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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D: 서지훈, 이시은 / 작가: 현이,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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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방송 차명숙 “광주의 씨를 말린다는데, 죽을 수는 없었어요.”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0-05-18 08:20  | 조회 : 1549 
YTN라디오(FM 94.5)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20년 5월 18일 (월요일)
□ 출연자 : 차명숙 대구경북 5·18동지회 공동대표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노영희 변호사(이하 노영희): 오늘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지 40년이 되는 날입니다. 당시 광주에서 '당신의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 빨리 나와 광주를 지키자'고 가두방송을 했던 차명숙 씨와 전화 연결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차명숙 대구경북 5·18동지회 공동대표(이하 차명숙): 네, 안녕하세요. 차명숙입니다.

◇ 노영희: 벌써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에 계셨을 때 당신의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 빨리 나와서 광주를 지켜라, 이런 방송을 하셨다면서요?

◆ 차명숙: 네, 그것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호소했었죠.

◇ 노영희: 그때 그런 방송을 하게 된 계기가 뭐였습니까?

◆ 차명숙: 방송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긴급한 상황이 이루어졌고, 저희도 위기감을 느꼈잖습니까? 많은 분들이 나오셔야 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이 밤이 어두워졌어요. 어두워지고 캄캄한데 많은 분이 함께 모여서 모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긴급한 마음과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위기감. 그래서 집에 계시지 말고 나오시라고 호소를 했고, 함께해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그때 당시는, 그런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 노영희: 그때 차명숙 씨 연세가 19살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차명숙: 그렇죠. 만으로 열아홉이었죠. 

◇ 노영희: 그렇게 어린 나이의 학생이 이런 광주 상황을 보면서 이거는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지켜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사람들에게 나와 보라고 했던 건가요?

◆ 차명숙: 아니요. 저는 학원생이었고요. 누구나 똑같이 물도 떠다드리고 빵도 갖다드리고 따라다니고 하는 일에 관심이 있어서 앉아서 듣고 하는 상황이었는데 며칠 지나고 나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몰이되는 그런. 저도 이게 뭐지? 이게 뭐지? 그러면서 방송국이 불타게 된 거죠. 그런 상황에서 소식을 전해야 하고, 이 상황을 말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시민이, 광주 시민이 모인 거죠.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호소를 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자기의 역할이 주어진 거죠.

◇ 노영희: 그러니까 목동이 소를 모는 것처럼 경찰들이 시민을 몰고 가더라?

◆ 차명숙: 경찰뿐만 아니라 군인이었죠. 저희 어렸을 때는 그러잖아요. 군복을 입으면 모든 사람이 군인이라고 생각하지, 특수라든가 분야라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던 나이였습니다. 군인에 대한 것은 굉장히 저희가 좋은 이미지가 있고, 좋은 생각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현장에서 그런 상황이 되었죠. 어린 아이들, 저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그 상황이 무섭기도 하고, 약간의 위기감도 느껴지고, 이게 뭐지? 어떤 상황이지? 왜 불이 나고 이렇게 몰려다니지? 저희도 같이 도망가야 하고, 무섭고. 그런 상황에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 노영희: 그렇게 위험하고 사람들이 경찰이나 군인들에 의해서 소떼 같이 몰려서 이리로 가라고 하고, 저리로 가라고 하고, 이런 상황이 무섭잖아요? 그러면 빨리 집에 들어가서 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 말아야겠다, 숨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 차명숙: 그런 생각도 많이 했죠. 많이 했지만 이미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성당으로 자꾸 피하고,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게 되고. 또 어느 집에 가서 여럿이 모여서 웅성웅성하다가 또 다시 나오게 되고,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가서는 무섭다고 하는 생각이 둔해진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은 느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노영희: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하도 몰리다 보니까 무섭다기보다는 화가 나는군요?

