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11월 6일 (수요일)
■ 대담 : 임종진 사진치유 전문기간인 ‘공감아이’ 대표, 김순자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삼척간첩단 피해자 "끌려가보니 박종철 고문 받던 방, 대가리 깨지고 손 터질 정도로 때려"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고문수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죠. 남영동 대공분실. 현재는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가면 억울한 간첩 누명을 쓰고 감옥 에서 청춘을 잃어버린 분들이 직접 찍은 사진을 볼 수 있는데요.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손에 든 카메라가 간첩 조작 피해자들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오늘 4부에서는 이 얘기를 해기 위해 두 분 모셨습니다. 사진치유 전문기간인 ‘공감아이’ 대표 임종진 사진작가, 그리고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김순자 씨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김순자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이하 김순자)> 네, 안녕하세요.
◆ 임종진 사진치유 전문기간인 ‘공감아이’ 대표(이하 임종진)>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김순자 씨는 혹시 방송이 처음이십니까?
◆ 김순자> 처음입니다.
◇ 이동형> 들어오시면서 떨린다고. 아들이랑 이야기하신다고 생각하시면서 편하게 하십시오.
◆ 김순자> 네, 감사합니다.
◇ 이동형> 임 작가님은 원래 사진기자 출신이십니까?
◆ 임종진> 네, 사진기자였습니다.
◇ 이동형> 어떤 계기로 김순자 씨 등을 찍으셨을까요?
◆ 임종진> 저는 사실 사진기자를 그만두고 사진심리상담사로 활동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데요. 국가폭력 고문피해자 분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하던 와중에 우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선생님들과 인연이 돼서 김순자 선생님을 포함해서 다섯 분 선생님들에게 치유적 행위로써의 사진을 권하는 일을 지난 3년 동안 해온 겁니다.
◇ 이동형> 사진으로 치유한다, 저는 조금 생소한데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임종진>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 안에 들어와 있는 기억의 순간과 대면을 위한 도구로 쓰는 건데요. 우리 선생님들이 보통 고문 받으셨거나 수감이 되셨거나 이런 공간에 대한 아픈 상처들을 가슴속에 가지고 계시잖아요. 대부분 그런 것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감정이 있었는데, 그것을 스스로 직접 마주하고, 다가서는 매개체로써 사진을 활용하시는 거죠.
◇ 이동형> 지금 김순자 씨 같은 경우에는 보니까 남영동 대공분실 원형계단이 찍혀 있는데요. 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신 겁니까?
◆ 김순자> 걸어 올라갔습니다.
◇ 이동형> 걸어서 어디를 올라가신 겁니까?
◆ 김순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처음에 갔을 때 그렇게 가서 너무 정신이 없어 끌려갔으니까. 어디까지 가서 그냥 방에 들이밀어 주니까 그 방으로 그냥 들어갔죠.
◇ 이동형> 수사관이 체포할 때 영장이라든가, 이런 것은 혹시?
◆ 김순자>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 이동형> 그냥 잡아갔어요?
◆ 김순자> 네. 사무실에 와서 말도 없이 그냥 끌고 나가더라고요.
◇ 이동형> 그게 언제 적 일입니까?
◆ 김순자> 79년 6월 21일.
◇ 이동형> 그러면 그때가 30대 초반쯤 됐을까요?
◆ 김순자> 네. 서른 넘었죠.
◇ 이동형> 왜 끌려갔는지 알고 가신 겁니까?
◆ 김순자> 모르고 갔죠. 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이미 가족들이 다 끌려갔는데, 일주일 됐죠, 가족들 끌려간 지가. 갈 때 그냥 집에 있으라고 해서 있어도 안 와서 내가 그때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수금을 해야 한다고 나갔다가 들어와서 왔냐고 물어보면 안 왔다고 하고. 또 다니다 와보면 또 안 왔고. 어디로 갔나, 오면 물어봐라, 내가 찾아갈 테니까 어디로 오라는지 물어보라고 했는데, 오지 않았다고 해요. 계속 안 와서 보험회사 사무실로 가니까 사무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더라고요.
◇ 이동형> 수사관들이?
◆ 김순자> 네.
◇ 이동형> 가족분들이 끌려갈 때도 지금 어디 갔나 말도 없이 데리고 갔고요?
◆ 김순자> 그렇죠. 어디로 간지도 모르고, 어디로 끌고 갔는지도 모르고요.
