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플러스
  • 방송시간 : [월~금] 15:00~16:00
  • 진행 : 김우성 / PD: 김우성 / 작가: 이혜민

인터뷰 전문

[생생경제] 복직할 때까지 투쟁할 겁니다.(김진숙 지도위원)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0-09-18 16:49  | 조회 : 2448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15:10~16:00)
■ 진행 : 김혜민 PD
■ 대담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생생경제] 복직할 때까지 투쟁할 겁니다.(김진숙 지도위원)

◇ 김혜민 PD(이하 김혜민)> 코로나19로 도둑맞은 2020년이지만,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계절의 순환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이 어디 있나 싶어요. 세상사가 다 계절의 흐름만큼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흘러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죠. 35년 전 시간이 멈춘 한 노동자가 있습니다. 35년을 해고자로 또 투사로 살아온 그녀에게 계절의 변화는 어떤 의미일까요? 2011년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을 반대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309일 펼친 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과 오늘 생생인터뷰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하 김진숙)> 네. 안녕하세요.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입니다. 

◇ 김혜민> 해고 노동자 김진숙입니다라고 본인 소개를 하셨어요. 원래 그렇게 소개를 하세요? 

◆ 김진숙> 원래는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으로 소개를 많이 했는데, 저도 이제 해고라는 게 저한테는 아픔이고 이게 미완이지 않습니까, 복직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으로 소개를 했었는데 이제는 제 이름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 김혜민> 해고자, 투사 이게 아니라 노동자 그 이름을 찾고 싶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럼 저는 뭐라고 호칭할까요? 

◆ 김진숙> 김지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 김혜민> 저는 김지도님으로 호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김지도님 만나러 부산에 제가 왔어요. 제가 먼 길을 오게 된 이유는 평소에 너무 뵙고 싶은 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코로나19로 가장 힘든 사람들이 노동자들이거든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정말 해고의 위험을 코앞까지 느끼고 있는 그런 노동자들에게 김지도님의 삶이 위로가 되고 좀 희망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왔는데 일단 그 노동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 김진숙>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프리랜서라고 불리는 분들 같은 경우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고, 더 힘든 거는 이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 같은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조건 속에 처해있는데 저는 정부에서 이런 분들에 대한 지원책들이 우선적으로 나와야 되지 않겠나 생각을 하고, 이런 위기 상황들이 닥치면 어려운 사람들이 훨씬 더 어려워지는 그러면서 빈부격차가 오히려 더 심해지는 상황들에 대해서 정부가 좀 대책을 내놔야 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 김혜민> 자 오늘 생생초대석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오늘 부산에서 인터뷰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35년을 해고자로 산 분의 삶을 어떻게 단 몇 분에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우리 청취자분들께 김지도의 삶의 투쟁을 좀 소리로나마 전해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로 제가 나눠서 질문을 드릴게요. 먼저 2020년 현재 두 가지 이슈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하나는 암 투병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일단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떠세요?

◆ 김진숙> 암이라는 병이 수술하고 항암하고 이러고 끝나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관리를 해야 되는데, 저는 사실 관리를 해라, 건강해라 이런 인사들을 굉장히 많이 받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모르는...

◇ 김혜민> 그것도 해 본 사람이나 해보죠.

◆ 김진숙> 항암을 하면서도 부작용에 대해서 머리카락이 빠진다, 눈썹이 빠진다, 구토가 심하다 이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손에 꼽을 수 있는 부작용만 해도 수십 가지인 거예요. 심지어는 항문까지 다 아파서 앉지도 못 하고 걷기도 어려워지고 관절통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자고, 잠이 안 와사 못 자는 거랑 아파서 잠을 못 자는 거랑은 질이 천지차이이지 않습니까?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우울증도 심해지고 지금은 어쨌든 사람들을 만나고 복직이라는 목표를 앞에 두고 있으니까 힘을 내야 되고. 그 전엔 사실 체력 문제 때문에 출근 투쟁도 일주일에 두 번만 나갔는데 이제 9일부터는 매일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은 되는 것 같습니다.  

◇ 김혜민> 말씀 중에 또 하나 이슈를 얘기하셨어요. 복직 투쟁, 올해가 정년이신 거죠. 

◆ 김진숙> 올해가 정년입니다. 

◇ 김혜민> 정년을 앞두고 이제 다시 정말 내 이름을 찾고 싶다. 그 이유가 복직 투쟁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셨어요?

