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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시간 : [월~금] 15:00~16:00
  • 진행 : 김우성 / PD: 김우성 / 작가: 이혜민

인터뷰 전문

[생생경제] 최양오 현대경제연구원 고문 "故 김우중, 트럼프 살렸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12-10 16:11  | 조회 : 1652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15:10~16:00)
■ 진행 : 김혜민 PD
■ 대담 : 최양오 현대경제연구원 고문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생생경제] 최양오 현대경제연구원 고문 "故 김우중, 트럼프 살렸다"


◇ 김혜민 PD(이하 김혜민)> 오늘 가장 뜨거운 경제뉴스를 제일 생생하게 전해드리는 시간입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주인공,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김 회장은 건강 악화로 아주대병원에서 지난해 말부터 11개월간 입원치료를 해왔고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평소 밝혔다고 합니다. 현재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졌고 조문객들이 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장하는 한국경제에 상징적인 인물이었죠. 故 김우중 회장에 대해 알아봅니다. 현대경제연구원 최양오 고문 전화 연결돼있습니다. 고문님, 안녕하세요?

◆ 최양오 현대경제연구원 고문(이하 최양오)> 네, 반갑습니다.

◇ 김혜민> 최양오 고문께서는 혹시 생전에 김우중 전 회장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 최양오> 네, 일단 고인의 명복을 빌고요. 김우중 회장이 제 결혼식 때 꽃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저희 외삼촌하고도 친한 친구 분이 되다 보니까 삼촌 따라서 몇 번 뵌 적이 있고요. 저한테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번 해주시더라고요. 김우중 고인께서 자기는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와이셔츠로 철강을 만드는 그런 기업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와이셔츠를 수출해서 그 대금으로 철강을 사가지고 오신다는 말씀이었어요. 나는 세상에서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목소리가 오늘 다시 귀에 울리면서 진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도전하시던 회장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 김혜민> 그러게요. 명복을 빌어주시면서 고문님과의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김우중 전 회장은 저에게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으로 기억되는 분이에요. 정말 많은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그런 격려를 줬던 책인데요. 정말 신화를 쓴 인물 아니겠습니까? 

◆ 최양오> 그렇죠. 말씀하신 책 자체도 지금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죠. 최단기 밀리언셀러가 됐고요. 신화라고 한다면 한국 최초로 섬유제품을 직수출한 게 1961년인데, 1호 기록이 굉장히 많으세요. 해외 지사 호주 시드니에 연 게 1969년, 그것도 최초고요. 1975년 종합상사가 된 것도 최초고, 그다음에 아프리카 진출도 최초로 하십니다. 그리고 특별한 게 하나 있죠. 지금 북한하고 경제교류를 많이 하고 싶어 하는데, 북한과 경제교류를 최초로 하신 분이 김우중 회장이십니다. 1980년대 초에 홍콩을 통해서 북한 도자기 500여 점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시작했고요. 남포 아시죠? 남포에 공단을 만들죠. 개성공단보다 먼저. 그래서 정주영 회장님보다도 먼저 김일성 주석과 많은 대화를 하셨고요. 또 아버님이 6.25 때 납북되세요. 그래서 그런 이유로 해서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또 민족의 그런 전체 그림들을 중요시하는 그런 애국자셨거든요. 남북교류에도 1호 타이틀이 있고요. 또 재밌는 얘기는 트럼프를 살려주신 분이에요. 

◇ 김혜민> 그렇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 최양오> 트럼프가 미국에서 많은 부동산 개발을 하다가 파산을 합니다. 파산을 하고서 자산동결까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김우중 회장하고 만나서 뉴욕에 그러면 트럼프 타워를 하나 지읍시다. 지금 맨해튼에서 가장 비싸다고 하는 그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거든요. 그때 대우건설이 그것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러고 트럼프가 돈을 벌죠. 그것으로. 그때 한 400억 정도를 법니다. 그걸로 재기한 분이 지금 현재 미국 대통령이십니다. 한국에도 오셨고, 98년도, 99년, 제 기억으로는 그런데, 그때 두 번 방문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김우중 회장의 부인 되시는 분하고 골프도 치시고, 대우 조선도 가보시고, 군산 공장도 가보시고. 우리나라도 트럼프 월드라는 아파트가 몇 개 있잖아요. 그때 다 서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해서 만들어진 게 우리나라 일곱 군데에 있는 아파트의 시작입니다.