◇ 이동형> 그러면 가족들이 먼저 끌려가고 김순자 씨가 나중에 끌려가고요?
◆ 김순자> 일주일 후에 끌려갔고요.
◇ 이동형> 그러고 나서 취조 같은 게 있었습니까?
◆ 김순자> 없었고, 그냥 남영동 거리로 바로 끌고 가서 계단 올라가서 어느 방에 들이미니까 순자냐, 영자냐,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지금 보면 박종철 학생 고문 받던 그 방이에요. 그 방이라고 하는 건 지금 가보니까 원형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그 방에서 내가 고문 받았다고 하는 거지, 옆방인지도 모르는 거예요.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다 바뀌었어요. 색깔도 바뀌고.
◇ 이동형> 거기서 고문이 이루어졌어요?
◆ 김순자> 네. 처음에는 뭘 물어보는데, 물어보는 말을 하나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있었더니 말 안 하고 있다고 신발을 벗어서 얼굴을 막 때리고, 머리를 그냥 때리고 해서 대가리 깨지는 것 같이 힘들었는데요. 손도 책상에 올리라고 해서 올리니까 손이 터질 정도로 아파서.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흐르더라고요. 고통스러웠어요.
◇ 이동형> 임 작가님이 사진으로 치유를 하려면 선생님 같은 분들의 사연을 들어야 하죠?
◆ 임종진> 네, 이 과정이 사진을 교육하는 과정하고 사진 상담 과정이거든요. 그래서 그 과정 속에서 선생님들의 말씀을 많이 듣고, 나눌 수도 있는 것들은 전해드리고, 그렇게 하죠.
◇ 이동형> 선생님은 왜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간 겁니까?
◆ 임종진> 당시 수없이 많은 간첩 조작사건이 많이 있었는데요. 삼척고정간첩단 사건 12명의 모든 일가족이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거든요. 그런 타겟이 당시에 필요했던 거죠. 박정희 정권 하에서. 그래서 가서 모든 일가족들이,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든 가족이 들어가셨고요. 부친과 외당숙은 사형을 당하셨어요, 바로. 그리고 친척들 중에는 자살도 두 분이나 하셨을 정도로 이게 온가족이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죠.
◇ 이동형> 정리하면 이런 거네요. 박정희 유신 말기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이 많아지니까 간첩사건을 조작해서 반대 시위라든가, 이런 것을 조용하게 시키겠다, 이런 목적으로 죄 없는 양민들을 간첩으로 몰아간 건데요.
◆ 임종진> 그 당시에 많았죠. 그런데 저희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것은 어쨌든 진실규명과 대부분 2, 3년 전에 무죄 판결을 받으셨는데, 진실의 규명이 중요한 것도 있지만 사실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이분들이. 이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선생님 이런 상처의 대면도 아픈 기억을 조금씩 덜어내는 과정인 거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선생님들이 기쁘고, 유희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대상과도 만나고, 이런 식으로 진행을 해왔던 거죠.
◇ 이동형> 지금 혐의를 보니까 6.25 전쟁 때 월북했던 남파간첩인 자신들의 친족과 접촉, 지하당을 조직해 북한을 찬양, 고무하고 동해안 경비 상황과 군사기밀을 탐지했다, 이런 혐의인데요. 지하당을 조직해서 북한을 찬양, 고무.
◆ 김순자> 그런 일 전혀 없었습니다.
◇ 이동형> 군사기밀 탐지?
◆ 김순자> 그런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뭘 물어봐도 말뜻을 모르겠고, 그러니까 나중에 군부대가 어디에 있는가 물어봤느냐, 이렇게 물어봤어요. 시장 가다 보면 군인들 초소가 있는 것을 봤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을 봤다.
◇ 이동형> 봤다고 하면 그게 군사기밀 탐지가 되는 거군요.
◆ 김순자> 그것을 군사기밀을 탐지해서 간첩한테 줬다는데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 이동형> 나중에 재판 가시지 않았습니까?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는 아까 사형 당했다고 말씀하셨고.
◆ 김순자> 네, 아버지 사형 당하고, 아버지 사촌동생도 사형 당하고. 83년 7월에 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됐는데, 우리 삼남매는 다 감옥에 있어서 아버지를 사형 시킨 시신도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 이동형> 그러면 삼남매를 몇 년씩 받으셨어요?
