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시간 : [월~금] 10:15~11:30
  • 진행: 박귀빈 / PD: 이은지 / 작가: 김은진

인터뷰 전문

“1966년 윤형연씨는 왜 사라졌을까” 언어가 잘못했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1-09-06 13:15  | 조회 : 1015 
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1년 9월 6일 (월요일)
□ 진행 : 최형진 아나운서
□ 출연 :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최형진 아나운서(이하 최형진): 흔히 '말'을 주고받는다고 하죠. 이 문장만으로도 '말'에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생각하며 '말'을 주고받는 걸까요? 인간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언어생활, 더 나은 관계와 더 나은 삶을 위해 언어에도 높이뛰기가 필요하다는데요. 자세한 내용 신작 ‘언어의 높이뛰기’로 찾아온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신지영 교수(이하 신지영): 네, 안녕하세요. 

◇ 최형진: 저번에 책은 다 완성이 됐는데 제목을 고민하셨던 것으로 기억을 하거든요. <언어의 높이뛰기>군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 신지영: 높이뛰기라는 말이 어떤 식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올까, 이 생각을 먼저 해봤어요. 언어의 높이뛰기, 언어를 통해서 뭔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을 뛰어 넘겠다, 이런 의미가 다가온다면 여러분께서 그렇게 느끼신다면 제목을 잘 정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최형진 아나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최형진: 저는 너무 공감하고 너무 잘 지으신 것 같아요. 이번에 우상혁 선수도 높이뛰기로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웃음) 굉장히 직관적이고 흥미를 유발하는 제목 같은데요. 

◆ 신지영: 높이뛰기 얘기를 했는데요. 제가 이 제목을 어떻게 정할까 생각하다가 ‘언어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이게 제가 하고자 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감수성을 좀 더 높여가면 어떨까. 그래야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언어에 잘 담고 있는지를 점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것을 언어의 높이뛰기로 비유를 해봤습니다. <언어의 높이뛰기>라는 제목을 붙였는데요. 사실은 높이뛰기라는 게 뭐냐면, 도움닫기를 촥 해서 우리가 설정한 목표높이를 뛰어넘는, 성공적으로 뛰어넘으면 목표높이를 살짝 올려서 뛰어넘고. 그래서 이번에 올림픽 때 우상혁 선수의 굉장히 좋은 높이뛰기의 예를 봤죠. 관전하면서 막 박수를 쳤잖아요. 그렇다면 언어에도 높이뛰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여태까지 높이뛰기가 이뤄져 왔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담겨있는 언어가 아닌 언어들을 많이 변화시켜 왔어요. 높이뛰기를 하기 위해서는 목표높이를 설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목표높이를 설정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목표높이가 올라가고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 걸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봤어요. 우리가 보통 언어라는 건 습관적으로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목표높이를 높인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요. 왜냐하면 그냥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안 하니까요. 질문은 안 하는데 ‘이거 이상하지 않아?’라는 질문을 누가 하면 그게 목표높이를 설정하는 막대가 올라가는 거예요. 일반적인 높이뛰기 경기는 보면, 그걸 선수들이 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관전하죠. 선수만 뛰죠. 그러니까 목표높이를 높이고 올라가고 뛰고 이런 것에 대해서 박수를 치잖아요. 그러나 언어의 높이뛰기는 우리가 관전자가 될 수 없어요. 우리가 실천하고 행위자가 되어야 그 목표높이를 완전히 뛰어넘고 그리고 나서 또 목표높이가 올라가고, 이러다 보니까 언어의 높이뛰기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익숙한 사람들, 우리처럼 모든 사람들이 언어를 배워서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언어라는 게 상대가 있는 거고, 상대를 향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말하는 사람은 이런 의도로 했지만 듣는 사람은 그런 의도로 안 들을 수 있는 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거리를 느껴본 적이 있다면 경험을 공유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 최형진: 상대방과의 말로 인한 거리. 

◆ 신지영: 나는 이런 의도로 했는데, 상대는 완전히 다른 의도로 받아들인 적이 있더라. 이걸 짧게 애청자 의견을 받아볼까요?

◇ 최형진: 네, 상대가 내 의도와 달리 잘못 받아들였거나 뛰어 넘어야 할 언어적인 문제를 애청자 분들께 받아볼게요. 

◆ 신지영: 혹은 조금 더 쉬운 문제로 왜 언어의 높이뛰기가 필요한지 보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 최형진: 저희가 퀴즈를 드리긴 했습니다만, 어떨 때는 상대방과 대화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뛰어넘어야 될 것이 있고, 그 안에는 기본적으로 지닌 전통적인 것도 있을 거고, 성별도 있을 거고요. 그런데 앞서 우상혁 선수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우상혁 선수 보면서 참 즐긴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언어를 이렇게 뛰어넘으면 좋겠지만, 이런 주제를 꺼내면 참 불편한 주제가 될 때도 있거든요. 