◇ 김혜민> 정말 북한, 아프리카, 호주, 그 당시에 경계를 넘으면서 신화를 쓴 김우중 회장이고요. 그리고 사람들도, 트럼프 이야기도 하셨지만, 박정희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이념과 상관없이 많은 정치인들하고도 교류를 하셨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정말 신화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억을 조금 되살리는 차원에서 1990년대 대우의 아성, 어느 정도였습니까?

◆ 최양오> 당시 재계 2위였는데요. 계열사만 41개였고요. 현지 법인, 그러니까 해외에 나가 있는 현지 법인 조그마한 사무실까지 합하면 589개가 됐습니다. 그래서 해외 고용만 15만 2000명을 거느리고 있었어요. 얼마나 큰 숫자냐면 삼성전자 전체 지금 직원 수가 10만 5000명밖에 안 돼요. 그래서 그 당시에 자산이 78조, 매출이 61조고요. 당시에 재미난 얘기는 그 당시에도 비행기 사고가 자주 났는데요. 비행기 사고 날 때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게 대우그룹입니다. 어느 비행기든 ‘대우맨’들이 타고 있었다는 거죠. 진짜 세계를 넓게, 세계시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글로벌 경영자로서 세계 경영이라고 하는 화두로 전 세계를 호령했던 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김혜민> 호령이라는 표현이 정말 딱 맞네요. 고문님 말씀하신 것처럼 해외에 나가 있는 직원만 해도 15만이 넘었고, 해체 직전인 1998년도 대우의 수출액이 186억 달러였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한국 총 수출액이 1323억 달러니까 한 14% 차지한 거죠. 

◆ 최양오> 그 회사 대우그룹의 사가가 있는데 그것을 잠깐 소개해 드릴게요. “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5대양 6대주가 우리의 일터다. 온 누리 내 집 삼아 세계로 뻗자.” 이게 대우그룹의 사가입니다. 그러니까 세계 경영을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하시고, 꿈꿔왔고, 도전을 해서 성취를 해내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혜민> 그런데 이 대우의 신화가 깨졌단 말이에요. 역시 IMF 때문일까요?

◆ 최양오> 그때 양쪽의 내용이 조금 다른데, 결국은 제가 판단하기에는 수출금융지원이 잘 안 됐고요. 당시에 그 당시만 잘라서 보면 대우전자 매각이 실패로 갔고요. 그다음에 대우자동차하고 GM과의 합병한 것이 조금 불발되는 형태로 가면서 또 거기다가 쌍용차의 인수까지 떠맡는 그런 상태가 됐는데요. 사실 김우중 회장님이 세계 경영의 포커스는 자동차다, 하는 생각을 굉장히 굳게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무리한 확장을 한 것은 우리들도 알 수가 있고요. 당시 기억나시겠지만 개도국, 그다음에 동유럽에 공장들을 세우고, 거기다가 법인을 세워서 하셨거든요. 당시에 조금 과욕이라기보다 시대를 읽는 눈이 너무 빠르셨던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있는데요. 하여튼 정치권하고 재계, 그다음에 당시 공무원들 사이에 논쟁이 많은 토픽이라서 과와 오를 한 번 우리가 같이 균형 있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김혜민> 그렇죠. 과와 오를 균형 있게 봐야 하고, 또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과가 더 많았는지, 오가 더 많았는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리한 확장이라기보다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일단 고문님께서는 평가를 해주셨어요. 그렇게 공중분해된 대우지만, 사실 지금도 그 명맥을 잇는 기업들이 여전히 있지 않습니까?

