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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종이접기 열풍, 코딱지들의 성장통 보듬고파!" -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5-08-07 10:49  | 조회 : 6131 
YTN라디오(FM 94.5) [수도권 투데이]



"추억의 종이접기 열풍, 코딱지들의 성장통 보듬고파!" -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



앵커:
<만나고 싶었습니다> 시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종이접기 아저씨,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의 김영만 원장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이하 김영만): 네, 안녕하세요.

앵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청취자 분들에게 인사 한 말씀 해주시죠.

김영만:
친구들 안녕하세요. 우리 친구들 코딱지들도 섞여 있죠? 이렇게 만나서 반갑고요. 어른들한테 코딱지라고 해서 대단히 죄송하고요. 열심히 살고 있는 여러 친구들, 라디오를 통해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앵커:
네, 한동안 방송에서 뵙진 못했습니다만 요즘도 계속 종이접기 일은 해 오신 거죠?

김영만:
네, 그렇죠. 방송은 케이블 쪽은 조금씩 했었고, 공영방송은 한지가 굉장히 오래되었고요. 지금도 강의도 다니고, 종이문화재단 일도 하고, 천안에 조그만 미술관 운영도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앵커:
네, 최근에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인기가 정상으로 치솟고 계시는데요. 그 인기를 느끼시나요?

김영만:
한 일주일 정도는 모르고 있었어요. 일주일 후에 지인이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고 해서 들어가 봤더니, 그냥 평상시에 강의하는 언어를 썼는데, 그게 어록으로도 만들어지고, 젊은 친구들에게 작은 힐링이 되었다는 게, 저도 참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큰 감동이었어요.

앵커:
김 원장께서는 평소에 인터넷 많이 하시나요?

김영만:
거의 안 하죠. 우리 나이 되면 잘 안 하잖아요?

앵커:
그렇죠. 지인이 알려줘서 들어가보셨군요?

김영만:
네, 그렇죠.

앵커: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영만:
가족들이야, 아들, 딸은 시집, 장가 다 가고, 아이들도 있는데요. 자기 아빠를 봐도 낄낄대고 웃어요. 그 정도이고, 좋아하기는 하죠.

앵커:
정말 오래간만에 방송에 복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만에 복귀하신 건가요?

김영만:
공영방송은 거의 10년이 조금 넘었죠. 14~15년 된 것 같고요. 케이블 방송은 중간 중간 어린이 프로 했었고요.

앵커:
오래간만에 방송을 다시 해보니까 어떠시던가요?

김영만:
일단 긴장을 많이 했죠. 그런데 예전에 했던 습관이 있었는지, 시작하고 10~20분 지나고는 많이 긴장이 풀어지더라고요.

앵커:
그렇군요. 인터뷰 하신 내용을 보니까, ‘내가 여태껏 살아온 세월 중 최고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김영만:
네, 그 많은 청, 장년들, 2~30대들이 저로 인해서 많이 울컥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친구들이 저에게 하나의 감동을 받았으면, 저는 한 열 개의 더 큰 감동을 받았죠. 너무 많은 걸 이번에 많이 느꼈습니다.

앵커:
네, 청취자분들께서 문자를 보내주신 게 있는데요. 5669 번 님, “와, 김영만 선생님이다. 반갑습니다. 궁금한 게요. 왜 아이들에게 ‘코딱지’라고 부르신 거예요?” 이렇게 보내주셨네요.

김영만:
아이들이 집중하게 하는, 저희만 쓰는 단어인데요. 아마 유독 저만 쓸 거 같아요. 아이들에게 ‘아이들아 여기 좀 봐라’라고 하면, 6~7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면 조금 산만해서 집중을 잘 못해요. 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래서 ‘어이, 코딱지들~’이러면 자기들이 코딱지가 아니니까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눈 크게 뜨고요. 그러면 그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죠. 그러니까 집중을 시키는 단어인데, 코딱지 말고도 굉장히 많이 있어요.