◆ 신지영: 당연히 언어의 높이뛰기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냥 관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우상혁 선수가 뛰는 것만 봐도 되지만 언어의 높이뛰기는 우리가 같이 뛰어야 돼요. 어떤 사람이 뛰면 나도 따라 뛰어야 될 것 같긴 한데, 저걸 뛰어 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불편해지거든요. ‘내가 왜 뛰어넘어야 되지? 왜 그걸 뛰어넘어야 될까? 나는 그냥 배운 대로 한 것뿐인데 왜 이걸 바꾸자고 하지?’, 이런 생각들이 막 떠오르기 때문에 그 목표 높이에 대한 공통적인 정서들이 만들어지려면 그 감수성, 목표높이를 설정한 사람, 그것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것들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서 ‘아 모두가 뛰어야 할 것이구나’라고 하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그 목표높이를 한 번 뛰어넘으면 모든 사람들이 그건 또 익숙한 게 되기 때문에 불편함이 없어져요.

◇ 최형진: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잘 사용해온 말인데, 그렇게 배워왔다고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언어도 변화를 겪지 않습니까?

◆ 신지영: 물론이죠. 그래서 언어는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 책의 1장에 ‘왜 반말하세요?’라는 제목이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 최형진: 그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죠. 

◆ 신지영: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무조건 존댓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의 기준이에요. 그런데 100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백몇십 년 전엔 신분사회가 있었어요. 신분제 사회에서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 최형진: 신분이 더 중요했죠. 

◆ 신지영: 그러니까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거죠. 나이와 상관없어요. 3살짜리도 말을 할 수 있다면, 70살 어르신이 예를 들어 신분이 낮다면 반말을 하는 거죠. 그러면 지금 생각으로 보면 굉장히 이상하죠. 이렇게 사회가 변화하면, 신분제가 없어지고 나니까 중요한 잣대로써 신분은 없어지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나이가 굉장히 중요한 잣대잖아요. 우리가 또 한 번 물어봐야 해요. ‘정말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반말할 수 있는 권한은 누가 줬을까?’,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연령차별을 없애자는 생각과 일치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해보자는 거죠. 

◇ 최형진: 예전에는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요즘 명절이 다가오면 한 번씩 짚고 넘어가는 주제가 있죠. 이 주제를 꺼냈다가 집안의 문제아가 되는 며느리들이 하나씩 생겨나고 있는데, 그러면서 요즘 세상이 변했다는 얘기들을 하세요. 그런데 놀랐던 게 1966년 독자 기고문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요? 

◆ 신지영: 네, 1966년 2월 17일 독자란에 독자투고가 있었어요. 여성살롱이라는 곳이었는데요. 윤형연이라는 사람이 기고를 합니다. 20대 여성이었고요. 친구가 결혼을 했어요. 여러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결혼을 한 친구가 휴가를 받아가지고 친정에 온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이 다 모였어요. 그 중 한 명이 윤형연 씨였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7남매 맏이와 이 친구가 결혼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막내가 5살인가 3살인가 굉장히 어린 시누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누한테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하니까 자기가 너무 힘들더라, 세네 살짜리 코흘리개한테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존댓말을 한다는 게 좀 이상하더라, 그래가지고 어르신들 앞에서는 ‘아가씨’라고 하고 둘이 있을 때는 이름을 불렀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윤형연 씨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자기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동생이니까 시댁의 동생들도 동생이니까 동생 부르듯 이름을 불러야 되는 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친구의 어머니한테 했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동생들이니까 그냥 이름 불러야 하지 않아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친구의 어머니가 ‘그 시고 떫은 얘기는 하지도 말아라, 나 때도 다 그랬어’라면서 라떼송을 불렀다는 거죠. 

◇ 최형진: 그때도요? (웃음)

◆ 신지영: 그렇죠. 그러면서 윤형연 씨가 마지막에 ‘과연 이게 그냥 여성들의 시고 떫은 이야기일까?’, 이렇게 끝내요. 1966년에 윤형연 씨가 20대였다면 지금 55년 정도가 흘렀거든요. 그럼 지금 70대가 되어 있겠죠?

◇ 최형진: 그 분이 지금 어떻게 할지 궁금한데요?

◆ 신지영: 왜 ‘라떼는 말이야’ 했던 것들이 계속 돌까?

◇ 최형진: 55년이 흘렀는데도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도 집안의 문제가 되고 있어요. 55년이나 계속 됐는데 꼭 바꿔야 할까, 이런 분들도 사실 있거든요. 가족 호칭에 대해서 꾸준히 얘기해야 되고 언급해야 되는 이유가 뭘까요?

◆ 신지영: 우리는 아이들한테 평등한 세상을 계속 얘기했거든요.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차별을 받으면 안 된다, 연령이 다르다고 해서 기회의 평등을 앗아가면 안 된다, 여러 가지 장애, 인권 등에 대해서 아이들을 잘 키웠어요. 그런데 여성이 결혼을 해서 보니까 나는 남편의 동생들에게 ‘아가씨, 도련님’ 하면서 존댓말을 쓰고 반면 내 남편은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면서 ‘처제, 처남’ 하면서 반말을 쓰는 거예요.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을까? 같이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해서 똑같이 새로운 동생들을 맞았는데. 