◆ 김진숙> 그렇죠. 이게 사실 암 투병이나 코로나 아니었으면 진작 복직 투쟁을 시작을 했어야 됐는데 계속 그런 상황들 때문에 미뤄져 왔던 거고, 지금 정년이 3개월 채 남지 않았는데. 사실 정년이 지나도 복직이 안 되면 저는 계속 할 거기는 해요. 정년이라는 게 또 이제 자본이 정해 놓은 기준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 전에 어쨌든 해결이 됐으면 좋겠고. 저랑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 그리고 현장에서 같이 했던 동년배들이 다 나간 거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현장에서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들이 아무도 안 남아있어요. 지금도 출근 투쟁하다가 이렇게 보면 조합원들한테 인사를 하면서도 ‘점마가 나보다 아래였네‘ 이제 이런 마음으로 서 있는데 어쨌든 그런 절박함들이 있습니다. 

◇ 김혜민> 제가 서울에서 혼자 오지 않고요. 선물을 좀 가져왔어요. 우리 김지도님의 복직을 응원하는 마음의 컷을 좀 담아왔거든요. 한 번 일단 들어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변상욱 기자입니다. 기사를 쓸 때는 김진숙씨라고 썼다가, 김진숙 위원이라고 썼다가, 김진숙 지도위원이라고 쓰고 기사를 쓰는 거와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건낸다고 하니까 되게 떨립니다. 사실 저랑 아마 나이 한 살 차이 정도 제가 조금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동시대를 살아 왔고 해고 소식, 복직 투쟁 소식, 체포 소식, 수배 소식, 타워크레인 농성소식, 희망버스 소식 김 위원의 기사를 그때, 그때 쓰면서 어떻게 보면 저도 늙어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복직 투쟁이라고 하니까 그 말에 가슴이 좀 먹먹해지더라고요. 아이고,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투쟁이겠거니 이번엔 꼭 복직을 해야 되는데, 맨날 그 명단에서 빠지고 하던 그때 생각들도 나고 아무튼 이번에 꼭 복직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 위원의 복직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복직이기도 하고 이 나라의 노동의 존엄이 그래도 조금은 회복되는 것이기도 해서 꼭 복직에 성공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죠. 이게 뭐 딱딱한 얘기만 해서 죄송합니다만, 김 위원의 타워크레인 농성 때 너무 오랫동안 하셨기 때문에 300하고도 며칠 더 하셨죠? 309일인가요, 310일인가요, 많은 얘기들이 우리끼리 했습니다. 그중에서 한 얘기가 뭐냐면 희망이 달보다도 오히려 멀다, 왜냐하면 달은 보이는데 희망은 안 보이니까 그 얘기 많이 했죠. 그리고 도대체 왜 노동자는 타워크레인을 오르고 또는 기둥 끝까지 올라가야만 하는가. 바닥을 길수도 없어서 짓밟히다, 짓밟히다 못해 이제는 올라가서 고공에 매달려야 되는 노동자의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계속 노동이 무너져가면 희망이란 있는 걸까라는 고민도 하고, 희망은 원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언제나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서로를 위로 했는데 희망은 언제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기도 해서 다시 복직투쟁을 한다니까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기도 하고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김혜민 피디가 이걸 들고 가서 전달한다고 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운을 내시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요. 젊은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또 어떤 노동의 희망으로 우리 사회에서 오래 오래 자리매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라도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

◇ 김혜민> 그 말이 참 인상 깊었어요. 김진숙이라는 노동자의 해고, 투쟁의 기사를 쓰면서 나도 늙어왔다 그 말이 참 찡하면서 은퇴를 한 언론인과 정년을 앞둔 해고노동자의 오작교 역할을 제가 했습니다. 그래도 그 긴 시간을, 어려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거 이런 분들 때문이겠죠?

◆ 김진숙> 그렇죠. 2011년도 크레인 농성 이후에는 우리 사회의 정말 다양한 곳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치열하게 사시는 분들이 많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었는데요. 저는 그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 같아요. 늘 보는 사람들하고 늘 같은 공간에서 늘 같은 얘기들을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면서 제 딴에서는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크레인 농성 이후에는 훨씬 넓어진 세상을 그리고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에서 자기 삶들을 혹은 다른 이들의 삶을 보살피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크레인 농성 때 저런 사람이 나를 응원을 하네, 특히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 그 다음에 영화감독이라든지 퀴어 성소수자분들이라든지 장애인분들이라든지 제가 접할 수 없었던 공간에서 너무나 많은 분들이 자기 삶들을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확인을 했었죠.  

◇ 김혜민> 나 혼자 맨몸으로 싸워오는 줄 알았는데 그냥 영도의 아주 작은 노동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하고 연대하고 있다는 거를 그때 깨닫게 되신 거네요?

◆ 김진숙> 눈으로 확인하고 그 힘을 사실 투쟁을 끝맺음하고 내려올 수 있었죠.  

◇ 김혜민> 제가 또 받아왔어요. 한 번 들어보세요. 

