖아요.
◇ 이성규> 보수적이시죠?
◆ 나재필> 하도 하다 보니까 이제 말리지도 않고요. 그리고 요리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은퇴 이후에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요. 그래서 동네 학원을 다니면서 지지고 뽑고 칼질을 했는데 1점 차이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어.
◇ 이성규> 자격증 따는 데는
참석자 3 네네네
◆ 나재필> 좋아하는 거 하고 실전하고는 틀리구나 이런 생각을 했죠.다시 도전을 했는데 2차에서도 또 떨어졌습니다.그러다 보니까 조금 흘러들어간 곳이 대기업 주방 보조였어요.
◇ 이성규> 지방보조. 예
◆ 나재필> 조리사는 아니지만 조리보조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요.그런데 하루 1500명에서 2천인분의 설거지를 해야 되는 부서였어요.
◇ 이성규> 그 설거지 기계 없어요.
◆ 나재필> 자동 세척기가 있는데요. 그거는 아주 작은 반찬 그릇 정도 공기 이런 것만 넣고요.큰 바트나 팬 같은 거는 직접 그 보조들이 보조원들이 끓는 소단지 물을 이용해서 직접 설거지를 해야 돼요.그러다 보니까 좀 위험한 부분이 많았고요. 3개월 정도를 했는데 발톱 세개 손톱 4개가 빠졌습니다.그러니까 이제 개월에
◇ 이성규> 3개 4개
◆ 나재필> 조리기구에 끼임 사고나 이런 거를 통해서 처음에는 이제 피멍이 들다가 나중에는 빠지는 거죠.그래서 3개월 만에 두 손을 들었었습니다.
◇ 이성규> 두 손 들으시고
◆ 나재필> 그다음에 찾은 곳이 이제 결국은 막노동이었습니다.
◇ 이성규> 이제 그러시다가 지금 말씀하셨는데 막노동이라고 일컫는 대기업 건설 현장에 작년에 들어가셨더라고요.네 작년 겨울이니까 이제 한 1년 된 거죠. 근데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또 쓰여지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서요.
◆ 나재필> 쓸모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했는데요. 은퇴하고 나서 이제 베이비 부모 세대도 마찬가지지만 막상 은퇴하고 나서 내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막상 일자리를 찾아보다 보면 쓸모가 없음을 느껴지게 만들거든요.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한참 고민이 많았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뒷동산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호사였습니다.근데 하루 이틀 가는 거는 괜찮은데 계속해서 되풀이하다 보니까 루즈해지고 좀 무기력감이 많이 들었어요.계속 이렇게 산분화하면서 살 것인가 무엇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해서 도전했는데
참석자 3 뭐
◆ 나재필> 그다지 일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지인을 통해서 이제 대형 건설회사 건설 현장을 알게 됐죠.1군 2군 3군이 있는데요. 제가 간 곳은 1군 대기업 현장이었어요.일은 고된 편이지만 안전한 편이고요.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그래서
◆ 나재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이성규> 근데 궁금한 게요. 그때 대기업에 이력서를 낼 거 아니에요? 그때 내가 기자했던 사람이다라는 걸 얘기를 하고 이력서를 내셨어요? 아니면 이력서에 그걸 기재했어요 안 했어요
◆ 나재필> 사실을 안 했습니다. 사실은 그 막노동 현장에서 그 채용하는 곳도 마찬가지지만 전직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신체 건강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기 때문에 뭐 기자였던 사람이니까 특별 대우를 해준다거나 아니면 화이트 칼라를 채용했을 때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없어요.
◇ 이성규> 그래요 의구심과 좀 약간 또 의심 왜 들어올까
◆ 나재필> 정확하게 보신 겁니다. 그 사이에서 진입 장벽이 좀 낮은 편이에요.그래서 들어갈 수 있었고요. 그래서 거기서 제 쓸모를 찾은 거죠.결국은 저는 이 부분에서는 모든 베이비 부모도 마찬가지고 은퇴자도 마찬가지고 2030 세대도 마찬가지고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다라는 그 사실을 좀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네 쓸모가 있는 모든 인간은 쓸모가 있다. 어쨌든 중년인데 육체 노동자로 현장에 뛰어들으셨습니다.하시다 보니까 처음 마음하고 좀 달리 좀 더 힘들었지 않았어요 상상한 것보다
◆ 나재필> 중간중간 고비는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거는 일단은 몸이 좀 고되니까 밤마다 좀 통증에 시달리는 편이고요.
참석자 3 그리고
◆ 나재필> 자기만의 시간 이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 나재필> 조금 망설인 적도 있는데 이왕 도전을 했으니까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더 강했죠.
