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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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장 "文 '원 코리아'? 가능성 믿어, 나라 없던 시절에도 독립운동가들 독립 믿었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8-16 21:43  | 조회 : 2359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8월 16일 (금요일)
■ 대담 : 이준식 독립기념관장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독립기념관장 "文 '원 코리아'? 가능성 믿어, 나라 없던 시절에도 독립운동가들 독립 믿었다"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오늘 4부는 특별한 분과 인터뷰 진행합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74주년 광복절 경축식은 극일 의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광복 10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한반도의 청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요. 2045년 광복 100주년에는 평화와 통일로 하나 된 나라를 만들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이 과연 이뤄질 수 있을지 이분과 함께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이자, 여성 광복군, 지복영 지사의 아들이기도 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준식 독립기념관장님(이하 이준식)> 안녕하세요.

◇ 이동형> 처음부터 이런 질문 그렇습니다만, 최근 일본의 무역 도박에 대해서 일부 세력들이 일본에 사과하고, 고개 숙여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들어 보셨겠습니다만. 독립군의 후손으로서 어떤 기분이 드셨습니까?

◆ 이준식> 안타깝게도 한 세기 전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110년 전에도 이 땅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일본은 강한 나라다, 조선, 대한제국은 약한 나라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한테 대드는 건 뻔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까 강자에게 맞서 싸우지 말고, 그냥 적당히 빌붙어서 사는 게 훨씬 현명한 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친일파가 된 거죠. 역사는 그런 친일파의 길이 결코 옳지 않았음을 입증했습니다. 강한 나라 일본이 강한 나라라고 판단했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졌고요. 약자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해방이 됐고, 해방된 뒤 한 70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일본은 결코 경험하지 않았던 민주주의를 이뤄냈고요. 또 빠른 시간 안에 산업화도 이뤄냈고, 심지어 100년 전, 110년 전은 우리 군사력이라는 게 별 볼일 없었는데, 하도 별 볼일 없으니까 정부군 대신에 민초들이 총을 들고 싸웠는데, 지금은 군사력만 하도라도 세계 7, 8위권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당시보다 훨씬 힘이 세졌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100년 전처럼 여전히 약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그런 패배주의 의식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새로운 친일파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조금 안타깝습니다. 역사에서 제대로 못 배우는 것 같아요.

◇ 이동형> 할아버지이신 지청천 장군. 일본 육사에 들어갔다가 탈출해서 광복군이 되었잖습니까? 그리고 독립군 3대 대첩이라고 하는 대전자령 전투의 지휘관으로. 그 전투에서 돌아가신 겁니까?

◆ 이준식> 아니요. 지청천 장군은 해방 후에 환국하셨고, 195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 이동형> 혹시 직접 말씀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 이준식> 제가 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분명히 뵙기는 뵀을 텐데, 기억은 하나도 없습니다.

◇ 이동형> 어제가 74번째 광복절이었습니다. 지금 관장님, 100년 전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광복 74주년을 맞이한 소회가, 또 독립기념관장으로, 또 독립군의 후손으로서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 이준식> 우리가 흔히 독립운동, 독립운동 하는데, 그 독립운동이라는 말 속에는 굉장히 중요한 함의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자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을 하고 난 다음에 민주주의가 꽃 피는 나라, 국민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나라, 국민의 자유와 평등이 마음껏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이 독립운동에 담겨 있었고요. 그래서 독립운동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늘 첫 번째로 내세운 게 자주독립이었고, 두 번째가 민주공화국 만들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꿈은 일정 부분 실현되기도 했죠. 해방 후 70여 년의 역사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향해서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갔지만 아직도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는 보기 힘든 것 습니다. 지금도 계속 나아가는 과정에 있죠. 그런 의미에서는 광복이라는 것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고요. 또 하나 독립운동의 중요한 함의가 있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가 독립하고 난 다음에 한반도를 둘로 나눠서 민족이 분열되자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는 없었습니다. 다 독립이 되고 나면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그야말로 민족이 통합된 국가를 만들겠다, 나라를 만들겠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런 꿈은 사실은 해방과 동시에 좌절됐습니다. 분단 체제가 수립됐으니까요. 그러니까 진정한 광복의 의미는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민족 통합. 민족이 하나가 되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을 때 지금 한반도에서 꽃 피고 있는 평화 공존의 분위기가 진정한 광복을 향해서 나가는 중요한 단계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백범 선생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으니까. 그러면 아직 독립운동가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후손들의 책임이죠, 이제.

