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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민의표출의 공간 ‘광장’...점거 행위는 의미 훼손하는 것”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6-27 09:53  | 조회 : 2219 
YTN라디오(FM 94.5)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6월 27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출근길에 라디오로 만나는 깊이 있는 오디오 칼럼 시간입니다. 목요일마다 역사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분석해 주는 분이십니다.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나오셨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김호성: 오늘의 오디오 칼럼 제목은요?

◆ 전우용: 요즘 며칠 광화문광장으로 불리는 곳이 시끄러워서요. ‘정치의 상징가로’ 이 정도로 해볼까요.

◇ 김호성: 예. 광화문 요즘에 나가보면 아주 해질무렵에 기온도 좋고 그래서 편안하게 도심 속의 여유를 즐기면 좋겠는데 전혀 지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보면 광화문이 경복궁의 정문이잖아요, 박사님. 그런데 조선시대부터 이 같은 어떤 집회라든가, 이런 분위기가 있었나요?

◆ 전우용: 얘기를 짧게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일단 여기부터 보죠. 광화문광장이란 이름을 처음,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말이었어요. 그것도 원래 광화문을 이전해버리고, 지금 광화문은 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지은 거죠. 옮겨지은 거고. 조선총독부 지으면서 지금 민속박물관 정문 자리 쪽으로 옮겨갔다가 빈 채로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광화문광장이란 말이 붙었는데 그때 광장은 지금 광장 전체가 아니고요. 광화문 앞에 빈 공간 일부, 교차하는 공간만을 이야기했어요. 원래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전로, 앞길이라고 붙였고요. 누가 그런 말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에는 흔히 육조거리라는 말로도 많이 불렸죠. 왕궁이 있고 그 좌우로 각 관서,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 관서들이죠. 육조가 자리 잡고 있고, 그런 길이고 대로였어요. 아시아 도시들에서는 광장을 조성하지 않고요. 원칙적으로는 궁궐 앞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주작대로라고 하는, 당나라대 이래로. 그런 도로를 조성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우리도 그런 걸 따서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향해서 쭉 뻗은 이 길이 국가의 상징가로였던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이뤄지는 행사라고 하는 것이 사실 서울 인구가 한 20만, 조선 중엽에 10만 이 정도에 불과했는데 아시다시피 얼마 전 촛불집회 때 많이 모이면 200만까지 모였지 않습니까. 서울시민이 10만 명이 들어가도 별로 표시가 안 나요. 그래서 여기서 무슨 시위를 한다든가 집회를 한다든가 집단호소를 한다든가, 이런 사례는 없었고요, 조선시대에. 주로 권력의 퍼레이드라고 할까요. 국혼, 왕의 결혼식. 아니면 국상, 왕이나 왕비의 장례식 행렬. 때로는 아주 드물게 군대의 출정식 행렬, 김종서의 육진정벌이라든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라든가, 이런 것 있었을 때. 이런 정도의 국가 주도의 행사가 있었을 뿐이지, 일반 백성이 조선시대에는 여기를 점거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인원으로 점거한 건 아니고 예를 들면 면암 최익현이 개항에 반대해서 도끼를 들고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 궐 앞에 엎드려서 상소를 올리거나, 아니면 동학교도들이 교주 최재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는 교조신원 상소를, 복합상소를 하면서 경복궁 문 앞에 엎드려 있었거나. 이런 정도의 아주 예외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민의표출 장소로 사용된 적은 없었죠. 그리고 해방 이후에 이 길에 세종로란 이름을 붙인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이 박약할 때였고, 46년도라서. 그래서 정치라고 하는 것은 세종과 같은 왕도정치가 제일 좋은 정치다, 이렇게 판단했고. 그때까지 경복궁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가 있었고, 그 당시에는 미군정청 중앙청사가 있던 곳이니까 앞으로도 여기가 정치 중심지가 되겠다. 그래서 정치를 우리 역사상 가장 잘한 군주인 세종의 묘호를 따서 세종로라고 하자, 그렇게 불렀던 거예요. 그래서 내내 세종로 또는 세종대로였죠. 그랬다가 그 밑에 시청에서부터, 또는 지금 이순신 장군 동상 있는 그곳부터 그 일대 전체에 광장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죠.

◇ 김호성: 그렇습니까. 민의 표출이란 말씀 하셨는데요. 그때 신문고가 예전에 그 근처에 있지 않았어요?

◆ 전우용: 그건 경복궁안쪽에 있었죠. 광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나 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좀 상징적이었죠. 그러니까 실제로 광화문 지키는 경비병들을 통과해서 문 안으로 들어가서 신문고를 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겁니다.

◇ 김호성: 그렇다면 지금처럼 예를 들어서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 해서 청와대 쪽으로 행진한다거나 하는 모습들이 조선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겠군요.

◆ 전우용: 그렇죠.

◇ 김호성: 일제강점기 들어오면서 광화문이 갖는 의미, 풍경 이런 것들이 좀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럼?

◆ 전우용: 일단 광화문을 옮겼고, 근정전 앞에를 다 비워놓은 다음에 그리고 광화문 안쪽 자리에 총독부 청사를 1926년에 새로 지었죠. 굉장히 위압적인, 권위적인 모습으로 지었고요. 일제강점기에 3·1운동 때도 그렇고요. 3·1운동 당시엔 총독부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쪽으로 행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생긴 다음에도 행진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고, 그랬던 것이죠. 그러니까 원래 유럽에서 광장은 모든 도시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예요. 도시 중앙부를 다 광장들이 가지고 있죠. 지금 청취자 여러분들도 유럽 도시나 하다못해 남미 도시를 가보면, 유럽 식으로 조성된 남미 도시를 가보면 도시 한복판에 다 광장이 있어요.

