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 진행: 이성규 / PD: 박준범 / 작가: 이혜민

인터뷰 전문

[잠시만요] 일본 성노예 피해자 사진 작가, '아리랑' 듣고 싶은 사연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1-06-29 16:55  | 조회 : 11016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1년 6월 27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안세홍 겹겹 프로젝트 대표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일본 성노예 피해자 사진 작가, '아리랑' 듣고 싶은 사연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매 순간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풍경들,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서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진의 힘이죠. 마법 같은 힘을 가진 사진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목소리를 기록하는 비영리 단체 겹겹 프로젝트의 대표를 맡고 계신 사직작가 안세홍님 입니다. 안녕하세요. 안 작가님.

◆ 안세홍 겹겹 프로젝트 대표(이하 안세홍)> 예, 안녕하십니까.

◇ 이성규> 예, 청취자 여러분들께 한번 직접 소개 좀 해주시죠.

◆ 안세홍> 예, 직업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고요. 보통 우리가 위안부라고 하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그 아시아의 2, 30여개의 나라가 있는데, 피해자들을 사진과 영상, 그리고 증언을 기록을 하고, 그 분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집을 고친다거나. 또 의료, 복지 지원을 하고 있는, 겹겹 프로젝트를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네, ‘겹겹’이 무슨 안전망을 만든다는 뜻인가요?

◆ 안세홍> 아니요.

◇ 이성규> 이게 무슨 뜻이에요?

◆ 안세홍> 제가 피해자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이마에 층층이 쌓인 그 주름을 많이 보았고요. 또, 당시에 아픔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아픔도 가슴에 층층이, 겹겹이 쌓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이성규> 벌써 사진을 찍으신지, 25년이면.

◆ 안세홍>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을 해서, 대학 시절에도 학교에서도 활동을 하고, 그리고 또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통일문제라던가, 장애인이라던가. 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사진으로 기록을 하다 보니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분들의 아픔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이 그런, 활동. 사진작가 활동을 하시기 위해서는 참 많은 장소, 많은 분들 만나실 거에요. 그러면 여행도 많이 하셔야 하고, 걷기도 많이 걷고 하셔야 하는데. 아까 들어오실 때 보니까, 약간 다리가 불편하신 거 같은데요?

◆ 안세홍> 예, 태어나면서 얼마 안 되어서 양쪽 발이 안쪽으로 휘어서, 실제로 발바닥으로 걷지 못하고, 발등으로 발 옆으로 걷고 있죠. 그래서 오래 걷기도 굉장히 힘들고, 또 힘든 만큼 쉬어가는 시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쉬는 동안 어떻게 사물이나 사람들을 조금 더 관찰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깊숙이 바라보게 되고, 또 세심하게 바라보다 보니, 오히려 세상에 대한, 깊이가 느껴지더라고요.

◇ 이성규> 기자도 하셨더라고요?

◆ 안세홍> 사회 평론, ‘길’이라는 잡지에서 96년도부터 잡지사에서 일을 했는데.

◇ 이성규> 주로 사진 쪽으로 하셨나요? 기사도 쓰셨나요?

◆ 안세홍> 사진과 글을 같이 쓰면서, 일을 했었습니다.

◇ 이성규> 네, 그러면 꽤 오래 하셨어요.

◆ 안세홍>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거의 30년이 넘었고. 이런 위안부 피해자를 만난 것은 벌써 한 사반세기 정도 되네요. 그래서 이제 그 기간 동안 그 분들을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죠.

◇ 이성규> 당시 기자로 일을 하시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그 분들이 모여 사시는 ‘나눔의 집’ 하고 인연을 계속 해오고 있으세요. 자세히 조금 그 쪽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 안세홍> 제 대학시절에 이제, 90년대 초반에 김학순 피해자 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 증언을 하면서 저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죠. 어떻게 이 문제를 접근을 할까, 굉장히 망설였는데. 다행이도 96년도에 잡지사 일을 하면서, 나눔의 집에 취재를 갔습니다. 근데 그때 가서도 이 다른 아픔을 가지신 분들하고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참 망설여졌고. 오히려 남자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근데 이제 거기 계시던 박두리 피해자 분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창피한 것이지, 우리가 창피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너희는 일본군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 말씀이 굉장히 취재를 마친 이후에도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또 다시 찾아가서 무슨 일을 하기 보다는 그냥 막연하게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갔습니다.