- 믿어지지가 않네요. 86년이면 전두환 정권 때인데 그때 해고된 김진숙씨가 지금까지 복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동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있었고, 지금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는 김진숙씨에게 빚을 졌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복직은 그 빚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갚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김진숙씨가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아닌 용접공 김진숙이 되어 조선소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올 수 있도록 힘을 합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김 지도위원님, 건강하셔야 됩니다. -

◇ 김혜민> 홍세화 선생님께서도 선생님 얼굴 신문을 펴놓고 혼자서 동영상을 찍어서 저한테 보내시면서 너무 어색해서 자기가 못하겠다고. 근데 하실 말씀 다하셨더라고요. 참 감사하고요. 함께 투쟁해오고 연대해온 분들이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거 그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김 최고위원의 삶을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아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특히 요즘 세대 사람들은. 저도 이번에 공부하면서 알았고요. 35년 전에 여성 최초 용접공이셨어요. 어떻게 용접공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 김진숙> 일단 월급이 많다고 그랬고. 근데 월급이 많다는 것도 보니까 잔업을 그만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노동 강도가 다른 노동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제가 조선소에 들어가기 전에도 옷 만드는 공장도 다녀보고 가방 만드는 공장도 다녀보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해보고 신문 배달도 해보고 시내버스 안내양도 해보고 쉽게 살지는 않았는데 조선소 노동이라는 거는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 강도예요. 시간이 길기도 하지만 잔업까지 하면 거의 12시간을 일을 해야 되고 그때는 조선경기가 활황일 때였으니까 일이 많을 때는 철야까지도 연달아 며칠씩 하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일 자체가 굉장히 힘들어요. 오르락내리락하고 천장 용접을 해야 되고 수그리고 처박고 용접해야 되고 이런 몸을 쓰는 일들이 굉장히 힘듭니다. 노동에 비하면 결코 많은 임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가 일했던 곳과는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으니까 그게 우선 입사를 꼭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두 번째는 좀 멋있어보였습니다. 그때는 용접을 겪어보기 전이니까. 그냥 그림만 보고 굉장히 멋있는 말만 들어도 멋있어 보이는 이런 거였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거죠.  

◇ 김혜민> 당시 노동자의 삶이라는 게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여성 노동자의 삶은 어땠을까? 특히 김지도 빼고 다 남성들이었죠? 

◆ 김진숙> 대부분 다 그렇죠. 아줌마들이 몇 분 계시긴 했는데 그분들 같은 경우는 남편이 한진에서 그때는 조선공사였는데 조선공사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셨거나 아니면 거동을 못하게 장애를 크게 입으셨거나 그래서 보상 차원에서 부인이 대신 입사한 경우 이래서 몇 분이 계셨는데. 그때 당시 제가 입사했을 때 직장이 그러더라고요. 자격증 따고 들어온 건 네가 처음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던데. 제가 다른 공장, 다른 일들을 안 해봤으면 조선소에서 하루도 못 버텼을 거예요. 다른 일들을 해보다가 가니까 여기 나가봐야 보세 공장이고 가방 공장이고 시내버스 안내양이고 이러니까 못 나가겠더라고요. 너무 힘드니까 달리 도망갈 때는 없고 죽자는 생각을 했던 게 21살, 22살 때 지리산에 겨울에 혼자 올라가서.. 그때 아마 그날 해가 안 나왔으면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죽으려고 올라갔는데 그때는 너무 체력이 좋을 때니까 가보니까 천왕봉까지 벌써 올라왔더라고요. 근데 그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의 일출을 본 거예요. 근데 그 일출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냥 해가 갑자기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이 물들어가는 과정들이 그러고 나서 두 시간 만에 해가 봉긋 떠오르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하는 억울함들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북받치는 그런 느낌들이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내가 죽을 수는 없다, 1년만 더 살아보자 이러다가 노동조합을 알게 됐죠. 

◇ 김혜민> 살기 위해 노동조합을 선택하신 거네요.  

◆ 김진숙> 그렇죠. 제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노동조합밖에는 없었어요. 너무 지옥 같은 현장, 그리고 다쳐도 죽어도 산재처리도 안 되는 공장에서 제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나마 노동조합을 통해서 뭔가를 바꿔내는 일들이 제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김혜민> 그런데 5년 만에 해고를 당하신 거예요? 그 이유가 노동조합 때문인가요?

◆ 김진숙> 노조 대의원에 출마를 했죠. 근데 저는 노동조합이 뭔지를 정확하게는 잘 몰랐어요. 노동조합이 있다는 거는 알았는데 노조가 그때는 완전히 어용노조였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그런 노조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고 노동조합에 대한 분노가 훨씬 컸습니다. 

◇ 김혜민> 기업인들에 대해서 보다? 