◆ 최양오> 그렇죠. 대우건설, 위니아대우, 그다음에 대우 조선해양, 미래에셋 대우, 그다음에 포스코 인터내셔널도 ㈜대우가 바뀌어서 포스코 인터내셔널이 됐고요. 현재 그 명맥을 잇는 그런 기관으로서는 GYBM, 베트남에 학교가 있죠. 지금 젊은 청년들을 교육시켜서 동남아에서 내보고 있는 교육기관인데요. 거기야말로 대우의 DNA가 제일 많이 살아있는 그런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김혜민> 어떤 의미에서 DNA가 가장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최양오> 거기서는 김우중 회장께서 얘기하던 개척하는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고요. 불굴의 의지로 판을 흔들고 세상을 뒤흔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남이 가지 않은 곳에 먼저 빨리 가는, 멀리 가는, 그런 교육을 시켜서 지금 동남아시아를 내보내고 있는 그런 교육기관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책에도 나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물론 개척자는 외롭다. 그러나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것을 가르치는 곳이 GYBM, 베트남에 있는 교육기관입니다.

◇ 김혜민> 실제 김우중 전 회장이 그 새로운 도약을 베트남에서 찾고자 굉장히 노력했고, 그룹 해체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베트남에서 보내기도 했잖아요. 베트남에서 이 GYBM, 이 사업에 주력하셨던 건가요?

◆ 최양오> 그렇죠. 그리고 베트남 나라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매력을 가지고 계셨어요. 지금 김우중 회장님이 여러 나라에 지사도 내시고, 이랬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첫째, 인구 수가 많아야 하고, 평균 연령대가 젊어야 하고, 정치체제가 안정되어야 하고요. 그다음에 지도자의 개발의지가 아주 강력해야 하고요.

◇ 김혜민> 지금 딱 베트남이네요.

◆ 최양오> 베트남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일 먼저 찍은 곳이 베트남이고요. 당시에 호치민에 가죠. 호치민에 가보니까 벌써 상업도시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행정수도는 하노이였잖습니까? 하노이를 보고 여기다. 10층 이상 건물이 없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베트남의 그런 고위 관료들이 우리가 국제행사를 해야 하니 도와주시오, 그래서 그때 만든 게 하노이 대우호텔이고, 대하 비즈니스 센터를 만들면서 베트남이 성장하는 데 기여를 하시게 되는 거죠.

◇ 김혜민> 그 당시 베트남이 김우중 회장이 전성기로 활동할 때 대한민국과 비슷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아마 베트남의 가능성을 본인이 경험해봤기 때문에 높게 평가하신 것 같고요. 김우중 회장은 우리가 소위 흙수저, 금수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흙수저였던 거죠? 그래서 샐러리맨의 표상,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 최양오> 흙수저라고 표현하기는 그렇고요. 아버님이 대구사범 교장이셨고, 서울상대 교수를 하셨고요. 제주도 도지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6.25 때 납북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요. 김우중 회장은 대구사범 교장할 때 낳기 때문에 고향이 대구고, 그다음에 경기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나와서 서울에서 사신 분인데요. 그때 6.25 때 모든 사람들이 다 고생을 하고, 그다음에 원래 4남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을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이런 도전정신은 굉장했고, 특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 얘기는 개척하라는 얘기입니다. 개척하고, 그런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서 우리나라 영토가 작지만 경제영토는 클 수 있거든요. 따라서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했고, 가장 멀리까지 진출하셨던 분이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 김혜민> 만 30세에 창업을 하셨다고 해요.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으로 첫 출발을 했는데, 제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장하는 한국 경제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쉼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김우중 회장님이 남기신 여러 가지 업적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져야 할 거고요. 또 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들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김우중 회장의 이 점만은 지금 남은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을까요?

◆ 최양오> 세계 시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글로벌 경영자라고 칭하고 싶고요. 해외에서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서 진짜 우리나라가 좁은 땅덩어리긴 하지만 우리의 경제 영토는 더 넓힐 수 있는 그런 교훈은 우리 가슴속에 새겨 넣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 김혜민> 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현대경제연구원 최양오 고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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