◇ 이성규> 이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를 사진으로 알려 오신 이야기를 해보겠는데요. 나눔의 집에서 취재를 끝낸 뒤에, 3년 동안 자원봉사도 하셨고. 또 그런 쪽에 아까 말씀을 하신 끌림때문엠 그런 것인지, 그런 동기들이 무엇인가 있으셨을 거 같습니다.

◆ 안세홍> 우선 무엇보다도 막연하게 가서 자원 봉사를 시작을 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보다도 그냥 피해자와 함께하는 일을 찾고 싶었어요. 당시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피해자분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더군다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진을 찍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국제사회에 알리자, 라는 생각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록하고 국제사회에 전시라던가 강연을 통해서 이 일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 이성규> 그것이 학문을 연구를 할 때는 참여 관찰적 기법인데, 그렇게 하셨군요. 그리고 25년 째,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셨더라고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아시아를 무대로 해서 다 만나시고 이야기도 듣고, 사진도 찍고, 기록도 하고 그러셨던데. 이게 이제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 안세홍> ‘나눔의 집’에 계시는 피해자분들뿐만 아니라 또, 전국에 계신 우리나라의 경상도라던가, 경기도 지역에 계신 피해자 분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분들의 아픔을 제가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머리로는 다 이해를 하잖아요. 가슴으로 받아드리기 까지 3년이 걸렸고. 또 그것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그 분들을 기록을 했는데. 제가 우연히 2001년도에 중국에 동원이 되었다가 못 돌아오시는 분들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전쟁이 끝나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못 돌아오시는 분들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중국의 연변이라던가, 우한, 베이징, 상하이에 피해자 분들을 찾으러 다녔어요. 다니면서 보니, 이분들의 당시의 아픔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아픔이 지워지지도 않고, 치유도 되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이어져 오는 아픔을 보면서, 이것이 과거만의 아픔이 아니라, 현재의 아픔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 일을 계속 진행을 하는 힘이 되었죠.

◇ 이성규> 중국 쪽으로 많이 다니셨나요?

◆ 안세홍> 그렇죠. 초기는 중국 쪽으로 많이 다녔고, 제가 또 아시아 쪽을 다니기 시작을 한 것은, 아시아 다른 피해자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이분들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고요. 아무리 인터넷이라든가 관련 단체를 찾아가도 이 분들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한 거의 수년간에 걸쳐서 아시아의 기록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현지 나라에서도 이 분들에 관심도 부족했었고,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찾아가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2013년부터 필리핀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 현지 피해자분들을 찾아다니면서, 이 분들의 아픔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기 시작을 했습니다.

◇ 이성규> 예, 재정문제가 있을 텐데,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을 하셨습니까?

◆ 안세홍> 당연히 엄청난 비용이 들죠. 처음에는 제 사비용을 많이 이용을 했고. 조금씩 이 일에 동참을 하시는 분들이 생기다 보니, 후원을 하시는 분들이 생겼지만, 아직도 제 금융권의 빚이 엄청나게 쌓여있고요. 이게 단순히 돈을 모아서 가려고 하다보면, 시간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이미 고령의 나이이고,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종자돈, 비행기 삯이라도 마련되면 무조건 찾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기록이라도 하나라도 남겨놓아야 이 분들의 아픔이 우리에게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어떤 돈에 대한 개념보다는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을 한 분이라도 더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었죠.

◇ 이성규> 비영리 단체 ‘겹겹 프로젝트’ 이런 부분에 대한 예산이 조금 마련이 되면 좋겠다는 느낌이 갑자기 드네요.

◆ 안세홍> 제가 아쉬운 소리인데, 2001년도에 중국에 남겨진 피해자 분들을 찾으러 다녔잖아요. 한국 정부에 알렸습니다. 그때, 한국정부에서 하시는 말씀이 이분들의 국적이 한국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대부분 중국 국적이나, 북한 국적이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또 제가 아시아를 다니다보니, “왜 해외 피해자를 우리가 기록을 해야 하느냐.” 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또 지금에 와서는 그분들의 기록을 기증을 해달라는 말까지 하시는 것을 듣고서 굉장히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 이성규> 안 맞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러시다는 말씀이신데. 그 동안의 수많은 피해자 분들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외국도 가셔서, 외국에는 한국같이 시민단체도 조금 미약하고, 피해자에 대한 통계나 집계가 힘들기도 하셨을 텐데,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분들을 만나 오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 거 같습니다.