◆ 김순자> 동생은 무기징역, 또 아버지 사촌동생도 무기징역. 동생 하나는 7년, 나는 5년, 이렇게. 어머니도 감옥에서 3년 6월. 다 감옥에 있으니까. 또 작은아버지도. 작은아버지 두 분도 다 7년. 아버지 사촌동생도 또 5년. 친형제 사형 받은 사람 아들은 10년. 그 어머니는 또 3년 6월.
◇ 이동형> 한 일가친척이 풍비박산이 났다, 이렇게 볼 수 있겠는데.
◆ 김순자> 몇 집 가정이 아주 박살이 났을 정도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풍비박산이 아니고, 바깥의 어린아이들이, 100일도 안 된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서.
◇ 이동형> 나중엔 간첩의 자식이다, 이렇게 해서 힘들었겠네요?
◆ 김순자> 네, 간첩의 자식이라고 해서 오는 것도 싫어하고, 집집마다. 우리 여동생이 밖에 있었지만 동생 남편이 간첩 새끼 왜 데리고 왔느냐고 할 정도로 다 하니까 그 애기는 어디로 갈 곳이 없었어요. 엄마도 키우지 못하고 남의 집에 있으면서 너무 고통스럽고, 서럽게. 그래도 생명은 살아있어요, 지금도.
◇ 이동형> 지금 라디오로 듣고 계시는 분들은 YTN 보이는 라디오 들어오시면 김순자 씨의 얼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냥 누가 봐도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인데 간첩으로 몰았네요. 억울한 세월은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어요?
◆ 김순자> 억울한 것은 다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의 생명이 고귀하고, 사람이 귀중하니까 살아올 수 있지 않았나. 내가 죄가 없으니까 당당하게 내 마음, 내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야겠다.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런 마음으로 또 살아지더라고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죠.
◇ 이동형> 제가 지금 10분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상당히 속이 상하거든요. 임 작가님은 김순자 씨뿐 아니라 많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러면 내가 사진으로 이분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려고 만났는데, 오히려 내가 트라우마를 겪을 것 같은데요.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게 국가폭력 아닙니까?
◆ 임종진> 아프죠. 많이 아프고, 그 부분에 대해서 제 자신 스스로도 마음이 무너지고 하는 경험이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것은 우선 제 감정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우리 선생님들이 과거에 그런 기억 안에서 늘 좌절하거나 어떤 절망감으로 오늘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던 상황은 조금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고통과 만나는 감정들을 볼 때도 같이 힘들기는 했지만, 이 선생님들이 자연풍경이라든가, 꽃을 보거나, 가족들을 보고, 외손주들을 찍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요. 간첩이라고 조작된 것보다는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그런 것들이 지난 3년을 채워오는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선생님은 아까 5년 받으셨다고 했는데, 만기 출소하셨네요? 5년 다 사셨네요?
◆ 김순자> 10년 구형을 줬는데, 판사 1심에서 7년을 주니까 항소를 했더니 항소에서 2년을 깎아줘서 5년을 받아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 이동형> 2006년 진실화해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진실규명을 신청하셨고, 바로 해결됐습니까?
◆ 김순자> 그때 기각됐습니다.
◇ 이동형> 기각이 됐어요? 왜요?
◆ 김순자> 거기 가서 외당숙이 왔다 갔기 때문에 그 사실을 얘기했다고 다른 분들은 이런 일이 없었다고 했는데, 나는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기각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 이동형> 그러니까 원래 이북 출신이십니까?
◆ 김순자> 아니에요. 강원도 삼척. 넘어온 분도 강원도 삼척이 집이고요. 삼척이 자기 집이죠.
◇ 이동형> 그런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그러면, 이러면서 기각시켰단 말이죠?
◆ 김순자> 네.
◇ 이동형> 그래서 재심해서 결국은 받아들여졌네요?
◆ 김순자> 네, 그다음에 가서 민가협에서 가서 김순자가 간첩 아니면 당신이 책임지겠느냐, 왜 이렇게 기각했냐. 빨리 이 사건은 당신들이 기각할 일이 아니고, 올려라, 막 그러니까 동생이 그때 가서 따졌어요. 남동생이. 김순자가 기각이요, 우리 명이 다 기각이요, 이렇게 물어봤더니 그때 그 조사국장님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렇게.