◇ 최형진: 동등한 게 아닌데요. 

◆ 신지영: 동등한 게 아니죠. 그렇다면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다면 무언가 궁금증이 생길 거 아니에요? ‘나는 왜 이래야 하지? 내 남편은 안 그러는데?’, 둘 다 존댓말을 쓴다면 ‘그래, 새 가족을 존중해주는 거니까 좋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한 쪽은 이렇고 한쪽은 저러니까 ‘이게 뭐지?’하고 궁금증이 생기는 거죠. 그런데 그 궁금증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보고, 이제는 연령이 높아지면 윤현영 씨도 연령이 높아졌고 내 대상이 아니에요. 아가씨, 도련님 부를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내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얘기를 또 들으니까 ‘나한테는 별로 불편하지 않은데 네가 좀 참으면 되지 않니? 그렇게 써왔으니 그렇게 써야 되지 않아?’, 이렇게 얘기를 하는 세대 간의 충돌이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그 자체만 듣지 마시고, 이번에 가족들이 조금 모인다면 그 얘기를 해봅시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바 하고 이 호칭들이 가져오는 문제가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 나는 왜 불편함이 있는 건지, 나의 입장에서, 며느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어르신들은 어르신들 입장에서 왜 그 불편함이 이상한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 그 거리가 좀 더 좁혀지지 않을까요?

◇ 최형진: 또 추석이잖아요. 이런 얘기를 가족들하고 꺼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신지영: 평화롭게 같이 이야기하기, 그걸 위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이걸 한 번 실천해보면 재미있는 추석 명절이 되지 않을까요?

◇ 최형진: 초반에 질문 주신 것에 대해 애청자 문자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대화할 때 참 어렵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부부관계의 대화는 성별도 있고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교수님 책을 읽으시면 해답이 될까요?

◆ 신지영: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남자는 여자의 입장, 여자는 남장의 입장, 이런 것들을 더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부부가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걸 안 읽어도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은 꼭 찾아서 읽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찾아서 읽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 감수성의 목표를 좀 더 올릴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한 번 읽어보자고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 최형진: 제가 문자 계속 소개해드릴게요. ‘집사람과 대화가 제일 안 됩니다. 저희 고1 아들이 애니메이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가족 단체방에 미래가 밝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겠네 라고 썼다가 대판 싸웠어요’, 라고 하셨고요. ‘아침에도 있었어요. 사춘기 아들에게 기분 좋게 아침 인사했는데 아들은 귀찮게 받아들입니다. 정말 언어의 거리가 너무 멀어요’, ‘어제 말 한 마디로 고객과 언쟁이 있었거든요. 똑같은 말인데 어찌 표현하고 음정은 또 어떻게 해야 될까요?’라고 하셨는데요. 음정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결책을 드릴 수 있을까요?

◆ 신지영: 대체로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하냐면, 말을 할 때 언어의 내용이 있고, 그 언어를 어떻게 실행하느냐, 음의 높낮이, 길이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비언어라고 해요. 언어의 내용적인 것을 ‘언어적’인 것이라고 하고, 그 외의 것, 표정이나 제스처 등을 ‘비언어적’이라고 하는데. 비언어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비언어에는 감정이 담기기도 하고 상대에 대한 태도가 담기기도 해요. 그래서 만약 고객과 언쟁이 있었다면 고객이 어떤 순간에 나의 말을 어떻게 들었을까,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고요. 또 어떤 때는 고객이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상대의 문제 때문에 내가 문제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반드시 고객을 응대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게 필요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고객 입장에서 손님은 왕이 아니에요. 손님이에요. 그걸 반드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 책의 한 장이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아메리카노가 나오시는 나라에서’라는 건데요. 그게 고객과의 관계에서 고객 입장, 그리고 서비스를 하는 사람의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참고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최형진: 다음 의견입니다. ‘요즘 아이 낳고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아이처럼 순수하고 호기심 많았던 어린 시절처럼 언어의 높이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셨고요. ‘교수님, 책 국회에 보내주세요. 국회의원들께 강추입니다’ 라고 하셨고요. 

◆ 신지영: 맞습니다. 꼭 높이뛰기 해야 돼요.

◇ 최형진: 다음 의견입니다. ‘나이라는 걸 먹어갈수록 생각하는 걸 말로 옮기고 말로 할 수 있는 걸 글로 옮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올 가을 세계신기록까지는 힘들어도 한국 기록까지는 한 번 뛰어보고 싶네요’, ‘사춘기 접어든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코로나시대에 다양한 매체를 접하면서 폭발적인 다양한 말투를 사용하는데 당황스럽고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언어의 높이뛰기로 극복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많은 의견 주셨네요. 오늘 ‘슬기로운 언어생활’ 여기까지 듣죠. 말씀 고맙습니다. 

◆ 신지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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