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시간 : [월~금] 10:30~11:30
  • 진행: 박귀빈 / PD: 이은지 / 작가: 김은진

인터뷰 전문

서훈 1,2 등급 안에 ‘전설의 호랑이’ 다섯 마리가 있다고?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2-10-28 14:04  | 조회 : 812 
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2년 10월 28일 (금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슬기로운 라디오생활>은 우리 일상에서 보훈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국가보훈처와 함께 하는 특별기획 <슬기로운 보훈생활>을 진행합니다. 오늘은 본격적인 첫 시간으로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함께 우리 독립운동가 가운데 '전설의 호랑이'로 불린 인물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스튜디오에 직접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이하 박환): 안녕하세요.

◇ 이현웅: 오늘 본격적인 얘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앞서서 제가 말씀을 드렸죠. “독립운동가 가운데 다섯 호랑이가 있다”, 제가 아는 그 호랑이를 상징하는 게 맞습니까? 용맹함, 이런 걸 나타내는 건가요?

◆ 박환: 그렇죠. 우리 동포들이 가장 존경하는 상징적 인물, 그러면서도 또 일본 군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 그것을 상징적으로 ‘호랑이’라고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현웅: 그러면 그 ‘전설의 다섯 호랑이’, 누구입니까?

◆ 박환: 신돌석 장군이라든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오동진 장군, 김동삼 장군 이렇게 5분을 일반적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 이현웅: 대표적으로 이 다섯 분을 ‘전설의 호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한 분씩 알아보는 시간 가져보도록 할게요. 먼저 가장 활동 시기가 빠른 신돌석 장군인데, 이분은 일반 호랑이가 아니고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다고요?

◆ 박환: 이분의 출생 지역이 경상북도 영덕이라는 지역인데, 예전에는 영해라고 했습니다. 이쪽에 산이 태백산이 있고요. 태백산을 근거지로 해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고 해서 보통 ‘태백산 호랑이’라고 언급하고 있죠.

◇ 이현웅: 신돌석 장군은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죠.

◆ 박환: 일반적으로는 의병 활동은 양반이라든가 또는 지방 양반들이 주로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예외적으로 평민으로서 의병에 동참한 그런 분이셨고. 이분이 평민으로서 참여한 이후에 수많은 평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했다는 측면에서 이분이 평민 출신이라는 점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현웅: 출신 의병장이면 다른 의병들, 예를 들어 유생들, 말 잘 듣습니까?

◆ 박환: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었겠죠. 그래서 사실은 의병 투쟁할 때 그런 일정한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 같은 경우는 평민 출신이지만 원래는 집아니 중인 지방의 아전의 후손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고, 그래서 아무래도 지도자가 평민이니까 평민들이 많이 참여하고. 또 영덕이라는 지역이 산도 있지만 바다가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민들도 많이 참여를 했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신돌석 장군의 시 한 편을 준비를 해 주신 것 같은데, 교수님이 낭독을 해 주시겠어요?

◆ 박환: 제가 간단하게 설명과 더불어서 낭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돌석 의병장은 1895년에 을미사변, 명성황후가 일본의 군에 의해서 잔인하게 시해된 이후 1904~1905년에 러일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러일전쟁이 국내에서 벌어질 때 바로 월송정이라고 하는 영덕에 있는 정자에서 이 시를 읊으셨습니다. 제가 잠깐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여기서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한다’, 얼마나 한스럽냐는 것인데. 그러니까 ‘내 스물일곱 살을 (바쳐) 과감히 조국을 위해서 투쟁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현웅: 저는 또 궁금한 게, 의병들이 낡은 옷을 입는 것을 많이 봤고, 또 무기도 변변치 않았던 자료들을 봤는데, 어떻게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했던 겁니까?