앵커:
그렇군요. 4369 번 님, “아침에 라디오 듣다가 김 선생님 나오셔서 볼륨 키웠어요. 어디 갔다가 이제 오셨어요! 매번 종이접기 하다가 ‘쉽죠’하셨는데, 전 솔직히 좀 어려웠어요! 이젠 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합니다 원장님” 이렇게 보내주셨네요.

김영만:
네, 감사합니다.

앵커:
종이접기를 하실 때마다 “쉽죠?”라고 하시는 모양이죠?

김영만:
네, 저야 이 일을 4~50년 가까이 해서, 그냥 손이 가는대로 움직이는데, 보통 처음 접하면, 일단 세모 접기, 네모 접기부터 어렵다고 생각들을 해요. 그런데 이렇게 테크닉이라는 건 많이 하면 할수록 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저만큼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저야 뭐 나이가 들어서 조금 늦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은 빠르잖아요? 걱정하시 마세요~!

앵커:
5966번 님, “천안에서 미술관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천안 어디에 있는지요? 방학이라 아이들이랑 가고 싶어요.”

김영만: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는 유치원하고 어린이집 단체 방문으로만 운영이 되고 있고, 개인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고요. 그렇게 생각만큼 크지도 않고요. 조그마한 작업실 겸 미술관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이 단체로 오면 만들기도 하고, 그리기도 하는 곳이라서요. 일단 대단히 죄송하고요. 앞으로 개인, 가족들도 오실 수 있게 연구를 많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1591번님, “아저씨,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요?”

김영만:
그래요? 제가 지금 60대인데... 제 일을 열심히 하고, 그리고 많이 강의를 열심히 다니다보니까, 몸이 불어나면 힘이 들어서, 가끔 한 번씩 운동도 좀 하고, 그렇게 운동을 많이 하지는 않고요. 그냥 일을 열심히 해요. 많이 돌아다니고, 일을 찾아서 하고, 그게 아마 지금까지 지탱해온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앵커:
그렇군요. 종이접기 방송을 하실 때가 지금 2~30대 청년들이 유치원, 초등학교 다닐 때였죠? 그때가 언제인가요?

김영만:
그때가 아마 90년도가 아닌가 싶은데요.

앵커:
요즘 2~30대 청년들을 이르는 말이 있죠. 88만원 세대, 5포 세대, 그리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요. 김 원장께서 나오는 방송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어떤 점이 청년들의 마음을 울렸을까요?

김영만:
지금 국장님이 말씀하신대로 IMF 때, 물론 우리 친구들뿐만 아니라 부모 세대도 아마 지금 2030세대만큼 고생을 많이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문화라는 측면에서, 아날로그에서 IT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IMF 때문에 갑자기 무너졌다가 갑자기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서, 그 아날로그 문화 자체를 이 친구들이 잊고 지냈던 것이죠. 그게 제가 출연하면서 갑자기 다시 대두되어서 추억이나 이런 것을 느끼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앵커:
특히 ‘이제 어른이 다 되었으니까 뭐든 잘 할 수 있을 거다’ 이 이야기 듣고 힘냈다는 분들도 많아요.

김영만:
물론 어른이 되었으면 잘 해야 하는데요. 종이접기 부분은 어렸을 때는 많이 힘들어도, 아무래도 인지 발달이 되고, 여유가 있고 하니까 잘 되지 않을까? 그래서 한 말이고요. 지금 사회도 너무 힘들다. 5포 세대, 3포 세대,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것도 어른이 되었으니, 파헤쳐나가라, 이런 뜻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어록이 만들어지고 해서 제 자신도 굉장히...

앵커:
네, 4533번님,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올 해 37살인데요. 선생님 방송 보면서 자랐거든요. 이번에 방송은 못보고 인터넷 기사를 봤는데 눈물이 났어요. 어린 시절 종이접기를 볼 때 부모님이 다 살아계셨는데, 지금 제가 엄마가 되어보니 그렇게 친절하게, 인내심 있게 종이접기 가르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종이접기 하나에도 인생과 인격, 연륜이 느껴져요. 우연히 방송 듣게 되었는데 게스트 대박이네요.”