◆ 이준식> 그렇죠.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 했습니다. 그런데 후손들이 그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거죠.

◇ 이동형>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 100주년 때는, 2045년입니다. ‘원 코리아(One Korea)’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겠다. 어떻게 가능한 얘기겠습니까?

◆ 이준식> 저는 가능하다고 믿고요. 또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제강점기 그 엄혹한 시절, 심지어 나라가 없던 그 시절에도 독립운동가들은 우리는 반드시 독립이 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행사를 하면 이 행사 내년에는 꼭 서울에서 합시다. 3.1절 기념식 할 때 내년 3.1절 기념식은 서울에서 합시다.

◇ 이동형> 다 해외에 계셨으니까.

◆ 이준식> 다 해외에 계셨으니까요. 그 엄혹한 시기에도 독립의 전망이 확실히 보이지 않던 시기에도 우리는 반드시 독립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는 훨씬 더 좋습니다. 일단 나라가 있으니까요. 나라가 있으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서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민족통일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통일을 이루는 것이 사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책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그런데 분단된 지 벌써 70년이 됐고요. 특히 2, 30대 젊은층에 설문조사를 하면 통일 꼭 필요한 것이냐, 통일 비용이 너무 부담된다, 후세대한테 전가하는 게 아니냐,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답하는 친구들도 많단 말이죠?

◆ 이준식>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그런 생각을 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한 30대 중반 이상은 그래도 민족은 하나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데,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워낙 분단 체제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또는 통일 비용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인지, 그냥 싸우지만 않고, 그냥 사이좋게 남북이 갈라져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생각을 한다고 그러는데요. 사실 그것도 한 방법일 수 있는데,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 갈라져 있으면 굉장히 불리하다는 겁니다. 하나로 합해도 우리가 한반도에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은데, 아무리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나뉘어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하나로 합해지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 이동형> 경제적으로도, 미래 먹거리를 위해서도 그게 맞겠죠. 그런데 방금 젊은층이 통일 반대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최근에 일본 불매운동 관련해서 또 20대가 가장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이건 어떻게 이해할까요?

◆ 이준식> 아무래도 일본 제품을 많이 쓰는 게 젊은 세대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일본 제품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젊은 세대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여전히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있고요. 또 그렇지 않고 철저하게 개인주의화되는 그런 경향을 보이는 젊은층이 있는데, 그래도 이런 일본의 경제 침략을 통해서 전자가 아직 살아있음을 보였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아까 친일 잔재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기회에, 일본이 도발하고 있는 이 기회에 친일 잔재를 청산하자, 이런 이야기가 많이 있거든요. 어디서부터 친일 잔재가 청산되어야 할까요?

◆ 이준식> 사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마자 우리가 해야 할 과제가 친일 잔재, 혹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거였는데, 그것을 하지 못해서 그리고 또한 74년이 지나면서 정말 꼬일 대로 꼬여버렸습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금도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돼서 여기저기서 큰소리를 치고 있고. 예를 들어서 한국의 메이저 언론이라고 하는 신문사들이 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하는 신문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친일 청산에 대해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상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친일 청산하자고 하면 빨갱이다, 친북이다. 세상에 친일 청산하자는 것하고 이데올로기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친일 청산하자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좌우를 떠나서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내세운 구호였는데요. 친일 청산을 못 하는 바람에 꼬일 대로 꼬여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놔둘 수는 없죠. 풀어야죠. 풀어야 되는데, 푸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역시 국민들이 아직도 이 땅에 친일의 문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친일의 목소리를 소수화시키는, 주변화시키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그러니까 관장님 말씀대로 반민특위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었겠죠. 친일 잔재 청산을 못 했던 게. 그러고 나서 그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됐고, 또 지방 곳곳에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져 있고, 국립묘지에 가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나란히 누워 있고.

◆ 이준식>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친일파 무덤이 위에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무덤이 친일파 무덤을 떠받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 이동형> 아직 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 이준식> 네.