◆ 차명숙: 화가 났다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 또 방송이 차단되고 있는 그런 상황.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 죽어야 하지 모른다고 하는 그런 상황. 그런 분위기도 있었죠. 광주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모든 것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그러면 저희도 아직 어린데 죽어야 하잖아요. 죽을 수는 없죠. 그런 마음이 많은 작용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노영희: 그때를 생각해보면 아무런 일 없이 광주에서 살고 있는 학생인데 경찰이나 군인이 와서 저희들은 다 죽어야 한다, 씨를 말려야 한다, 이러면서 무력을 행사했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게 이해가 되던가요? 뭐라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그러던가요?

◆ 차명숙: 이해가 될 수 없죠. 뭐라고 했냐, 전두환이 누구의 양아들이다, 그래서 그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광주 씨를 말려야 한다고 하는. 그것을 저는 진실로 믿었고요. 우리는 그러면 죽어야 하는 희생자였고. 그러면 지금 광주는 계엄을 내려서 피할 사람은 다 피하고 시민, 광주 시민들, 민중들이 남아 있잖습니까? 그중에 저도 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저도 지켜야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또한 또 언젠가는 죽어야 한 사람들이지만 거기서 그렇게 죽어도 별로 후회스럽지 않는, 그런 마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당당하다고 생각하죠.

◇ 노영희: 광주 시민들이 뭘 했길래 광주 시민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하면서 공격하던가요?

◆ 차명숙: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전두환이 저는 누군지 몰랐어요. 그런데 누구의 양아들이라고. 군인이라고. 군 정권이 다시 독재를 하기 위해서 광주를 고립을 시켜서 씨를 말리고, 거기에 사람들의 정권을 잡기 위한 그렇다고 하는 이야기가 계속 들어왔었죠. 방송을 하기 위해서도 그런 내용이 계속 들어오게 되었고요. 그래서 저희는 이렇게 되는구나, 아직 어린 아이고, 그때는 지금처럼 정보가 있는 시대가 아니었잖습니까? 

◇ 노영희: 그러니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군인이나 경찰이 와서 광주 씨를 말려야 한다고 하니까 일단 도망가고 위험하니까 나와서 우리도 해보자, 이런 이야기까지 하시고.

◆ 차명숙: 지키자고 호소를 한 거죠.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질서정연한 조직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움직임이 체계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죠.

◇ 노영희: 그런데 그러다가 결국 잡히신 거 아니에요? 23일에 잡혔고 505부대 지하실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고 하던데요.

◆ 차명숙: 그러니까 지금 이후에 제가 알게 된 건데 저희들을 간첩이라고 했답니다. 그거는 기관에서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군 쪽에서도 간첩이라고 하였다고 하죠. 그래서 잡아야 한다, 저 여자들은. 저 여자들을 잡아서 조사해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그 후에 듣게 된 거죠, 제가 나와서. 그렇게 되고 너무 잘했더라, 어떻게 저렇게 교육을 받지 않고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면 저렇게 할 수 없다, 조사를 해야 한다고 간첩몰이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21일 날 협상에 들어간 거죠. 1차 21일 날 12시 50분에. 저희는 그것을 1차 학살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진짜 인간의 총받이고, 인간몰이였잖습니까? 있는 그대로 저희를 쏴죽였으니까요. 그래서 피했죠. 1차 사건이 나고. 학살이 되고. 피해서 병원에 가서 하고 있는데 기관인들이 온 거죠. 505보안대를, 저희도 기록이 없었는데 작년에 그 기록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간첩을 잡기 위해서, 간첩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더라고요. 그 사람들의 목적은 간첩을 만들어서 간첩이 들어와서 이렇게 소요와 사태를 만들었다고. 정확한 목적이 있었던 거죠. 굉장히 깊은 지하실을 내려갔던 계단, 그리고 무자비하게 뚜드려 팼다고 하는 느낌, 한 이틀 제가 거기서 잠을 못 잤다고 하는 공포. 그렇죠. 우리는 간첩 잡는 사람들이다, 너희들 하나둘 죽여서 시신 속에 넣어도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한테 교육을 받았고 누가 지금 접촉하고 있고, 광주에는 누가 와 있냐고. 누구한테 사인을 받고 하고 있냐고. 그게 목적이었죠.