◇ 이동형> 그래서 결국은 대법원에서 재심 무죄 판결이 난 게 2013년 11월 14일이네요. 상당히 오래 걸렸습니다. 그때 심경이 어땠어요? 무죄라고 판사 입에서 떨어질 때.
◆ 김순자> 너무 놀랐고, 고맙고, 반갑고, 정말 은혜가 하늘 같았고, 그랬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진실은 밝혀지는구나.
◇ 이동형> 돌아가신 분도 계시니까.
◆ 김순자> 그런 억울한 아버지 때문에 많이 울었습니다.
◇ 이동형> 국가가 원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 김순자> 왜 이렇게 됐는지,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지 궁금했습니다, 많이. 왜 우리가 이런 억울한 국가의 큰 일을 우리 가족이 이렇게 다 짊어지고 가야 하나, 참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 이동형> 이렇게 국가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 중에 혹시 단 한 사람이라도 김순자 씨나 주위 가족분들한테 사과한 사람 있습니까?
◆ 김순자> 없습니다. 다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로. 그러면서 옆에 오는 거 아직도 두려워하고, 여전히 한 번 찍힌 낙인이 쉽게 풀려나가지 않더라. 어렵다.
◇ 이동형> 5년 후 출소하고 나서도 관계당국에서 따라다녔습니까?
◆ 김순자> 보안감찰이 너무. 감옥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감옥에서는 먹을 것을 주고, 잠잘 데를 주지만, 밖에 나와서는 내가 노력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게 안 했습니다.
◇ 이동형> 취업도 못 하고?
◆ 김순자> 아무것도 못 합니다. 파출부도 못 하게 합니다. 그 집에 찾아가서 막 얘기해서 그 집에서 내쫓을 정도로.
◇ 이동형> 간첩이다, 쓰지 마라, 이렇게?
◆ 김순자> 네.
◇ 이동형> 힘든 세월을 어떻게 지내셨어요?
◆ 김순자> 너무 힘들었지만, 그 힘든 세월을 계속 극복하려고 많이 노력했죠. 그런데 오늘 날 이렇게 사진 치유해준다는 선생님을 만나서 이런 즐거운 세상을 이제 볼 수 있고, 즐겁게 살 수 있어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이동형> 많이 치유가 되셨어요?
◆ 김순자> 많이 치유가 됩니다. 이 안에 쌓였던 것을 풀어낼 수 있고, 이렇게 알려져서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고, 이러니까. 예전에는 누구한테 가서 얘기도 할 수 없었고, 들어주지도 않았고요. 들으려고도 안 하고요.
◇ 이동형> 손자, 손녀들이 계시네요. 손녀들이 우리 어머님 이렇게 고통 당한 것을 아세요?
◆ 김순자> 네, 이제는 압니다.
◆ 임종진> 김순자 선생님이 체포되실 때 젖먹이까지 포함해서 세 명의 자녀가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돌보지 못하는 상태로 끌려 가셨거든요. 그 한이 맺히셨는데, 우리 손주들이 그렇게 업어서 키워고 사랑을 주고 계세요. 그런 마음으로 찍으신 사진들이죠.
◇ 이동형> 이게 직접 찍으신 거예요?
◆ 임종진> 전부 다 선생님이 찍은 사진입니다.
◇ 이동형> 아까 이야기한 대공분실 원형계단도 직접 찍으시고?
◆ 김순자> 네, 다 제가 직접. 이제는 사진 잘 찍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첩으로 끌려갔을 때 사진기 찍어본 일이 없는데, 저 사진 찍어서 간첩 갖다 줬다고 저 년 두드려 패라고.
◇ 이동형> 당시에 사진 찍을 줄도 몰랐는데, 사진 찍어서 간첩 줬다, 이렇게 얘기했다는 거죠?
◆ 김순자> 네, 당시 60년대 사진기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 가족사진도 하나 없는데, 찍을 게 없어서. 아버지 사진도 지금 남아있는 게 없는데. 그런데 경찰이 와서 간첩한테 사진 찍어다 줬다고.
◇ 이동형> 여기 또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내부 사진을 찍었는데.
◆ 김순자> 처음에는 가서 못 찍었는데, 여러 번 가서 이제 들어가서 찍었습니다.
◇ 이동형> 그러니까 저도 만일 제가 그런 일을 겪었으면 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 김순자> 처음에 가서는 쳐다보는 것도 힘들어서 잘 보지도 못하고, 몇 번을 간 다음에 들어가서 찍을 수 있었습니다.