참석자 3 네
◇ 이성규>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오늘은 27년간 기자생활을 접고 막노동 현장에서 두 번째 삶과 노동의 가치를 알고 계신 나의 막노동 일지의 저자 나재필 전 기자와 함께하고 있습니다.나 기자님 우리 이쯤에서 노래를 하나 들어요. 무슨 노래 좀 하나 소개시켜 주시겠어요?
◆ 나재필> 김범룡의 인생길을 좀 틀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좀 가사를 눈여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사를 좀 녹여낸 듯한 가사여서 좀 마음에 와닿습니다.
◇ 이성규> 그러면 나재필 전 기자가 추천한 노래 김범룡의 인생길 듣고 오겠습니다.네 이성규의 행복한 신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오늘의 주인공은 27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막노동의 삶을 선택하신 그 현장의 희로애락을 책으로 엮어낸 나재필 전 기자와 함께 하고 있고요.김범룡의 인생길 들었습니다. 근데 그 일을 하실 때요.옆에서 아는 사람 만나거나 이런 적도 있어요.
◆ 나재필> 그런 사람도 만난 적은 있는데 막상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부끄럽지도 않고요.서로 격려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 이성규> 그리고 또 책에 보니까 빈농의 아들로 학창시절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보냈는데 다시 이렇게 일을 하시다가 보니까 아버지의 삶이 회고가 됐다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 나재필> 학창시절 좀 농사 짓는 집에 아들로 있다 보니까 친구들은 놀러 나갈 때 저는 항상 밭에 있었습니다.그러다 보니까 아버지를 많이 원망도 많이 했었어요.근데 그 원망의 기간이 너무나 길었습니다. 왜 농사를 지어야 되지 왜 아버지는 저런 힘든 삶을 택할까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고요.학교에서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하고 질문을 하면 곧바로 대답을 못할 정도로 조금 부끄러워했었습니다.
◇ 이성규> 그러니까 퇴원하신 쪽이 완전한 농촌은 아닌가 봐요.말씀 들으니까
◆ 나재필> 그래서 뭐 큰 농사는 아니었어도 품싹을 절약하기 위해서 거의 조금 가족의 힘을 빌리는 그런 빈농이었죠.제가 나이를 먹고 이제 막노동을 시작하고 나서야 그 아버지의 짓눌린 어깨 가장의 무게 이런 걸 좀 느끼기 시작했어요.아버지 같은 경우는 몸살도 조금 걸어다니면서 겪어야 한다는 시간이 없으니까요.그런 절박한 삶을 살아오셨구나 제 육체가 힘드니까 그제서야 뒤늦게 좀 깨달았죠.좀 슬픈 일입니다.
◇ 이성규> 공사 현장에서 이런저런 사연이 있는 동료들도 많이 만났을 거 아니에요? 좀 생각나는 동료 있나요?
◆ 나재필> 대부분이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오신 사장님도 있고요.
◇ 이성규> 네
◆ 나재필> 호르몬이 병원비를 내기 위해서 뛰어든 청년들도 있고요.막일도 모자라서 막일을 끝내고 아르바이트 하는 젊은 청년들도 있습니다.그리고 돈 안 되는 공부를 접고 일찌감치 이제 산업전선에 나온 친구들도 있고요.특별히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면 20대서부터 막로등판에 뛰어들어서 30대 초반에 목돈을 모아서 치킨집 창업하는 것까지 바라봤습니다.흔히들 우리 부모님들이 2030 세대를 보면 공부해라 좋은 직장 가라 좋은 배우자 만나라 이렇게 성화를 하잖아요.불안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막노동판에서 본 청년들을 보니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그들은 부모보다도 더 치열하게 살고 있고요. 뜨겁게 살아오고 있습니다.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 진짜 열심히 땀 흘리면서 살고 있더라고요.
◇ 이성규> 근데 그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근데 은퇴하면 저부터도 대학 교수인데 은퇴하면 어떻게 살지 이런 게 있거든요.그런데 미리 선택하신 거 아니에요? 어떤 자신 있는 영역을
◆ 나재필> 조금 빨리 왔다라고 저는 생각해요. 은퇴자들 대부분들은 몇 년 전서부터 컨설팅 책자를 본다거나 공부를 하면서 은퇴 이후에 뭐를 하면서 살지 이렇게 들여다보고는 있는데 깊이 고민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그래서 막상 은퇴하고 나면 진짜 막막해지는 게 현실이거든요.나와 보면 내가 꿈꾸던 그런 일자리는 없고요. 받아주는 것도 없습니다.또 더더구나 양질의 일자리도 없어요. 정부가 공언하고 있는 그 일자리 통계도 허수에 좀 가깝습니다.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그래서 저는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와의 양분되는 시점이 바로 은퇴 시점이라고 보거든요.좀 상투적인 말씀일 수도 있지만 좀 미리미리 제2의 직업 은퇴 이후의 삶을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 이성규> 그런데 아까 그 사업하다가 노동판으로 오신 분도 계시고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다고 그랬잖아요.그런데 그 이주 노동자나 다문화 이런 분들도 많죠.