◇ 김호성: 글쎄요. 포럼이라고 해서 있잖아요.

◆ 전우용: 로마 시대부터 포럼이라고 해서, 거기에 도시의 공적 시설들이 모여 있고 그것이 집밖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여론을 만들고 공공에 영향을 미치고. 두 가지 기능이 같이 진행돼요, 유럽의 포럼이라고 하는 곳은. 하나는 우리니라의 대궐처럼 권력이 자기를 드러내는 공간, 권력의 자기과시 공간이라고 하는 의미가 하나 있고요. 아주 상황이 안 좋을 때 거기가 혁명의 공간이 되죠. 예컨대 바스티유 광장 그러면 프랑스혁명의 상징가로가 되잖아요. 권력과 권력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 부당한 권력과 정의를 요구하는 민중의 힘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들은 늘 광장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마 이런 유럽 도시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한편에 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 같고요. 또 한편으로는 이곳이 워낙 정치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경무대라고 했었고 거기에 총독관저를 둔 것은 철저히 경호의 의미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경복궁 뒤쪽으로 국가 최고지도자의 관저가 들어서 있는 그런 구도가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 광화문 앞을 점거했던, 한국에서 민중 또는 시위, 정치적 요구를 든 이른바 힘없는 사람들이 광화문광장을 점거했던 첫 번째는 4·19 때였어요. 4·19 때 학생들이 경무대로 가자, 이 박사에게 우리 요구를 전하자. 그 당시만 해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워낙 나이가 들어서 인의 장막 속에 갇혀서 국민의 여론을 못 듣는다, 이런 게 있었으니까 직접 가서 이야기를 전하자. 이러면서 예전 부민관, 서울시의회 별관 앞에 모여서 북쪽으로 행진해서 광화문광장을 점거하고, 그리고 경복궁 지나서 경무대 쪽으로 가려다가 총격을 받아서 사망했던 사건이 있었죠.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이후로 광화문광장은 그래도 쉽게 말하면 늘 국군의날 행사라든가 아니면 무슨 외국 국빈 환영 퍼레이드라든가, 이런 거나 있었지, 시민이 점거를 못했었는데 그다음에 여기가 시민들이 점거하기 시작한 것이 87년 6월항쟁 아주 일부, 시청광장을 점거했을 때 그때 행진로로 지금 광화문광장을 일부 점거한 적이 있었고요. 그랬죠.

◇ 김호성: 그런데 참 아이러니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의도광장도 예전에 보면 5·16광장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권력의 과시를 위한 그런 수단으로써의 광장이, 민의가 집결되는 공간으로 바뀐 어떤 역사적인 배경들이 있는 것이잖아요.

◆ 전우용: 늘 그랬죠. 사실 그게 권력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이기 때문에 민의를 잘 수용해서 정치하면 그야말로 지지를 받는 것이고요. 민의를 거부하면 자기를 자기가 자랑하려고 만들었던 공간이 오히려 분노한 일반 민중에게 점거되고, 또 그것이 권력을 축출하고 타도하는 그런 과정으로 역전돼버리는 현상들 늘 나타났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광장이 가진 숙명일 것 같아요. 기본은 권력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공간이지만, 민주주의 시대에는 권력의 주체가 국민이니까. 그러니까 민의가 늘 표출되는 공간이다, 이렇게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김호성: 민의가 표출되는 공간으로서 지금 광화문광장 말씀하시고 있습니다만, 정치적인 극단의 목소리가 충돌하는 현장이 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들을 위한 광장이냐, 라는 이런 우려가 있는 것 아겠습니까?

◆ 전우용: 현대 사회에서는 민의가 자연스러운 토론과 대화, 이런 것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여론이 형성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것은 사실 광장을 점거한다는 행위는 아무것도 호소할 수 없는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이 호소하기 위해서, 홍보하기 위해서 알리기 위해서 광장에 나오는 것인데 지금 보면 정당이 점검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좀 정당화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정당은 국회, 국회 소속 의원도 있고요. 다양한 발언의 기회와 공간들이 열려 있는데 무슨 정말 하소연 할 데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나타나서 시민이 함께 이용해야 할 광장을 불법 점거하고 텐트치고 길을 가로막고, 또는 사람들 위협하고. 이건 광장 자체를 사용하는, 광장의 원조인 유럽적 관점에서도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호성: 유럽적 관점 지금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역사에서 광장이 어떤 효율적인 활용 같은 것이 있는 선례가 있었다면 짧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전우용: 지금 유럽 도시 다 마찬가지죠. 트라팔가 광장이든 아니면 바스티유 광장이든 , 미국의 워싱턴 앞 광장이든 간에, 평상시에는 무슨 버스킹을 하든가 사람들이 모여서 담소를 하든가 앉아서 쉬든가 걷다가 커피를 마시든가,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다 가능하거든요. 그렇게 이뤄졌다가 일단 어떤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컨대 시위를 할 수도 있고요. 아니면 그야말로 국가적 퍼레이드를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행사들을 다 용인하는 것이, 일상과 비일상을 다 용인하는 것이 광장의 기본적인 기능이거든요. 어떤 하나의 요소가 광장을 압도적으로 점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오히려 공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의 성격을 훼손하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를 하죠.

◇ 김호성: 알겠습니다. 공간 공간으로서의 광장의 역할, 저희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김호성: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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