◆ 김진숙> 그렇죠. 회사 놈들은 원래 나쁜 놈들이고, 저 놈들은 원래 노동자를 착취해서 배를 불리고 몸집을 키워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노동자들은 다 아니까. 그런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되고,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줘야 되는 노동조합의 간부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회사보다 더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일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그건 제가 대의원에 당선되고 나서 여러 건을 확인을 해서 밝혀진 사실이기도 한데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20~30년 다닌 아저씨들을 더 잘 아시는 거죠. 30년 다닌 아저씨들도 노동조합에서 주는 거는 3월 10일 날 그때는 근로자의 날이었잖아요. 비누 한 장씩 주는 게 전부 다였던. 조합비는 꼬박꼬박 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오히려 조합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회사가 먼저지, 회사가 있어야 되는데, 이런 얘기를 노조 간부들이 먼저 하게 되고 상여금, 보너스를 지급을 해야 되는데 오히려 노조가 먼저 나서서 회사가 어려우니까 지급을 안 해도 된다는 거를 지들끼리 합의를 해주는 거예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분노가 어마어마하게 있었죠. 그때 87년도에 7월 달에 파업을 그때는 거의 폭동 수준이었죠. 할 때 당연히 회사를 먼저 가서 깨부셔야 되는데 쇠파이프 들고 다 노조로 간 거예요. 노조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났던 역사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도망갔던 것도 회사 관리자들보다 노조 간부들이었고. 

◇ 김혜민> 근데 그런 와중에 대의원으로 나가신 거예요? 

◆ 김진숙> 그렇죠. 그때는 대의원에 출마를 한다고 했을 때 아저씨들이 그냥 평소에 바른 말하고, 어쨌든 여자애가 처음 들어와서 근로기준법 얘기도 하고 돌아다니고 이러니까 아저씨들이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그런데다가 현실하고 안 맞은 얘기들을 자꾸 하는 거야, 그러니까 잔업 한 시간이라도 더 해야 먹고 사는 아저씨들한테 이건 강제 근로입니다, 우리는 다섯 시, 여섯 시에 퇴근할 수 있습니다 서명해주세요 이러고 돌아다니니 그 말이 먹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저씨들이 저보면 막 피하고 이랬었는데. 그러면 네가 한 번 대의원 나가봐라 이런 거죠. 그러니까 저는 이제 멋도 모르고 나의 진가를 이제야 인정해주네 이러면서 아저씨들한테 대우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저씨들한테 인정받는 느낌. 그랬는데 웬걸 회사 분위기들이 이상해지고 그런 시작이었죠. 

◇ 김혜민> 회사에서도 알았겠죠. 김지도가 대의원이 되면 내 맘대로 노조를 어용노조로 만들 수 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겠죠. 위기감이 있었을 거라는 건 예상은 가지만 그래서 해고를 한 거예요. 그리고 몇 년을 지금까지 복직 투쟁을 하시는 거죠?

◆ 김진숙> 35년째 해고되어 있는 거니까요. 

◇ 김혜민> 근데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런 우문을 드린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어요. 

◆ 김진숙> 쌍용차 노동자들도 투쟁을 하면서 제일 억장이 무너졌던 질문이 그거였을 거예요. 다른 데 가지.. 2003년도에 김주익 지회장이랑 곽세규 형이랑 두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을 때 부산 지하철에 노조에서 붙인 대자보가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억울함과 부당함에 대해서 대자보가 붙였었는데. 그 대자보를 본 청춘남녀가 ‘저렇게 억울하면  딴 데 가서 일하면 되지, 왜 저기서 죽어?’ 이 얘기를 하는데 제가 그 친구들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사람이 억이 막힌다는 거잖아요. 말은 안 나오고 막 가슴은 벌벌 떨리고 그러다가 지하철이 들어와서 그 친구들은 타고 가버렸습니다. 할 말이 있는데 말 할 수 없는 상황들, 저는 우리 사회의 그게 억울이라는 건데 그렇게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렇게 억울함을 풀지도 못하고 죽음들이 너무 많은 사회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억울함 사람이 없는 게 민주사회라고 믿는데요. 단순히 해고라는 게 생계의 문제였으면 다른 데로 가겠죠. 근데 그때 노동조합 활동을 할 거를 빨갱이, 불순분자, 김일성의 막내딸, 평양 김씨... 심지어는 뭐 때문에 그랬다는 설명조차도 저한테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배후조종자가 누구냐, 삼촌이 고정간첩이다, 언제 접선 했냐, 삼촌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한테.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 우선 저는 그때 당시에는 이게 잘못된 일이고 이걸 바로잡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그리고 누구라도 그거를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었습니다. 네가 뭐가 잘못됐고, 왜 해고됐고 왜 네가 이런 활동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제발 부디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어요. 

◇ 김혜민> 시대에 온 몸으로 질문을 던지신 거네요. 그냥 용접공으로 정당하게 노동하고 정당하게 살고 싶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 세상이 설명해달라고 온 몸으로 항의하신 거예요. 그걸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치부하는 게 어떻게 보면 우리 김지도에게는 너무 모멸감 이상을 느끼게 했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 반응들이.  