◇ 이동형> 그런데 이런 일을 하려고 해도 또 이념 논쟁을 끌고 가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만 또 빨갱이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단 말이죠. 그러면서 이제는 그런 갈등 양상은 그만 둬야 하는 거 아니냐, 화해로 가자, 늘 또 이런 주장이 나오고. 

◆ 이준식> 화해로 가는 것은 한일관계도 그렇고요. 한국 사회 내부에서 친일 담론도 마찬가지인데, 화해로 가는 것은 잘못한 사람, 또는 가해자가 자신들이 한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죄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게 전제가 됩니다. 반성과 사죄 없는 화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실컷 때려놓고 자기가 화해하자? 이런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화해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화해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 전제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진솔하게 자기 잘못을 사죄하는 거죠. 친일의 경우에는 친일파는 이미 다 죽었으니까요.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들은 다 죽었으니까 본인들이 사죄를 할 기회는 없어졌지만, 그렇다면 그 후손들이 대신해서라도 사죄를 해야죠. 사죄를 못 한다면 더 이상 친일을 옹호하는 얘기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친일을 한 사람들의 후손이 친일을 정당화하는 얘기를 자꾸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에 마치 친일을 옹호하는 것이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는 게 문제인 거죠.

◇ 이동형> 예를 들면 국립묘지에서 친일파 무덤을 빼내자, 이것도 국가가 마음대로 못 하거든요. 그 후손들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뺄 수 있으니까.

◆ 이준식> 아니면 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법 개정을 누군가가 막고 있는 거죠.

◇ 이동형> 쉽지 않은 문제인데, 아까 우리 젊은이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만, 학교 다닐 때 고대, 중세, 이런 역사 공부를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근현대사 공부는 뒤에 페이지만 있고, 거의 안 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제대로 공부를 안 한단 말이죠.

◆ 이준식> 저희 때 그랬습니다. 조선 후기까지 배우면 한국사 공부는 끝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래도 좋아져서요. 워낙 역사 교사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도 요즘은 근현대사 학습을 학생들에게 많이 시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박근혜 정부 때 다시 또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했어요. 그러면 교실에서 또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역사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전처럼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역시 청소년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제대로 일깨우려면, 기본적으로는 역사 교육이 잘 돼야 하는데, 학교에서 역사 교육이 잘 돼야 되고, 그다음에 시민을 상대로 한 시민 역사 교육이 잘 돼야 하는데, 역사 교육의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그 답을 제대로 실행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 이동형> 이준식 관장님의 외조부도 무장 투쟁하셨던 분인데, 의열단 김원봉 선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무장 투쟁이 게릴라 식으로 다 외국에서, 특히 중국에서 많이 일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자료가 많지 않고. 의열단 같은 경우도 약산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이름조차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대한민국 독립군의 무장 투쟁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것 아니냐, 이런 지적이 있습니다.

◆ 이준식> 무장 투쟁, 의열 투쟁을 비롯해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은 기본적으로 자기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이 일제에게 발각되면 그 기록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의 대부분은 일제의 기록을 통해서 얻은 겁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실상을 알기는 굉장히 어려운데, 그런 가운데서도 무장 투쟁, 의열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무장 투쟁의 경우에는 중요한 게 이게 해외에서 벌어졌다는 겁니다. 국내에서 무장 투쟁을 벌인 경우는 거의 없고요. 대부분 해외에서 벌였는데, 생각해보면 남의 나라에서 독립군을 만들고, 총 들고 싸우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남의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 군대 만들겠습니다, 라고 하면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용인을 하겠습니까? 한국 정부가 용인하겠습니까? 안 하죠. 독립군이라는 건 그런 겁니다. 만주든, 중국 관내든, 러시아 연해주든, 미국이든, 독립군을 만들어서 활동하려고 하면 현지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것을 물론이고, 현지 주민들로부터 아주 심각한 방해를 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무장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요. 무장 투쟁의 역사를 학생이나 국민들에게 알리는 데 그동안 제약 요인이 된 것은 이름이 알려진 분 중심으로 자꾸 무장 투쟁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실제로 무장 투쟁에 참여했던 분들, 그분들은 대부분 이름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이름을 알리지 못한 독립투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조명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이회영 선생이나 이상룡 선생도 그 많은 재산 다 팔아서 결국은 외국 나가서 무장 투쟁한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일본이라는 막강 군대를 향해서 개인이 그냥 맞서 보는 거잖습니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 이준식> 1910년 강제 병합이 되고 난 다음에 망명하신 분들, 또는 강제 병합 이전에 총 들고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그게 뭐냐면 일제의 노예가 돼서 사느니, 차라리 자유민으로 살다가 죽는 길을 택하겠다. 자유를 위해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겠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해서 바로 독립이 될 거라고는 아마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희망은 가지고 있었겠지만, 일제와 싸운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노예로 살 수는 없다는 결심에 따라서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것이고,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독립에 대한 의지, 독립에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변절하는 거죠. 변절한 독립운동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다 그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갔고, 심지어는 독립의 그 날을 보지 못하고 해외에서 돌아가신 분도 많습니다. 그 돌아가신 분들의 유언을 보면 정말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은데요. 이런 유언이 많습니다. 독립이 되기 전까지는 내 유해를 고국으로 가지고 가지 마라, 나는 죽어서도 해방되지 않은 내 땅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해방이 되거든 내 유해를 조국으로 가지고 가라. 그런 한 분, 한 분의 의지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은 지속됐고, 그 독립운동의 결과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변절, 말씀해주셨으니까. 변절했던 사람들은 독립이라는 게 불가능하다고 아마 판단했단을 것 같습니다.