◇ 노영희: 지금 안동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안동에서 가게를 하시면서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열심히 알리는 활동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엇이 가장 크게 왜곡되어 있고, 무엇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십니까?

◆ 차명숙: 지금도 사람들이 와서 그렇죠. 당신이 알지 않냐고, 북한군이 내려와서 한 거 당신이 알고 있지 않냐고. 저한테 따져요. 그리고 10년, 12년 전에도 지금 현재 TV에서 그대로 말하죠, 폭도. 세금을 먹어 버리는 이상한 단체,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이게 안 되겠구나. 그래서 제가 5월이, 5.18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리기 시작했고요. 어제는 40주년 전야제를 하였습니다. 문화의 거리에서. 어제 안동에서, 경북에서, 아직 50이 되지 않고, 50이 약간 넘은, 약간 넘으려고 한 분들이 30명, 40명 가까이 오셨고요. 가족 단위가 많이 참석하셨고요. 어제는 길가에, 지나가는 광주의 젊은 사람들이 안동까지 왔어요. 광주의 젊은 청년들이 안동까지 왔어요, 전야제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나가는 많은 거리의 젊은 학생들이 보면서 분위기가 굉장히 달라졌어요. 

◇ 노영희: 또 이런 에피소드가 있더라고요. 문재인 대통령께 차명숙 대표가 꿈을 팔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 차명숙: 2016년도 설 쇠고 보름 전에 제가 꿈을 굉장히 좋은 꿈을 꿨어요. 꿈을 굉장히 좋은 꿈을 꿨는데 지금은 경남 양산의 계원중학교 전 이사장인 최형국 이사장님께 이 꿈을 팔면 다음 대통령이 무조건 될 건데 누구한테 팔까요, 했더니 문재인 대표한테 팔아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해 5월 17일 날 대표님을 뵀어요. 같이 앉았다가 요즘도 장사하세요? 네. 최형국 이사장이 그렇지 않아도 말씀하셨어요. 저희 가게로 오시겠습니까? 진짜 오셨어요, 열흘 만에. 꿈에 다른 분이 드셔야 할 밥상을 그날 문재인 대통령한테 차려드렸죠. 2016년 5월 17일에 말씀드렸는데 27일에 오셨어요.

◇ 노영희: 그러면 그렇게 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식사를 하시고 그다음 해죠. 대통령이 된 건가요?

◆ 차명숙: 네. 그 꿈을 사 가십시오, 그랬더니 진짜 사가겠다고. 그다음에 바로 대통령이 되셨고. 분명히 그 꿈은 누구든 대통령이 되는 꿈이었어요. 그때부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 노영희: 마지막 한 마디만 엄중하게 여쭙겠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즉 80년 5월 18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나는 민주화 운동에 동참할 것이다? 맞습니까?

◆ 차명숙: 80년 5월 17일, 18일로 간다고 하면 해야죠. 해야 할 목적은 뭐냐면,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 현장에 제가 있다고 하면 해야죠. 왜 해야 하냐, 바른 정신, 나의 정의로운 행동, 그런 부분을 후손들에게 계속 알려주고 바로 서는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고, 이어지는 정신이 된다고 하면 다시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저희가 그렇게 이어져 나온 후손이지 않습니까. 하겠습니다.

◇ 노영희: 알겠습니다. 다시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그 힘든 일을 또 다시 하겠다.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런 말씀이셨습니다.

◆ 차명숙: 당연하죠.

◇ 노영희: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차명숙: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노영희: 지금까지 80년 5월 광주에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차명숙 대구경북 5·18동지회 공동대표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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