◆ 김진숙> 심지어 가족들한테도 상처를 받죠. 가족들도 딴 데 가서 돈 벌면 되지, 왜 그 고생을 하고 그러고 있냐, 너 때문에 조카들까지 잘못되면 어떻게 하냐라는 얘기도 하고, 너 때문에 형부가 진급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언니들도 잘 안 봐요. 지금도 그게 저는 상처고 그런 세월들이 있는 건데요.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저는 KTX 여승무원들 투쟁할 때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해고자는 섬이다 섬, 무인도 파도한테 시달리고 누구도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따로 떨어진, 태풍이 오면 그 태풍을 혼자 다 맞고 버텨야 되는 무인도다라는 얘기를 했었는데요. 친구들한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느 순간 웃고 얘기를 하다가도 그냥 그들이 문득 문득 내뱉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노태우가 코가 커서 잘생겼다라는 얘기를 하고 전두환이 그래도 그렇게 밀어붙여서 경제를 살렸다라는 얘기들을 하는데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 저는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얘기를 하면 저는 18살 때 그 손가락을 미싱에 박아가면서 커피마실 돈도 없으니까 타이밍을 사먹어 가면서 일했던 그 노동들이 생각이 나는 거거든요. 근데 그냥 이런 얘기들을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저 사람들을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 참 막막할 때가 많아요. 저는 하여튼 그런 세월들 끝내는 게 저한테는 복직이죠.   

◇ 김혜민> 아까 앞서 동료들 이야기도 하셨지만 사실 투쟁의 역사 가운데 동지들을 먼저 떠나보낸 거 그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실 것 같은데 제가 그래서 뉴스를 좀 찾아봤더니 그 당시의 인터뷰하신 게 좀 있으시더라고요. 그리고 이 뒷부분에 이렇게 외치세요. ‘그러나 저는 이 8호 크레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크레인을 포기하지 않은 한 우리 동지들도 저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크레인 밑에 내려와서 하신 연설도 있으세요. ‘그 시간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 시간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같이 했었던 그 노동자들이 그렇게 떠나면 전 그냥 포기하고 싶을 것 같거든요. 안 할래 나도 이럴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 김진숙> 처절해요. 처절한 역사입니다. 작업환경이나 근로조건들의 처절함 저는 지금도 40여 년이 지난 일인데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게 남편이 한진에서 사고로 돌아가신 거예요. 산재처리조차도 안 되고 부인이 소복을 입고 공장 정문 앞에 와서 목을 놓아서 울던 그 사실보다도 그 부인을 스쳐지나가던 아저씨들이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 일이고, 내 마누라가 저럴 수도 있는 일인데도 그 부인을 스쳐지나가서 하루 밥을 벌어야 되는 노동자들, 그렇게 울부짖는 부인을 외면한 노조 그것부터 시작해서 박창수와 저의 차이는 그 공간에 제가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저는 해요. 거기에 제가 있었으면 제가 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가 91년도에 첫 징역을 살 때 그때가 박창수 위원장이 위원장에 출마하고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구속이 된 거거든요. 2~3년 전에 사건으로 사측이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사전구속영장을 3자 개입 금지법으로 고소를 하고 그걸 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를 하고, 선거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를 박창수하고 같이 앉아서 의논을 하다가 저는 잡혀간 거예요. 그때 박창수 위원장이 대우 조선이 파업을 할 때 의정부에 있는 다락원에서 조선노조위원장들이 회의를 했던 그게 3자 개입법에 위반이 돼서 구속이 됐던 건데. 그 회의에 제가 갔으면 제가 그렇게 됐겠죠. 그런 시절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300년 전도 아니고, 600년 전도 아니고, 30년 전의 일인 건데요. 그런 세월들을 겪어온 사람이 어디로 도망을 가겠습니까? 저 같은 경우도 제가 해고되고 매달려서 싸우고 경비아저씨들한테 울면서 작업복만 가지고 나오게 한 번만 아저씨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렇게 울면서 애원을 하는데 그런 일들을 저는 선택할 수 없었어요. 어디 도망갈 때라도 차라리 있었으면 저도 갔겠죠. 

◇ 김혜민> 동료들의 죽음이 어떻게 보면 도망갈 수 있는 명분이 될 수도 있잖아요. 오히려 더 달려가게 만들었어요. 