◆ 임종진> 제가 조금 설명을 드리자면, 처음에는 당연히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 공간을 마주하게 되시는데요. 중요한 것이 지속적으로 이 공간들을 찾아가시는 거거든요. 상처를 준 공간들을. 점점 가시다 보니 분노라는 감정으로 가고, 그러다가 다시 객관적인 입장으로 돌아와서 이 공간들을 바라보게 되고요. 마지막 즈음이 돼서는 이 공간을 자신의 결백이나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스스로 마음이 전이되는 그런 과정이 생기는, 그래서 사진 치유 프로그램이거든요. 그래서 이 공간에 저렇게 들어가셔서 저런 시구문이나 공간을 찍으실 수 있었던 건데요. 사진을 찍는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님이 저 공간에서 사형장을 떠난 곳이니까 그 공간을 내가 이제라도 지켜 바라본다, 그런 마음이 위안을 얻으신 과정들인 거죠.
◇ 이동형> 저는 사진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만, 굉장히 잘 찍으신 사진 같은데요.
◆ 임종진> 그런 부분도 선생님들이 제가 온오프만 가르쳐드리거든요. 그런데 온몸으로 이 프레임들을 보세요. 그래서 이런 형식의 사진들이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김순자> 많은 세월 동안 많이 찍었어요.
◇ 이동형> 청취자 댓글 좀 봅시다. 진달래님, “진실은 밝혀지는구나, 하시는 어머님 말씀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 긴 세월이 흘렀네요.” 이정애님, “어머니, 오랜 시간 많이 힘드셨을 텐데,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려야 할지요. 가슴이 너무 먹먹합니다.” 영혼의선율님께서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 하죠?” 신유진 씨, 우리 방송에 나오는 변호사네요. “이렇게 방송 나오셔서 말씀하시는 것도 치유의 일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해주셨고요. 많은 분들이 이 사진첩 어떻게 구매하냐고 물어보시는데요?
◆ 임종진> 도록은 지금 현재 이달 17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이죠. 현재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되어 있는 이 공간에서 17일까지 사진 치유전이 열립니다. 이 공간에 오시면 도록을 무료로 받아가실 수 있습니다.
◇ 이동형> 11월 17일까지 민주인권기념관 5층.
◆ 임종진> 월요일은 휴관이고요.
◇ 이동형> 알겠습니다. 지금 보니까 손자, 손녀들이 굉장히 밝게 큰 것 같습니다.
◆ 김순자> 네, 밝게 살았습니다. 형사들이 와서 그런 이야기하더군요. 그렇게 고난 속에 살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밝게 사냐고 물어보는 일도 있었어요.
◇ 이동형> 오늘 방송 나가는 거 듣고 있겠죠?
◆ 김순자>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동형> 작가님, 김순자 선생님 말고도 이런 분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너무 안타까운 건데.
◆ 김순자> 너무 많습니다. 제가 억울하다고 했는데, 더 억울한 분들도 너무 많더라고요.
◆ 임종진> 5.18 같은 경우는 어떻게 보면 구심체가 있어서 힘을 나눌 수 있는 반면에, 이 간첩조작사건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굉장히 쉽지 않은 상황이고요. 아주 많은 분들이 이런 고통을 겪어내셨죠.
◇ 이동형> 그런데 보면 당시 간첩조작단 사건이 재일교포 간첩조작도 많았고, 그리고 특이하게 섬에서 사는 사람들, 어부들, 바닷가에 있는 분들, 이런 분들을 간첩조작으로 많이 삼았거든요. 이유가 있을까요?
◆ 임종진> 실제 어쨌든 배를 타고 오고 가면서 북쪽 땅을 넘나들까, 이렇게 다 묶고. 다 납북되었다가 오면 그것도 간첩으로 몰고, 이런 분들이 많이 있었죠.
◆ 김순자> 그분이 와서 간첩이었으면 그분이 와서 다 끌려갔잖아요. 그러면 지금 선생님들 저를 봤기 때문에 또 간첩이 되는 거예요. 본 것 때문에 간첩이 되는 거죠. 신고 안 했기 때문에. 누구나 간첩이 될 수 있다, 끌려가면 다 간첩되는 거예요.