◆ 안세홍> 지금 제가 기억에 남는 분이라면, 이수단 피해자 분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인이었고, 고향이 평양 근처에요. 그래서 이제 당시 1940년도에 하얼빈, 연변의 흑룡강 쪽으로 동원되어서 가셨는데, 과거의 아픔 때문인지 자신의 아이를 갖지를 못하셨어요. 결혼이라는 것을 했지만, 가정폭력에도 굉장히 많이 시달리셨고, 나중에는 이제 경로원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셨는데. 자기 아이를 갖지를 못하다 보니까 아이에 대한 집착이 생기시는 거에요. 그래서 방 안에는 아기 사진도 붙여 두시고, 또 어떤 경로 원장님이 아기 인형을 선물을 했었습니다. 그 아기 인형을 받아 들고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갔니. 라고 말씀을 하시고. 이제 나랑같이 살자, 그러면서 항상 주무실 때도, 안고 주무시고. 또 항상 낮에도 안고 대화를 하듯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분들의 아픔, 고통, 이런 것들이 이중 삼중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 이성규> 인생에서 계속 그런 것이 겹겹이 쌓인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그런 것들을 다 기록을 하신 것이죠?

◆ 안세홍> 그럼요.

◇ 이성규> 예, 오늘은 사진작가 안세홍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와서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나윤선의 ‘아리랑’을 듣겠습니다. 네, 나윤선의 ‘아리랑’을 듣고 왔는데요. 제 기억에 소치 올림픽 폐막식에 이 노래를 올린 거 같은데. 안세홍 작가님께서는 이 노래를 어떤 동기로 소개를 하신 겁니까?

◆ 안세홍> 제가 중국에서 13분의 조선인 피해자 분들을 찾았었습니다. 그 분들을 만나면서, 절반 이상은 우리말을 다 잊으셨더라고요. 이미 말도 못하시고, 단어정도밖에 사용을 못 하시는 상황이었는데, 아리랑이라던가, 도라지라던가 이런 것을 부르시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모습을 굉장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분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면서 동향의 느낌을 같이 공감을 하고, 또 이분들의 아픔을 조금씩 덜어드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 이성규>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비영리 단체 겹겹 프로젝트의 대표를 맡고 계신 사진작가, 안세홍님 입니다. 안 작가님 지난 2015년에 한일 위안부 합의. 논란이 되고 있는데요. 이 발표가 있는데, 당시 피해자들은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그 당시에 정부는 발표를 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드셨을 거 같습니다.

◆ 안세홍> 제가 그때 당시 일본에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으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우선 아까 말씀을 하셨다시피 피해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이 안 된, 정부 간의 합의가 있었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 무엇보다 한국 정부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올바를 해결을 위한 합의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일본의 전장을 다시 할 수 있게끔 하는 의미로 합의를 했다고 봅니다.

◇ 이성규> 그때, 이제 한국에서도 의견들이 엇갈리기는 했지만, 그 발표 이후에 일본 국민들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는 사실 상 해결된 문제다 , 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런 경향이 있었죠?

◆ 안세홍> 한일 합의 이후에 거의 한 달, 두 달 가까이 아사이라던가, 큰 신문의 일면에 계속해서 실렸고요. NHK라던가 방송, 미디어에서도 계속해서 합의가 되었다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의 인식 속에는 이것이 해결이 되었으니까 이것을 더 이상 죄책감을 안 가져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더라고요. 그래서 이후에도 제가 대학이라던가, 시민단체에 가서 강연을 할 때마다 어떠한 합의에 잘못된 점. 합의가 되었더라도, 피해자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합리한 점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게다가 또 일본 정부에서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 대신에 ‘위안부’ 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었어요. 그래서 약간 논란이 되었는데. 이런 일본의 인식이라던가 하는 부분들이 참 변하지 않는 상황인데, 이 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세요?

◆ 안세홍> 종군이라는 말 자체도 맞지가 않지만, 어떻게 보면, 가해자의 명칭을 빼버린 것이죠. 보편화시켜 버리는. 위안부라는 말을 보편화시키는 것인데. 정확한 용어를 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항상 일본에서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미디어에서 ‘일본군 위안부’라고까지 써주고, 최근에는 ‘성노예’라는 표현도 써주기는 하는데, 어떤 사람, 시민들이나 국민들에 대한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 자체를 해외에서는 ‘sexual slaves’라는 말을 쓰거든요. 그것을 정확한 표현을 계속해서 써주고, 그것이 공식화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 이성규> 그런데 올 초에 미국의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는 램지어 교수라고 이분이 논문 속에다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매춘부로 규정하고, 역사를 왜곡한 논문 때문에 논란이 되었는데요.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해서 계속 일어나는 것이죠?