◆ 김진숙> 그들이 왜 죽었는지를 저는 잘 아니까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던 일들, 그걸 저는 참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크레인 있을 때도 주익씨 누나가 전화가 왔더라고. 진숙씨는 주익씨처럼 미련스럽게 버티지 말고 그냥 힘들면 내려와. 아무도 욕 안 해. 그리고 주익의 뜻을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진숙씨인데 나도 주익이가 왜 죽었는지 잘 몰라.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진숙씨인데, 진숙씨가 죽으면 세상에 누가 주익이가 왜 죽었는지를 얘기할 거야? 그걸 사람들한테 어떻게 알릴 거야? 그 전화가 저는 굉장히 크게 위안이 됐었습니다. 다른 것을 떠나서 힘들면 내려와 이 말이 억지로 안 버텨도 돼 이 말이 그때는 참 크게 위안이 됐었어요. 그 말이 참 고마웠고. 그냥 어디 갈 때가 없었던, 그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를 그냥 알고 있었던 이유들 그랬죠.  

◇ 김혜민> 왜 24살의 여성 용접공이 5년 만에 해고를 당하고 35년 간 투쟁을 하는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떠나보내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사실 잘 모릅니다. 우리들은 뉴스를 통해서만 보고요. 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오늘 모르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마이크를 김지도에게 드린 겁니다. YTN라디오 생생경제 오늘 생생초대석은 김진숙 해고 노동자와 부산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도님, 여전히 자신의 몸을 극단적으로 모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안 들어주니까. 육체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마지막 선택인데 2020년에도 그런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아픔, 어떤 마음이 있으세요? 

◆ 김진숙> 지금도 대우 조선 조명탑 위에는 강병재라는 하청 노동자가 매달려있습니다. 4번째 고공농성이에요. 이 분이 고공농성이 4번째 하게 되고, 4번째 고공농성이 100일을 넘어간 이유는 약속을 지키라는 한 가지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투쟁을 하고 합의를 하고 내려왔는데 그걸 또 번복을 하고. 차강우라는 노동자도 그렇고, 스타케미칼에서부터 파인텍까지 굴뚝 농성을 408일을 하고 300일이 넘어가고, 그 노동자들도 저는 아직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듣고 있고. 우리 사회에는 그런 기업인들을 처벌하는 법조차도 없습니다. 단협을 맺어서 그건 사회적 약속이고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김주익 지회장도 그래서 죽었던 거고. 그 노동자들이 약속을 지키라고 죽음을 택해도 그 약속은 안 지켜져요. 오히려 더 우습게 내버려지는. 저는 이번에 의협이 파업을 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사들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는 똑같은 한 사람을 놓고 그 사람들은 시민의 곱하기 백이고, 노동자들은 그 시민의 가치의 백분의 일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은 시민이고 세금도 내고 그렇게 사회적 가치가 다른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노동자들은 백 마디를 해도 그래서 단식을 하고 그래서 천막을 치고 그래서 삭발을 하고 그래서 하늘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고 거기서 수백 일을 버티고 결국은 목숨을 내던지고 그래도 그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그 합의를 지키지 않는 거에서 누구도 처벌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복직 투쟁에 대해서도 시대 복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유가 그때 시절에 해고됐던 노동자들이 아무도 복직한 사람이 없어요. 공장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시간이 너무 오래됐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해고됐던 노동자들조차도 그냥 없던 일처럼 지워진 거죠. 그런 일들이 저는 안타까워요. 그 사실들을 저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 김혜민> 생생경제 통해서도 가슴 아픈 노동자들 상황을 많이 전달했는데 지금 이 시점에 우리 김지도님이 가장 애달픈 노동자라고 할까요? 누가 있으세요?

◆ 김진숙> 가장 어렵게 싸우는 강병재 노동자 생각이 많이 나고요. 특히 올 여름 날씨가 웬만했습니까? 폭우에, 폭염에, 거기다 태풍까지 그 30여 년 전에 해고됐지만 지워진 이름들 아예 없었던 사실로 다들 까맣게 잊고 있는 골목공장 노동자들, 풍산금속 노동자들 그 시절에는 노동자를 탄압하는 그리고 노조를 꿰기 위한 수단들이 지금하고 또 달랐거든요. 지금은 해고시키고 구속시키고 이 차원이었다면 그때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성폭행 이런 건 우리끼리도 쉬쉬할 정도로 그 알몸으로 쓰레기 적치장에 버리고 오는 일들 그리고 나면 이 친구는 그 다음날부터 안 보이고 우리조차도 쉬쉬하고 이런 일들을 묻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게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그때는 구사대 애들이 다들 깡패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노동자는 유리에 찔려서 스물 몇 바늘을 꿰매고 똥오줌을 집어서 던지기도 하고 동일방직노동자들이 당했던 일들을 여전히 당했었는데요. 그런 사실들이 하나도 밝혀진 적도 없고 어느 누구도 사과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우리 합죽이가 됩시다 합 그런 노동자들도 어느 날에 누군가 호명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 김혜민> 이 방송을 듣는 분들 중에 여전히 김지도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아니면 방송을 끄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르지 못한 이름들 아니 어쩌면 평생 신경 한 번 쓰고 살지 않은 그 이름들에 대한 최소한 빚진 마음이라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오늘 인터뷰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어떻게 예상하세요? 복직될 것 같으세요?