◆ 박환: 무기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열세했죠. 일본은 신식 조총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 당시에 ‘화승총’이라고 하는 구식 무기를 갖고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신적인 측면에서, ‘의’는 의병 아니겠습니까? ‘옳을 의’ 자. 정신적인 측면에서 강한 무장을 하고, 특별히는 태백산을 중심으로 해서 지리적 위치를 잘 아니까 유격전을 통해서 무기의 열쇠를 극복하고 투쟁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현웅: 참 멋지네요. 정신력이 대단합니다. 다음으로 넘어가 볼게요, ‘나는 호랑이’라고 불리는데, 홍범도 장군이에요. 지난해 이분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모습 다 지켜봤는데, 많은 분들이 ‘봉오동전투의 영웅’,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아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병장 출신이라고요?

◆ 박환: 네, 그렇습니다. 원래 홍범도 장군은 평양 출생인데요. 함경도 산수갑산 쪽에서 의병투쟁을 했고. 또 러시아로 이동해서도 크라스키노 지역을 중심으로 ‘호랑이 사냥’, 의병투쟁을 하셨고요. 그러한 혁혁한 공헌이 있고. 특별히 대표적인 것은 봉오동전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1937년에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 이주를 당하셨는데, 작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해서 유해가 대전 현충원으로 봉환이 됐죠.

◇ 이현웅: 홍범도 장군의 설명을 보면, ‘총 잘 쏜다’는 얘기가 많더라고요. 얼마나 잘 쏘는 겁니까?

◆ 박환: 네, 사격의 명수로 알려져 있고요. 특별히 이분이 함경도에서 포수로서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옛날에 화승총이라는 것이, 한 발 사격을 하고 또 한 발을 사격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넘어버리면 바로 자기의 목숨하고 직결이 되지 않겠습니까. 포수 가운데서도 특별히 더 사격술이 뛰어났던.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훈련을 하고 (실력을) 닦았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일제가 홍범도 장군을 상당히 무서워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많이 두려워했습니까?

◆ 박환: 일본 측 정보 기록들에 따르면 의병 활동을 할 때뿐만 아니라, 특히 함경도 지역 그리고 러시아의 크라스키노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할 때에도 상당히 많은 일본군들을 몰살시켰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졌고요. 특별히는 1920년 6월에 만주의 봉오동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굉장히 두려워했던 것으로 여러 보고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 이현웅: 저희가 앞서 얘기했지만 유해가 작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단 말이죠. 그런 혁혁한 공을 세웠던 홍범도 장군이 어떻게 하다가 카자흐스탄에 정착을 하고 고려극장 수위를 하다가 돌아가시게 된 겁니까?

◆ 박환: 그분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후에 1922년에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거기서 집단 농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스탈린의 러시아 지역의 우리 한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서 37년 9월경에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 이주 당했고. 그러면서 그 지역에서 노년 생활을 보내면서, 키질로르다에 고려극장이 있습니다. 저도 현장에 가 봤습니다마는 그쪽에서 수위로 생활을 하시다가 거기서 돌아가셔서 카자흐스탄의 중앙공원 묘역에 묻히셨다가 작년에 우리나라로 유해가 봉환됐던 것이죠.

◇ 이현웅: 세 번째 호랑이 만나보겠습니다. 이번에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인데요. 1920년 청산리전투 승리를 이끈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말로 하면 이분이 ‘금수저’라고요? 왜 그런 겁니까?

◆ 박환: 네,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 지역에 대표적인 지주 집안, 양반 집안에서 출생을 했고요. 그리고 안동 김 씨 가문이었고 집 안에 상당히 많은 토지와 노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요. 최근에 김좌진 장군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홍성지역에 있는 자기의 토지를 매매하는 매매 문서도 또한 최근에 발굴이 됐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근데 김좌진 장군이 독립운동을 시작할 때, 사실은 친구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는 것 같은데 이건 무슨 얘기예요?

