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FM, 조현지입니다
  • 제작,진행: 조현지 / 구성: 조경헌

인터뷰 전문

[역사맛집] 봉준호 외할아버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은 어디에서 영화를 봤을까?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20-02-13 16:14  | 조회 : 898 
[YTN 라디오 ‘뉴스FM, 조현지입니다’]
■ 방송 : YTN라디오 FM 94.5 (12:20~14:00)
■ 진행 : 조현지 아나운서
■ 대담 : 김준우 신일고 선생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역사맛집] 봉준호 외할아버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은 어디에서 영화를 봤을까?


◇ 조현지 아나운서(이하 조현지)> 영화 하면 여러분은 어떤 음식 생각나시나요? 팝콘? 오징어? 아니죠. 이제는 짜파구리일 겁니다. 세계에서 핫한 음식이 되어버린 이 짜파구리. 아카데미 시상식의 역사를 새로 쓴 영화 <기생충> 덕분에 우리 어깨가 한껏 올라가고 있는데요. 한국 영화 역사도 궁금해집니다. 아카데미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우리 한국 영화의 역사, 오늘 역사 이야기로 한상 두둑하게 차려 볼게요. <역사맛집> 역사셰프, 신일고 김준우 역사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 김준우 신일고 선생님(이하 김준우)>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조현지>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2주 만인데.

◆ 김준우> 그렇죠. 시간이 너무 안 가요. 빨리 보고 싶은데.

◇ 조현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사이에 또 <기생충>이 큰일을 했어요. 

◆ 김준우> 이 정도일 것까지는 예상을 못 했는데요. 대단해요.

◇ 조현지> 시상식 장면은 조금 보셨어요?

◆ 김준우> 봤죠. 수상소감도 계속 봤습니다. 너무 말씀을 잘하시더라고요.

◇ 조현지> 맞아요. 지금 통역사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그런 상황인데요. 오늘 한국 영화 역사라는 이야기로 한상을 차려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영화가 올해로 101년이에요. 

◆ 김준우> 네, 맞습니다.

◇ 조현지> 그런데 우리 역사 말고요. 세계적으로 봤을 때 영화라는 게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 김준우> 영화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들어보셨을 거예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라고 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만든 짧은 영화를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카페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유료 상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중들을 상대로 유료 상영을 했다는 게 영화의 시작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 조현지> 그러면 이때도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상영이 됐다는 거잖아요? 1895년. 정말 생각보다 역사가 긴데요. 그러면 우리 한국의 최초 영화는 어디에서 상영됐을까요?

◆ 김준우> 아까 말씀드렸듯이 한국 영화, 101주년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시작은 1919년입니다. 그러니까 작년이 100주년이었죠. 1919년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보게 되는데요. 단성사라고 하는 극장에서 1919년 10월 27일에 상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영화의 날을 10월 27일로 잡게 됩니다.

◇ 조현지>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어떤 내용일지, 그리고 어떤 형식이었을지. 이것을 어떻게 제작했을지, 이런 게 너무 궁금한데 알 수 있을까요?

◆ 김준우> 이게 현재 필름은 남아있지 않고요. 그런데 이게 100% 영화는 아닙니다. 연극과 영화의 결합이라고 해서 연극을 하는 도중에 현장에서 흰 천이 내려와서 영상이 상영되는 겁니다.

◇ 조현지> 아, 자료화면 같은 건가요?

◆ 김준우> 그렇죠. 그 영상은 말이 안 나오죠. 무성입니다. 영상만 나오는데 그 영상도 연극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영상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나온 영상이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그리고 전차, 자동차, 이런 장면들이 짧게 상영됐는데요. 이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영화 상영이라고 하고요. 말도 안 나오고 그냥 움직이는 사진이라고 해서 당시에는 영화를 ‘활동사진’이다, 이렇게 불렀습니다.