김영만:
감사합니다.

앵커:
앞으로도 계속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3296번님, “종이 접기 도대체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영민:
참 희한하게 저도 지금 어떻게 그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한데요. 그게 거의 80년대인데요. 그때 제 나이가 30대 였는데, 저는 광고 일을 했었습니다. 큰 회사의 광고기획실에서 근무하다가 나와서 광고 기획사무실을 오픈하려고 준비하던 과정에서, 저랑 같이 투자를 하겠다고 한 친구가 있었는데, 갑자기 주식이 반토막나는 바람에 투자를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일은 못하게 되고, 시장조사차 일본에 갔다가 거기서 제 친구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면서 종이접기가 눈에 들어오게 된 거죠. 그리고 우리나라에 귀국해서 우리나라 아이들은 과연 종이접기를 할까 하는 궁금증에 유치원이나 미술학원에 방문하고, 수업과정, 커리큘럼도 훑어보고 했는데, 그리기는 많이 하는데 종이접기는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한 번 이거 커리큘럼을 짜보자, 이렇게 시작이 되어서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앵커:
처음에는 일본에서 보고 하게 되신 거군요.

김영민:
네, 그게 눈에 띈 거죠.

앵커:
어떤가요? 우리나라의 종이접기와 일본의 종이접기, 수준차이가 많이 나나요?

김영민:
지금은 오히려 저희가 잘 한다고 보는데요. 일본 쪽에는 매니아가 많아요. 일은 따로 있고, 취미생활로 종이접기를 하는 분들이, 거의 50~70대 되는 어르신들께서 많이 하시고요. 아이들에 대한 기본 종이접기 커리큘럼은 저희가 훨씬 잘 되어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4233번님, “6살 된 우리 아이에게 선생님의 옛날 방송을 찾아서 보여줬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최근에 방송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은 어떤 게 있으세요?”

김영민:
제가 마이 리틀 텔레비젼에서 만들기를 하면서 ‘인증샷’이라는 게 인터넷에 올라오는데, 그것도 저한테는 작은 감동이었죠. 2~30대가 그걸 따라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든 친구도 있었고, 재밌는 걸 만든 친구도 있었고, 그걸 다 올린 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작은 감동이었습니다.

앵커:
많은 분들이 문자 보내주시고 계신데요. 1092번님, “선생님 종이접기, 매번 실패하며 선생님 싫어했던 꼬마가 지금은 종이접기의 의미를 생각하며 집을 짓고 세상을 접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 종이 접기 명언 하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보내주셨네요.

김영만:
종이접기 명언이요? 글쎄요. “쉽습니다. 참 쉬워요.” 이 말을 말하고 싶네요.

앵커:
네, 예전에는 어린아이들이 예전엔 아이들이 종이접기 많이 했던 것 같은데요.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에 더 익숙한 상황인데요. 이런 것 보면 좀 아쉬움을 느끼실 것 같아요?

김영만:
약간의 아쉬움도 있기는 한데, 지금 뭐 IT시대인데, 하다못해 아이가 2~3개월 되면 아이가 울면 엄마들이 스마트폰을 줘서 아이 노래 보여주고 이런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그걸 거슬러간다는 것은 무리이고, 그래도 IT시대에도 아이들에게 가끔 가다가 아날로그적인 종이 찢기, 종이접기, 입에 물기, 이런 걸 한 번씩 시키면, 그 아이들의 감수성, 인성에 약간씩 보탬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앵커:
필리핀이나 외국에 나가서도 종이접기 강의 많이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김영만:
네, 저희 종이문화재단이 비영리단체예요. 그래서 저희가 몽골에는 거의 4년째 한 해도 안 빠지고 가서 울란바트로 대학과 시내 전체에 있는 대학교수,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계속 가르쳐왔고요. 작년과 올해에는 필리핀에 갔다 왔고요. 저희 원장님들 2~30명이 전부 자비로 가서 눈물 흘리고, 모든 걸 주고 옵니다.