◆ 김진숙> 될 때까지 할 거니까요. 

◇ 김혜민> 될 때까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하는 것처럼. 복직되면 뭘 제일 먼저 하고 싶으세요?

◆ 김진숙> 들어가서 제가 일할 땐 없었던 화장실, 제가 일했을 때는 없었던 식당 그런 데 가보고 싶어요. 저는 밖에서 싸웠었는데. 현장 안에서 싸웠던 노동자들이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지고 쟁취될 때 그 울렸던 함성을 저는 밖에서 들었거든요. 근데 막상 저는 그런 걸 못 보고 같이 함성을 지르지도 못 했고 그냥 그런 데 들어가 보고 가보면서 아 이렇게 됐었구나 그러고 그냥 박창수가 일했던 공장에도 한 번 가보고. 주익씨 일했던 데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사실은 조선소의 근로 조건이라는 게, 작업환경 개선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그때는 그 높은 데 작업을 하면서 사다리를 놓는 데도 안정장치 하나 없이 일을 하게 되니까 그냥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사다리를 안고 떨어져서 사람이 깔려 죽는 어이없는 일들이 생기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정돈이 됐는지. 그냥 그런 것들을 눈으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 김혜민> 그럼 그 동안 싸워왔던 35년의 시간이 조금은 위로가 될까요?

◆ 김진숙> 그렇겠죠. 저는 그냥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제가 일했던 공장들, 정말 우리 아버지가 실향민이신데 술만 먹으면 고향 노래를 불렀던 ‘불효자는 웁니다’를 울면서 불렀던 아버지처럼 그냥 그럴 것 같습니다.  

◇ 김혜민> 제가 보기에는 한진을 제일 사랑하는 노동자인데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죽기 전에 그 땅 한 번 밟고 싶다는 애달픈 마음으로 지금까지 버티신 것 같습니다. 오늘 김진숙 지도와 함께 했는데 마지막으로 김진숙 진도를 응원하시는 분들께는 굳이 감사의 말씀을 안 하셔도 될 것 같고요. 사람들이 저 사람 빨갱이라더라, 그래서 빨갱이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저 사람 저렇게까지 해야 되냐 하길래 나도 그런 줄 알았다라고 생각했던 그 분들게 한 말씀 하신다면.

◆ 김진숙> 사실 제가 크레인에 있을 때도 사장이 저를 설득하겠다고 고소차를 타고 올라왔었어요. 고소차 높이가 크레인까지 안 되니까 저 밑에 보이더라고. 근데 이 사람이 벌벌 떠는 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제가 그 사람을 내려다보고 웃었거든요. 기분은 좋더라고. 사장님을 내려다보고 웃고 있으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얼굴이 벌게지면서 소리를 질렀었는데 저는 그때도 그랬어요. 사장님은 인연이 있으면 갈 사람이다, 근데 나는 그때 당시 20년이 넘었으니까. 25년을 이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 사장님 한 번 생각을 해보시라고. 사장님 생각에는 당연히 내가 이 회사를 말아먹기 위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사장님 임기 2년에 몇 배가 되는 세월을 한 노동자가 복직을 하겠다고 매달려있는 세월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우리가 대화가 됩니다, 그래야 고소차를 타고 올라오시든, 크레인을 올라오시든 우리가 대화라는 게 가능해집니다. 이 얘기를 제가 그때 했었는데요. 그 사람은 그 얘기를 안 들었겠죠. 그러니까 굿을 하고 난리를 쳤겠지.  

◇ 김혜민> 굿도 했습니까? 

◆ 김진숙> 저 죽으라고요. 

◇ 김혜민> 크레인 앞에서 하진 않았죠?