◇ 조현지>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연극을 하다가 뭔가 장면 전환이나 시간적 변화가 필요할 때 그런 장치를 썼던 것 같은데요. 그전에는 영화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없었을까요?

◆ 김준우> 방금 말씀드린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제작한 영화, 이것을 기점으로 삼는 거고요. 그전에 영화는 상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상영은 됐는데요.

◇ 조현지> 영화 자체는 있었다는 거죠?

◆ 김준우> 그렇죠. 공식적인 기록을 찾아보면 논쟁은 조금 있지만 보통은 1903년 6월에 상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상영이 흥미로운 게요. 상영 주체가 철도회사입니다. 전차를 우리나라에 1899년 개통하는데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한테 전차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특히 최초의 교통사고라고 해야 할까요? 전차에 치여서 어린아이가 죽고,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너무 민심이 좋지 않아서 이것을 조금 환기시키기 위해서 그 당시 미국에서도 있었던 영화를 이쪽에서 상영을 해서 관심을 끌어보자고 하는 의미로 동대문 쪽에서 처음 상영이 됩니다. 동대문 안에 있던 전기회사 기계창이라는 곳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되었던 것. 이것이 최초의 영화 상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조현지> 그러면 그때도 사람들이 돈 내고 가서 영화를 보고 했던 건가요?

◆ 김준우> 그렇죠. 돈 내고 봤죠.

◇ 조현지> 영화관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했던 거네요. 그러면 그 움직이는 영상을 사람들이 볼 거 아니에요? 그동안은 연극처럼 사람들이 직접 나와서 하는 것을 보다가 뭔가 실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데 화면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하는 것도 궁금하거든요?

◆ 김준우> 엄청 신기해했다는 겁니다. 말도 안 나오고 영상, 예를 들어 기차가 쓱 들어오고 있는 영상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저 기차가 나한테 오고 있어, 하면서 깜짝 놀라서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사람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면 앉아 있던 관객들이 또 일어나서 인사도 해주고요. 나한테 인사를 하네? 그러면 나도 인사를 해야지, 이런 것들. 이러면서 사람들이 굉장히 신기해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 조현지> 그렇군요. 지금 제일 처음 영화가 상영된 곳은 기계창이라는 전기회사라고 하셨는데요. 지금은 동네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정말 많잖아요. 브랜드들도 많고, 개인 독립극장들도 많은데요. 예전에는 이렇게 많지 않았을 거고,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 김준우> 최초의 상설 영화관, 정말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라고 하면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0년 일본인에 의해서 종각 부분에 세워진 고등연예관이라고 하는 곳이 최초의 상설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무성영화이기 때문에 당연히 변사. 들어보셨죠? 해설사죠. 변사가 존재하는데요. 이 영화관이 일본인이 세워서 일본인을 위해서 상영한다고 했어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가서 볼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당시 변사는 두 사람이 일본말로 해설하고, 우리말로 해설하고. 이런 식의 공동해설이 존재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 조현지> 지금으로 치면 화면에 자막이 없는 경우 말로 더빙을 해주는 것처럼 그런 경우인데요. 시대극을 보면 변사가 가끔 나오기도 합니다. 이게 언제부터 언제까지 활동을 했을까요? 무성영화의 시기였겠죠?

◆ 김준우> 그랬죠.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1910년부터 시작됐으니까 변사는 1910년부터 존재하고요. 초창기 변사 같은 경우에는 영상 이전에 해설을 합니다.

◇ 조현지> 아,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요?

◆ 김준우> 네, 이런 영화고, 이런 내용이 나오고,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하고 영상이 나왔는데요. 가면 갈수록 영상이 길어지고, 스토리가 재밌어지면서 중설로 들어요. 그러니까 변사가 중간 중간에 얘기를 해줍니다. 대사처럼 이야기해주고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일본인 변사와 우리나라 변사 둘이 같이 들어가면 늘어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변사는 존재하는데 이제는 나뉘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이 생기기 시작하고, 일본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935년 유성영화, 발성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변사의 시대는 점점 내리막길을 타게 되었죠.