앵커:
네, 1189번님, “선생님 89년인가요. 과천에서 선생님 유치원에서 종이접기 배웠어요. 옆에 있는 교회에서도 좋은 말씀 해주셨고요. 선생님과 같이 사진 찍는 모델도 하고, 같이 고구마 캐러 가서 찍은 사진도 아직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코딱지가 이제 아이 아빠가 되었네요.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합니다. 89년 과천 유치원, 기억 나시나요?”

김영만:
네, 제가 미술학원을 운영했을 때에요. 와, 이 친구 얼굴 한 번 보고 싶네요. 저희 유치부 제자 같은데, 맞아요. 고구마 캐기 견학도 가고, 많이 다녔어요. 친구야 반가워~ 잘 있지?

앵커:
네, 이분 번호는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 나누다 보니까 워낙 시간이 빨리 갔는데요. 앞으로의 꿈, 계획이 궁금한데요.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김영만:
저는 미술관도 제 꿈이었습니다. 그 미술관도 지금 빚을 내서 열심히 미술관도 지어서 하고 있고요.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도서지방에, 아직 문화의 혜택을 많이 못 받는 아이들, 우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많아요. 섬, 아니면 깊은 산 속에 작은 유치원, 작은 분교를 우리 뜻 있는 원장님들이 모여서, 색종이를 싸가지고 가서, 아이들 가르쳐주고 선물도 주고, 그러고 싶습니다.

앵커:
비영리단체라고 하셨는데, 수익이 특별히 없으실텐데요. 그러면 그 운영비 같은 것은 어떻게 하나요?

김영만:
네, 수익은 거의 없습니다. 비용은 거의 저희 이사장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앵커:
아, 그렇군요. 4932번님, “원장님 종이접기 방송은 계속 하실거죠?” 이렇게 물어보셨네요.

김영만:
저는 일단 출연자에 속하기 때문에, 방송을 하고 안 하고는 방송국의 감독님들의 권한이라고 할까요?

앵커:
그래도 본인은 계속 하고싶으실 것 같은데요?

김영만:
네, 저는 계속 하고 싶은데요. 서로 절충을 해서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것이고요. 혹시 어린이프로가 만들어져서 섭외가 온 다면 맨발벗고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4939번님, “선생님 대림동 서홍석 기억나시나요? 저 홍석이 엄마예요. 돌아가신 친정 엄마 만난 것처럼 반가워요. 홍석이가 카톡에 사진도 올렸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보내주셨네요. 방송에서 보던 친구들에게 라디오를 통해서 한 마디 해주시죠?

김영만:
네, 우리 친구들, 일단 많이 고맙고요. 제가 눈물 날 정도로 힘들게 지금까지 이렇게 커왔다는 것이 일단 울컥하고요. 여러분들, 힘 내시고, 젊음은 도전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나가느 것이 도전이죠. 우리 친구들, 정말 헤쳐나간다면 훌륭한 어른이 되지 않을까, 친구들 파이팅입니다!

앵커:
종이접는 일 말고, 혼자 다니실 때, 여유 있을 때, 어떤 일을 하세요?

김영만:
습관적으로, 혼자 가만히 있으면 손에 종이를 잡게 돼요. 어떻게 생각하면 참 웃긴 이야기인데요. 저 같은 경우는 취미와 일이 연결되어서, 어떻게 보면 참 행복한 거죠. 그런데 주로 종이를 안 잡으려고 여행을 많이 떠나거든요. 여행을 가면 핸들을 잡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행 다니면서 힐링을 많이 합니다.

앵커:
문자가 정말 많이 왔는데요. 이제 원장님과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신청곡을 하나 신청하시면 저희가 같이 청취자 여러분과 듣게 되는데요. 어떤 노래 신청하시겠습니까?

김영만:
제가 예전에 즐겨 듣던 노래인데요. 요즘 친구들이 알지 모르겠어요. 이글스가 부른 ‘호텔 켈리포니아’라는 노래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종이문화재단 김영만 평생교육원장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영만: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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