◆ 나재필> 많죠. 아까 말씀드렸던 1군 현장에는 좀 드물고요.보통 동네마다 있는 인력사무소를 거치는 2군 3군 업종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많이 쓰는데요.제가 알고 있기로는 지금 추산 정부 추산대로 하면 80만 명 정도라고 잡고 있는데요.80만 명 불법까지 합치면 120만 명 정도로 지금 보고 있거든요.그들은 이주해서 이제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노동만 또 골라서 일을 하고 있어요.하지만 그에 걸맞는 대우나 이런 건 받지 못하고 항상 좀 불편한 상황들 속에서 일을 하고 있죠.저희들이 못 살 때 외국에 나가서 외화벌이에 가까운 일을 한 적이 있죠.지금 한국 노동자들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 흔쾌히 좋아하지 않습니다.왜냐면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왜 우리 일자리까지 뺏어가느냐고요.근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노동자이고요.우리가 옛날에 했던 것처럼 그들도 우리 일을 도와주는 하나의 노동자니까요.같이 공생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예 그런저런 것들을 다 감안해서 우리나라 노동 정책이 어떻게 좀 변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세요?
◆ 나재필> 지금 얼마 전에도 그랬지만 정부가 주 69시간 노동시간 유연화를 꺼내든 적이 있어요.깜짝 놀랐거든요. 지금 칠레 호주 이런 데는 오히려 주 4일째 40시간을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주 17시간을 늘린다.이거는 노동이 아니라 중노동을 하라는 뜻이거든요.
◇ 이성규> 물론 이제 그렇게 유연하게 그렇게 몰리기도 하고 좀 쉬기도 하고 그런 얘기는 또 같이 곁들여서 해야 되겠네요.
◆ 나재필> 그거는 또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런데요. 그 현실에서는 또 그렇게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요.어떻게 보면 죽도록 일해보지 않은 싱크탱크들이 모여서 죽어라 하고 일하라고 만든 정책들 같아요.아까 말씀드렸듯이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양질이 좀 별로 없어요.쓰레기 죽기나 뭐 이런 좀 약간 홍보성 이런 일자리들이 많거든요.그래서 조금 일한 만큼 행복을 사가라 뭐 이런 종류가 아니고 어느 정도의 일을 하고 행복을 나누는 그런 정책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이성규> 행복을 나누는 정책 근데 이런저런 일을 하시고 책을 쓰시고 하다가 보니까 나는 이 노동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됐습니까?
◆ 나재필> 사실은 화이트 칼라든 블루칼라든 노동자잖아요.어차피 돈을 벌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제 행복을 영위해 가는 건데요.사실은 제 노동이 아주 대단한 건 아닙니다. 평생을 막노동판에서 일해왔던 사람들이 보면 어찌 보면 코웃음을 칠지도 몰라요.저의 소소한 얘기들은 저만의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베이비 부모들 그리고 베이비 부모의 자식들 그들의 얘기이고 그들의 미래일 수도 있어요.제가 조금 일찍 나왔을 뿐이지요. 저는 고생했으니까 그동안 수고했으니까 조금 쉬어도 괜찮지 않겠니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래도 아직 쉴 만한 나이는 아니다.일을 하고 싶다. 그것이 가족의 도움이 큰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아직은 일하고 싶은 그런 생각이 앞섭니다.
◇ 이성규> 1년 동안 가보지 않았던 길에서 이제 뭔가 익숙해지고 있다라고 표현하면 될지 모르지만 포함해서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시죠
◆ 나재필> 막노동을 하게 된 것도 그렇고 그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낸 것도 마찬가지지만 막노동에 대한 땀의 가치를 알게 된 거예요.그게 가장 소중한 거고요. 여러분들도 이게 막노동이 됐다고 해서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무슨 일이든 녹화를 해보시기를 이렇게 간곡히 바라는 바인데요.가만히 앉아 있으면 빵 프로지만 0%지만 그래도 문 밖으로 나서면 도전하면 1%가 이상이 되듯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말고 문 밖으로 나서라 그리고 도전하라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이성규> 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나의 막노동 일지의 저자 나재필 전 기자 모시고 이야기 나눠봤습니다.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 나재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성규>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