◇ 조현지> 그렇군요. 그러면 한국사람, 조선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가서 보는 영화관, 일본인들이 가서 보는 영화관, 이렇게 나뉘게 되면 거기에서 오는 차이점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도 있었을까요?

◆ 김준우> 일단 우리나라 영화관이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영화관이 우미관. 들어보셨나요?

◇ 조현지> 아니요.

◆ 김준우> 이 우미관이라고 하면 예전에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주 무대인 종로 지역의 대표적인 곳이거든요. 종로 지역에 있었던 우미관. 1912년에 개관되었고요. 18년에는 단성사.

◇ 조현지> 이거는 압니다.

◆ 김준우> 여기는 되게 유명하죠. 그다음에 22년에 조선극장. 해서 종로 부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관이 나오고요. 일본인 대상으로는 남산 자락, 즉 청계천이남 지역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쪽에 황금관, 대정관, 유락관, 이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관들이 나눠져 있었죠.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시기다 보니까 민족감정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다가도 영화 내용에 따라서 일본인 관객과 우리나라 관객들이 조금 대비를 이루는 이런 모습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초기 영화 중에 <권투 대 유도의 대항시합>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어요. 그랬을 때 권투는 주로 서양 선수고, 유도는 일본 선수일 것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나라 관객들은 서양 권투 선수를 응원하고, 일본 관객들은 유도 선수를 응원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유도 선수가 이기는 것으로 결말이 나거든요. 그러면 서로 흥분해서 말도 안 돼! 하면서 일본인 관객들과 난투극을 벌이는 이런 일들도 벌어지는 거죠.

◇ 조현지> 이게 너무 몰입이 되다 보면 순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시대가 시대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은 한진원 작가가 수상소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듯이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 충무로에 있는 모든 영화인들과 이 영광을 나누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요. 지금 앞서서 청계천이남 쪽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기는 했는데, 충무로 지역이 언제부터 한국 영화의 메카가 됐을까요?

◆ 김준우> 아까 이야기했듯이 충무로 지역에 일본인들이 굉장히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그것도 약간 잘사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는데요. 광복 이후에 그래서 이 지명을 고쳐야겠다. 일제강점기 때는 본정이라고 불렀어요. 일본말로 ‘혼마치’ 이런 식으로 부르는데요. 그래서 일본 색깔이 강하니까 그것을 눌러야겠다고 해서 그 부근에 살았던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따서 충무공 이순신에서 충무로라고 이름을 짓게 됩니다. 일본인의 그런 기운을 누르려는 의미가 있었고요. 광복 이후에 이쪽 지역에 영화관이 많이 개관되면서 영화 제작소들도 많이 위치해있게 되는 겁니다. 피카디리, 1960년에 개관을 하고요. 대한극장은 1958년에 개관하고요. 서울극장, 1964년, 국도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종로랑 충무로 일대에 많은 극장들이 개관되죠. 그러다 보니까 영화 제작소들도 많이 모이게 되고요. 영화 제작소가 있다 보니까 그 주변에 딸린 사업들이 많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협력해야 하는 현상소, 기획사, 인쇄소, 그다음에 영화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의 프로필사진을 찍어줘야 하니까 사진관, 영화 전단지를 인쇄해야 하는 인쇄소, 이것도 충무로 쪽에 몰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 조현지> 이렇게 충무로가 우리 한국 영화의 메카가 됐는데요. 지금은 충무로가 그 당시에 비해서는 약간은 퇴색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핫하지는 않잖아요?