◆ 김진숙> 크레인 앞에서 했습니다. 카톨릭 신자였는데 그때는 제가 내려온 상태였었고 크레인이 남겨진 상황에서 그 크레인을 해체를 했거든요. 그 해체를 하는 데 무당한테 날짜를 받아가지고 3일의 날짜를 받아서 해체를 했대요. 수백억짜리의 크레인을. 그 사람들한테는 8호 크레인이 너무, 너무 징그러웠던 거예요. 그래서 저는 굿하는 비용이랑 크레인을 해체하는 비용을 노동자들한테 썼으면 제가 왜 크레인에 올라갔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그 희망버스가 오는 걸 막겠다고 그리고 크레인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걸 막겠다고 용역 깡패들을 400명을 돈 주고 사왔었거든요. 그 비용이면 정리해고 시킨 노동자들 2년 치 연봉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정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저는 크레인에 있으면서도 그 상황들이 제일 답답했었어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자들을 얼마큼 대우하는지가 아니라 얼마큼 이해하는지. 제가 18살 때부터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실밥 뜯는 일부터 조선소 용접공까지 했었는데 저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하청 노동자들.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인데요. 제가 이번에 복직투쟁을 새로 시작하면서 출근 투쟁을 하면 두 명의 노동자가 와요. 신발공장에서 30여 년 전에 해고됐던 노동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어요. 근데 새벽에 왔다가 출근하러 또 가는 거야. 그 사람들은 돌아갈 공장조차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도 마음이 쓰이는 노동자가 풍산금속에서 해고됐던 노동자인데 33명이거든요. 아무도 복직한 바가 없습니다. 노태우 정권시절에 공권력 투입해서 다 다친 채 구속이 됐던 노동자 중에 여성 노동자가 있어요. 어느 날은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지금도 답장이 없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요. 이 노동자는 한 번 보자, 보자 계속 문자를 보내는데 휴일이 없어요. 이런 노동자들이 지금도 너무 많은 거예요. 아예 그나마 노조가 있는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인 경우는 소리라도 지를 수 있어요. 악 소리라도 낼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런 소리조차 지르지 못 하는 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런 노동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게 아닌 가하는 생각을 저는 해요. 그래서 저는 이런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그런 노동자들은 더 많아질 것이고 더군다나 저는 이 코로나라는 게 끝나고 나면 끝나진 않겠지만 끝나길 바라지만 어떤 결과들이, 어떤 처참한 상황들이 남겨질 건지 저는 너무 두렵습니다. 아무도 그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요.  

◇ 김혜민> 빨갱이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땀 흘려서 먹고 살아내고 싶은 우리와 같은 이웃이라는 거 그걸 기억한다면 폭력은 일어나지 않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장시간 긴 이야기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복직했다는 소식으로 생생경제에서 꼭 인터뷰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진숙> 한마디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86년도에 저한테 붙었던 이름은 빨갱이였어요. 심지어 같이 일했던 동료들한테 조차도 저는 빨갱이로, 그 시절에 대공분실에 끌려갔다는 사실만해도 빨갱이가 될 수 있었던, 저는 그래서 대공분실에 갔다 온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8개월 후에 박종철이라는 제 연배의 청년이 그것도 영도 한진 중공업 바로 앞에 살았던 저는 얼굴도 모르는 그 청년이 굉장히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 회사 앞에 영도에 서울대생이 산다더라.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진숙아 저 집에 서울대학교 학생이 산대, 그러면 한 번 더 쳐다보고 지나가고. 그랬던 사람이 다른 데도 아니고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고 죽었다는.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에이, 뭐 그랬겠지, 일이 있었겠지, 근데 그 8개월 후에 제가 거길 간 거예요. 그리고 정말 집안을 샅샅이 이 잡듯이 그때 주인 할머니가 고물을 줍는 할머니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오시더니 저기 산복도로위에 누가 호마이카 농을 버렸어. 주워올까? 이러시더라고. 그때 마침 비키니 옷장의 지퍼가 고장이 난 상태였는데. 그걸 할머니랑 낑낑거리고 주워서 한 짝을 집에다 들여놓은 거예요. 그 호마이카 농의 유리까지 다 뜯었습니다. 거기 다 혹시 뭐 숨겨 놨을까봐. 그렇게 샅샅이 집뒤짐을 하고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와서 근데 흔한 유인물 하나조차도 안 나와 있던 그렇게 대공분실을 끌려갔다오니까 이미 저는 빨갱이가 되어있었어요. 저희 아버지가 이북 사람인데 아버지조차도 그랬습니다. 그때 이제 안기부가 집에까지 찾아왔었대요. 아버지한테 당신 딸이 그 불순한 사람들하고 연결이 돼서 불순한 노동조합을 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옛날에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 오시면서 트럭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저시거든요. 그 다리로 지금처럼 KTX가 있습니까? 시외버스타고 완행열차타고 그리고 부산역까지 절뚝거리면서 오셨더라고요. 저를 보니까 저도 살이 많이 빠지고 뭔가 쫓기는 눈빛이고. 아버지도 막 야단을 치려고 끌고 가려고 오셨다가 저를 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셨나봐요. 딴 거는 몰라도 사상적으로는 관련되지 말라고. 저는 그때 사람을 잘못보고 잡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만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저하고 비슷하게 생긴 영도에 사는 빨갱이를 제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으니까. 그 사람만 잡아서 그 사람들한테 대령을 하면 제 누명이 벗겨진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세월이 35년이 된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그 세월을 보상받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혼자 남겨져서 4명의 노동자들을, 동료들을 잃으면서 그럼에도 지키고자했던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들이 그 세월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 김혜민> 꼭 보상받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겠습니다. 

◆ 김진숙>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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