◆ 안세홍> 제가 이제 미국이나 유럽을 가보면 해외의 외국인들의 반응은 “왜 너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적 갈등만 있니?”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러면서 막연하게 일본 편을 드는 것이에요. “일본이 그럴 리가 없다.”내지는 “너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라는 그런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램지어 교수 사태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아서 연구를 하기는 하지만, 막연하게 일본 편을 드는 그런 학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를 시키기 위해서 제가 이제 아시아 전체의 문제로 이끌어가고, 또 단순히 한일 간만의 역사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의 전쟁 인권 문제로 끌기 위한 그런 전시라던가, 강연을 계속해서 준비를 하고 시행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램지어 교수 문제도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영향력이 있는 국제무대의 대학과 연구소에 이런 쪽으로, 우리의 연구소 같은 거 하나도 안 만들거든요. 근데 이 부분은 벌써 램지어 교수 하나뿐만이 아니라, 선진국에 있는 각 유명한 대학의 일본자본이 이미 들어가서, 연구소 같은 것을 많이 만들었어요. 결국은 기금으로 월급을 받는 분들은 그 쪽으로 편향이 되겟죠. 이런 부분들을 우리 정부에서도 알아야 할 거 같은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 안세홍> 당연히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이라는 알리는, 연구를 통해서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런 인문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소홀한 것이 현실이고, 돈을 위해서 국가라던가 기업들이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굉장히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최근에는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를 한 손해배상 소송이 있었는데, 우리 법원에서 약간 엇갈린 판결을 했어요. 피해자들은 혼란스럽고, 국민들도 혼란스럽거든요. 어떤 부분이 제일 문제이죠?

◆ 안세홍>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어떤 판사분들의 역사 인식에 차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 역사 인식의 차이가 어떻게 보면, 아직도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논란 속에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들을 더 많이 찾아내고, 또 제대로된 역사가 쓰여진다면 이러한 논란은 더 이상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아직도 미제, 미결 상태로 남아있는 이 문제가 참 앞으로 큰 과제인데요. 함께 풀어야할 문제들이 또 있다면 한 번쯤 제기를 해주시죠.

◆ 안세홍> 무엇보다도 제가 아시아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 나라라던가, 피해사례 그리고 동원된 나이, 기간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르시거든요. 그런데도 이분들의 가지고 있는 아픔 그리고 피해 사실은 다르지가 않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다른 고통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들의 아픔을 어떤 한일 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전체로 이끌어가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고. 이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가장 앞서고 있거든요. 가장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해결을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는데, 다른 나라들이 일본의 눈치를 보는 동안 그 분들을 같이 포용을 해서 함께 이끌어가는 것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 이성규> 네, 사진작가 안세홍. 오랜 시간 동안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신 거 같아요. 지금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도 에너지가 상당히 느껴지고 하는데, 이 어려운 여정을 에너지를 유지하고 걸어가는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을 하세요? 자신에 대해서?

◆ 안세홍> 원동력, 어떻게 보면 이것이 저도 이 일을 하면서 제 원동력이 무엇일까 많이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아픈 분을 보면, 약자층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면, 그 아픔은 또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거든요. 또 역사 속에서 이런 아픔을 가지신 분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해결을 하지 못하면, 이 아픔의 역사는 또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고. 또 다시 우리의 자손들이 또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치유를 하고, 문제해결을 하고 넘어가야만 밝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그리고 2019년 7월에 책을 내셨더라고요? “나는 위안부가 아니다,” 이것을 출간을 하셨는데, 일본 말로 번역을 안 하세요?

◆ 안세홍> 제가 2013년도에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먼저 책이 나왔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왔는데. 이번에 나온 “나는 위안부가 아니다.”라는 책도 영어권과 일본어 권에서 출판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우선 번역이 되어야 하거든요, 이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번역비를 위해서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요청을 했지만, 어떤 계약서를 가지고 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출판사에서 내용을 모르고서 계약을 TJ 주지 않거든요. 그래서 번역이 되고, 그런 비용을 마련을 해서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미비하기 때문에 출판 계획은 가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출판사를 못 찾고 있습니다.

◇ 이성규> 사진작가 안세홍 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봤습니다. 안 작가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 안세홍> 고맙습니다.

◇ 이성규> 예, <이런 사람도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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