◆ 박환: 아무래도 젊은 시절, 어린 시절에는 친구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김좌진 장군 같은 경우 홍성의 갈산이 고향입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친구의 도움도 받았고. 김좌진 장군 같은 경우는 가문의식이 안동 김 씨라는, 그리고 근대 개화파로서 널리 알려진 김옥균 집안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부터 일제히 혁명의식도 가졌고. 또 조선시대 때도 왜적과 싸워서 큰 승리를 거뒀던, 집안에 국가에 대한 의식을 가졌던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셔서 또 집안의 영향도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독립운동하려고 그러면 돈도 많이 필요하니까, 혹시 ‘금수저’ 친구를 꼬드긴 거 아닐까요?

◆ 박환: 그런 것도 물론 있을 수도 있겠죠. 다만 친구들과 더불어서 병정놀이를 했다든가, 또는 한문을 어렸을 때 배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친구의 아버님이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 분이셔서 그런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1920년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무장투쟁의 가장 중요한 해 중에 하나다, 이렇게 들은 것 같은데. 대체 이때 무슨 일들이 있었습니까?

◆ 박환: 1919년에 3.1운동이 있지 않았습니까? 3.1운동 후에 일제가 평화적인 만세 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탄압을 했죠. 그래서 일제의 우리 동포들에 대한 탄압에 저항을 해서 1910년대에 만주 지역에는 신흥무관학교라든가 독립군 양성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국내로 들어오는 활발한 여러 활동들이 있고요. 아울러서 만주벌의 이러한 우리 독립군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일본 병력들이 출병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제 만주벌에서 봉오동전투라든가 청산리전투라든가, 이러한 수많은 독립 전쟁들이 벌어지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현웅: 앞서서 잠깐 설명을 했지만,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21일이 시작이 된 날인데, 이때 어떻게 이런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겁니까?

◆ 박환: 1차적으로는 김좌진 장군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더불어서 만주 지역에 있는 수많은 동포들, 특별히 청산리 지역에 있는 동포들이 총탄을 무릅쓰고 식사를 제공한다든가. 특히 아낙네들이 이렇게 주먹밥을 싸서 포탄이 옴에도 불구하고 (오고) 적극적으로 주민들의 도움도 있었고요. 아울러서 국내외에 있는 수많은 동포들이 군자금을 내서 러시아에서 체코 군이 파는 무기를 많이 구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모신나강 소총이라든가 맥심 기관총이라든가 수류탄이라든가, 국내에 있는 동포들의 지원, 이런 것들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북로군정서군을 이끌고 승리를 한 건데, 북로군정서는 주로 북쪽에서 활동을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여진 건가요? 그럼 ‘서로’, ‘동로’, ‘남로’ 이런 것도 있었어요?

◆ 박환: 맞습니다. 그 당시에 보통 두만강 건너 지역을 ‘동만주’ 또는 ‘북만주’ 지역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쪽에 북로군정서가 있었고 압록강 건너 쪽으로는 기본적으로 서쪽이기 때문에. 그쪽은 지금의 랴오닝성 쪽이 되겠습니다마는 이쪽을 보통 서간도라고 하고.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 또 북간도 지역에는 북로군정서. 그래서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을 했던 분이시죠.

◇ 이현웅: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쟁취한 승리라고 볼 수도 있는 거네요?

◆ 박환: 네, 그렇습니다. 김좌진 장군이나 또는 북로군정서나 특정 개인이나 단체보다도, 만주 지역뿐만 아니라 국내에 있는 모든 동포들의 성원, 지지,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전투라고 볼 수 있고요. 또 청산리전투는 특별히는 대규모의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한테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준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이현웅: 다음 호랑이 만나볼게요. 이번에는 ‘만주 호랑이’인데, 김동삼 선생. 전투 능력보다는 불 같은 성격 때문에 호랑이로 불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박환: 꼭 그렇지는 않고요. 그런데 성격이 굉장히 급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물론 호랑이라고 불리는 측면이 있지만, 이분은 호랑이처럼 대담한 그러한 결단력이 있는 그리고 추진력이 있는 또 지도력이 있는 그런 지도자였기 때문에 ‘만주지역의 호랑이’라고 불린 분이시기도 합니다.

◇ 이현웅: 이분이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분이에요?