◇ 이동형> 이런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촌에서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니까 소위 말해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 임종진> 충분히 그 이유가 있죠.
◇ 이동형> 그러다 보니까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사람들.
◆ 김순자> 너무 가난하게 산 것이 간첩으로 끌려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임종진> 당시 국가권력들이 굉장히 치졸하고, 이런 악랄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게 있었죠.
◆ 김순자> 그런데 그분이 60년대에 왔는데, 70년대에 와서 끌고 간 거예요? 그러면서 현행범이라고 하고, 이렇게 말을 하고요. 뭐가 이해가 됩니까?
◇ 이동형> 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죠. 가족분들은 그러면 살아계신 분들은 다 대법원 가서 무죄 판결 받은 겁니까?
◆ 김순자> 다 받았어요. 사형수들도 다 무죄판결 받았어요. 그러니까 더 억울하고, 더 가슴 아프고.
◇ 이동형> 자녀분들도 굉장히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 김순자> 네.
◇ 이동형> 자녀분들도 굉장히 어렵게 살았을 테니까요?
◆ 김순자> 말로 다 못해요. 애들이 우리를 누가 키웠냐, 그냥 거리에 다니면서 각자가 큰 거예요. 세 남매가. 돌봐주는 사람도 특별히 없었고. 아픈 거 다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
◆ 임종진> 간첩의 아내와 간첩의 자식으로 살아온다는 게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죠.
◆ 김순자> 짐작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 이동형> 2062님께서 “어머니 행복하세요. 라디오 나와 주셔서, 또 얘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훌륭하신 어머님이십니다.” 이런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요. 이런 메시지 들으면 또 힘이 나시죠?
◆ 김순자> 네. 저런 분도 있으니까 이제는 마음이 아팠던 게 자꾸 풀려 나오죠. 그동안에는 계속 너는 간첩이야, 아직 그렇게 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고요.
◇ 이동형> 지금은 사진으로 치유를 많이 하셨다고 하니까, 지금은 악몽을 꾼다든가, 옛날 일을 떠올린다든가, 없어지셨겠네요?
◆ 김순자> 네, 그래도 꿈은 꾸죠.
◆ 임종진> 그렇죠. 쉽게 풀어지지는 않고, 조금 덜어지는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김순자> 큰 나무가 한 번 된서리를 맞으면 나무가 잎사귀가 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기에 그만큼 고충이 심한 거죠. 다시 돋아나려면.
◇ 이동형> 서대문 형무소 사진도 찍으셨고, 갈매기 사진은 왜 찍으셨나요?
◆ 김순자> 갈매기가 너무 예쁘잖아요. 갈매기도 예쁜데, 사람은 더 예쁘죠. 고문한 사람들이 불쌍한 거예요. 너무 뭘 모르고, 사람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고문한다는 게.
◇ 이동형> 그래요. 남산의 가을풍경, 남산타워도 보이고요.
◆ 김순자> 처음 올라가봤습니다.
◇ 이동형> 남산을 처음 올라가보셨어요?
◆ 김순자> 네.
◇ 이동형> 너무 아름답던가요?
◆ 김순자> 네. 63빌딩도 처음 가봤습니다, 저는.
◇ 이동형> 63빌딩 사진도 찍으셨고?
◆ 김순자> 70년 넘어서 비행기도 처음 타봤고요. 중국 가는 거.
◆ 임종진> 그런 유희적 감정들을 자꾸 느끼고 확인하는 이런 시간들을 함께 가졌던 거죠.
◇ 이동형> 사진 앞으로 계속 찍으실 거죠?
◆ 김순자> 네.
◇ 이동형> 즐겁습니까?
◆ 김순자> 재미있어요. 아름답고.
◇ 이동형> 손주, 손녀들 사진 찍어주는 것도 큰 기쁨이시겠어요? 이것들 자라는 것도 보고요.
◆ 김순자> 네, 귀여워서 너무 예쁘고.
◇ 이동형> 어쨌든 마음의 치유가 많이 되셨다고 하니 다행이고요. 아직 김순자 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고문했던 수사당국 관계자들, 그리고 구형을 했던 검찰들, 판결을 내렸던 판사들. 다 살아있다고 봅니다. 그분들, 책임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늦었지만 사과가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하네요. 어머님, 오늘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김순자> 감사합니다.
◇ 이동형> 작가님도 감사합니다.
◆ 임종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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