◆ 이준식> 독립될 줄 몰랐다고 생각했겠죠.

◇ 이동형> 그리고 최근에 KBS에서 ‘밀정’이라는 다큐를 만들었는데, 보셨습니까?

◆ 이준식> 네.

◇ 이동형> 반향이 조금 있더라고요. 밀정으로 변신한 사람들도 다 그런 생각을 했을 거 아닙니까?

◆ 이준식> 그렇죠. 독립운동 하다가 변절한 사람들은 이제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까 변절을 한 거죠. 그런데 변절하지 않고 계속 독립운동 하신 분들은 아무리 우리가 힘들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독립을 이루는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죠. 

◇ 이동형> 최근 몇 년 사이에요. 일본을 향해서 무장 투쟁을 한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밀정’이라든가, ‘암살,’ 또 최근에 ‘봉오동 전투’까지. 그리고 우리한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 ‘밀정’ 같으면 김시헌 선생, ‘암살’은 김원봉이나 남자현 선생, ‘봉오동 전투’는 민초들의 이야기고요. 이게 굉장히 교과서보다 도움이 더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 이준식> 이미 1930년대 그런 이야기가 많이 돌았습니다. 영화는 총알이고, 대포다. 실제로 전쟁에서 이기는 데, 당시에는 전쟁의 시대였으니까. 전쟁에서 이기는 데 영화는 총이나 대포보다 더 강한 무기다. 사람들한테 뭔가를 심어주는데 영화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 더 확대하면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 예술 분야가 다 해당되겠죠. 

◇ 이동형> 전쟁으로 치면 선전전이죠?

◆ 이준식> 선전전이죠, 그게. 그래서 지금 아까 김원봉 선생 말씀도 하셨는데, 사실은 영화 ‘암살’이 상영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김원봉 선생은 한국사에서 거의 잊힌 존재였습니다. 소수의 전문가들만 아는 이름이었는데, 영화 ‘암살’이 개봉되고 나서 갑자기 김원봉 선생이 정치적으로는 아직 복권이 안 됐지만, 역사적으로 복권이 돼버렸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잘 모르던 남자현 선생 같은 분이 막 일약 SNS에서 유명인사가 돼버렸어요. 그런 것들이 영화가 갖는 효과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게 긍정적으로 나오면 굉장히 좋은 거고, 또 걱정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역사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늘 조심하면서 영화를 통해서 국민들의 역사 의식을 일깨우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이동형> 또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마지막에 친일파를 처단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현실하고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통쾌함을 주지 않았을까, 영화적 상상력으로 인해서. 그 영화가 그런 이유로 인기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봉오동 전투’ 영화 개봉됐으니까 청산리 전투나 아니면 대전자령 전투도 영화화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 이준식> 저는 아무래도 지청천 장군의 후손이니까요. 대전자령 전투를 영화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대전자령 전투 같은 경우에는 전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보다 더 컸다는 평가도 받거든요.

◇ 이동형> 그래요, 알겠습니다. 조금 기다려보죠.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 이준식>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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