◆ 박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도 큰 기여를 하셨고요. 아울러서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로 구성된 ‘신흥하구단’이 있습니다. 신흥하구단의 총단장을 했고. 이분들이 중심이 돼서 유격을 하기 위해서 유격 근거지를 만들거든요, 그것을 백두산 서쪽에다 만듭니다. 그래서 이름을 ‘백서농장’이라고 했는데 그 농장의 총책임자로서 독립군 장교 양성에 그리고 국내 진공작전, 국내로 추돌하는 작전에 큰 기여를 했던 장군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이현웅: 그런데 1931년 하얼빈에 진입을 하려다가 일제히 붙잡히게 되는 거죠.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8년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는데, 이때 만해 선생이 영구를 껴안고 대성통곡했다고요?

◆ 박환: 이분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돼서 옥고를 치르시다가 결국은 일제의 고문과 잔인한 행동들에 의해서 결국은 옥중 순국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순국했을 때 그 시신을 받아서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감시가 있으니까 거기 갔다가는 잘못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시신을 직접 인도하셔서 장례를 치러주는. 그리고 그때 여운영 또는 이흥로라든가 국내에 있는 수많은,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김동삼 일송 어른의 장례에 참여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 이현웅: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청취자분들 의견도 소개 드릴게요. 0830님, “유공자의 한 사람입니다. 이런 시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 주고 계시고요. 7793님도 “저희 외조부도 독립운동 했다고 하던데 이런 옛날 얘기에 아무도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방송에서 다뤄주시니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226님, “저도 보훈 가족입니다. 좋은 코너 기획 감사합니다. YTN 라디오 잊지 않을게요”, 이렇게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소하게 느껴진 분이었는데, ‘항일 무장투쟁의 3대 명장’이라고 불린 오동진 장군입니다. 이분에 대한 설명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박환: 오동진 장군은 평북 의주 출생인데요. 특히 압록강 건너 서관도, 또는 남마주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쪽 지역의 항일 명장으로 알려져 있고요.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광복군 총영의 총사령관이라든가 또는 1920년대 중반에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의 총사령관을 하셨던, 그러니까 ‘남만주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호랑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 이현웅: 보통 출생 따라서 이름이 붙여지나 봐요? ‘백두산 호랑이’로 불렸다고요?

◆ 박환: 그리고 의주 쪽에서 백두산이 그렇게 멀지 않고요. 또 활동의 근거지가 대체적으로 그쪽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이현웅: 일제 입장에서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호랑이다’, 이렇게 불렸다고요?

◆ 박환: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이분이 1927년에 체포가 됐는데 우리 독립군 중에 한 분이 변절을 해서, 소위 말하면 밀정에 의해서, 우리 동포에 의해서, 그 당시에 일본 경찰로 근무하던 김덕기라고 하는 친일 경찰에 의해서 체포 투기 되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분이 되겠습니다.

◇ 이현웅: 체포되고 재판받을 때 독립만세를 계속해서 외쳤다고 하는데, 광복 1년도 남지 않았을 때 순국하셨다고요?

◆ 박환: 1944년 11월에 공주형무소에서 순국을 하셨거든요. 원래 공주형무소 같은 경우는 질병이 있거나 그런 분들이 대체적으로 투옥되는 감옥인데. 이분이 너무나 고문을 받아서 그리고 또 감옥 속에서도 만세 운동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분이 되겠습니다.

◇ 이현웅: 이렇게 ‘다섯 호랑이’라는 주제를 잡아서 오늘 한 분 한 분 알아봤는데요. 이런 분들이 계셨다고 하니까 자부심도 느껴지고요, 또 감사한 마음도 함께 생겼습니다. 저희 청취자 분들께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박환: 우리 독립운동가들 가운데는 저희한테 많이 알려진 인물도 있고 또 이렇게 서훈을 받으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는 가운데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거나, 그런 이유 때문에 독립운동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한테 기억에서 잊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그 잊힌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애정과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이현웅: 관련 자료가 있다면 끝까지 발굴하려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슬기로운 보훈생활>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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