◆ 김준우> 극장들도 많이 죽었죠. 아까 이야기했던 극장 중에 많은 극장들이 2000년대 초반쯤에 대부분 문을 닫았고요. 영화 중심지도 이제는 강남 쪽으로 많이 옮겨 갑니다. 1990년대 들어서서요. 그래서 충무로는 약간의 상징적 의미가 강하게 남아 있고요. 영화의 역사가 담겨 있다 보니까 그것을 보존하려고 하는 그런 움직임들이 많이 보이는 현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 조현지> 다시 일제강점기 시대로 조금 넘어가서 옛날이야기를 더 들어보면요. 아까 변사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 최고 인기 영화. 소개해주실 만한 것들이 있을까요?

◆ 김준우> 아무래도 오늘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영감을 받아서 이 코너를 준비해봤는데요. 일제강점기 때에도 정말 유명하고, 유행했던 영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1926년에 개봉했던 춘사 나운규 선생의 <아리랑>이 굉장히 유행을 했습니다. 감독을 하기는 했지만 주연배우로도 열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무성영화였고요. 그러다 보니까 흑백 무성영화로서 변사들이 이것을 해설하죠. 영화 시작할 때 변사가 해설을 하는데 변사의 말도 그 당시에 감시하는 경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해설이 조금 달라집니다. 감시하는 경찰들이 있다고 했을 때는 첫 시작을 “서울, 모 전문학교에 재학 중 철학을 연구하다가 미쳤다는...” 이런 식으로 시작을 하는데요. 감시하는 경찰이 없다고 하면 말이 조금 바뀝니다. “서울 모 전문학교에서 철학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이런 식으로.

◇ 조현지> 3.1운동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 김준우> 약간의 민족성이 변사의 대사로 인해서 가미가 되는 것이죠. 줄거리를 잠깐 이야기하자면 아까 ‘미쳐버린’ 주인공이 영진입니다. 나운규 감독이 주인공을 했던 그 영진이고요. 영진의 여동생 영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영진의 절친 현구가 존재하고요. 그런데 악역을 담당하는 사람도 있어야겠죠? 기호라고 하는 머슴이 있습니다. 기호라고 하는 머슴이 영희를 겁탈하려고 하는 장면이 마무리 쪽에 나오는데요. 그쪽에 있어서 오빠였던 영진이 미쳤잖아요. 히죽히죽 웃고 있다가 어떤 환상을 봐요. 그 환상을 보고 정신을 차려 보니까 자신이 낫을 들고 기호를 죽인 거죠. 기호를 죽이게 되고 그 피를 보자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게 되면서 마지막에 해설을 하죠. “여러분 웃음으로 나를 보내주십시오. 여러분이 우시는 것을 보면 나는 참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이 몸이 이 강산 삼천리에 태어났기 때문에 미쳤으며 사람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내가 일상 불렀다는 그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내주십시오,” 하면서 아리랑이 연주되면서, 이건 라이브로 연주되는 거거든요. 연주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사죠. “이 몸이 이 강산 삼천리에 태어났기 때문에 미쳤다”는 거예요. 일제강점기에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그 현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 관객들의 반응이 우는 사람, 그리고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는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 조현지> 갑자기 이 영화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고요. 서양보다 우리 영화의 역사를 짧지만 세계인들에게 우리 영화가 이렇게 사랑받는 것을 보면 정말 자랑스럽고, 또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더 세계에 퍼져 나갈지 기대가 되고 그렇습니다.

◆ 김준우> 일제강점기 때 힘든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꿋꿋이 제작해오면서 지금까지 영화의 역사를 발전시켜 온 이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한국 영화가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발전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조현지> 한 청취자님께서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쓴 소설가 박태원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딸들 데리고 영화 보는 게 취미였다고 하던데, 1930년대쯤일 테니까 우미관, 단성사, 이런 데 갔겠죠?” 이렇게 보내주셨는데요. 참 봉 감독도 영화 쪽 피가 쭉 흐르는 그런 사람입니다. ‘역사맛집,’ 오늘은 우리나라 영화 역사와 함께했습니다. 김준우 역사 선생님과 함께했어요. 선생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김준우>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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