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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과 윤치호는 누구인가, <세시봉>"-문사철 강응천 대표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4-06-17 09:55  | 조회 : 3854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세대와 시대의 봉우리를 넘어(세시봉) : 강응천 문사철 대표



앵커:
세대와 시대를 넘어서 <세시봉>, 역사는 흔히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는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죠.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답해야 하는 것이 역사이자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도 문사철의 강응천 대표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강응천 문사철 대표(이하 강응천):
네, 안녕하세요.

앵커:
지난 한주, 오늘, 앞으로도 ‘세대와 시대를 넘어’ 라는 카피가 딱 맞는 시간이 계속되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데 오늘 이 문제 한번 다뤄보죠. 먼저 역사학을 하시는 분으로서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문제, 어떻게 보셨습니까?

강응천:
이건 제가 아니라도 지금 한국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입을 모아서 입장을 표명했어요.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중세사학회, 한국조선사학회 등등 단체들이 다 진보적인 역사단체가 아니에요. 진보와 보수가 섞여있는데, 어떻게 보면 문창극 지명자가 그러한 발언을 함으로써 역사학계가 뜻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게 아닌가,

앵커:
진보와 보수를 넘는 거죠? 화합적 의미가 있네요.

강응천:
오히려 이 분이 등장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의 공감대가 뭐냐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은데요. 16일 오전에 입장을 내서 안 그래도 세월호 참사로 온나라가 비탄에 빠져있는데 문창극 총리 후보의 발언이 충격이었다. 역사와 민족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내용으로 21세기 대한민국 총리 후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면서 일본 총리 지명하는 거냐는 비아냥거린 소리도 나왔는데, 아무튼 계기가 돼서 우리 역사의 마지노선 이랄까 이런 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앵커:
그렇다면 문제가 됐던 발언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죠. 조선사람들 게으르다, 이런 얘긴데. 물론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 처음에는 총리실 이석우 공보실장을 통해서 이런 얘기했죠. 윤치호의 발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일기를 인용했다, 이렇게 얘길 했고. 또 지난번 기자회견에서는 1894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인 비숍 여사의 기행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나온 얘기라고 해명이 바뀌었어요? 바뀌어도 좋습니다. 어쨌든 하나씩 알아보죠. 일단은 강 대표님, 1시간 5분짜리 동영상 보셨어요?

강응천:
저는 보다가.. 다 보진 못했는데,

앵커:
저는 다 봤는데, 우선 첫째는 윤치호의 일기에 대해서 굉장히 자주 언급이 나옵니다. 그건 사실인데. 윤치호라는 인물이 누굽니까? 그것부터 말씀해주시죠?

강응천:
이분은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인데, 개화파 인사가 다 그렇게 된 건 아닙니다만 이분은 영역이 섞인 인생을 사셨어요. 그래서 결국 일제 때, 이를테면 민족 독립운동, 개화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이런 게 잘 안되고 우리민족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그래서 독립이 잘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된 사람들이 결국 나중에는 민족개조론, 우리 민족은 아직 독립의 준비가 안 돼있어, 자치도 아직 멀었어 라고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면서 소극적으로 되고, 일제 침략을 묵인하는 양태로 가다가 나중에 1945년, 해방을 얼마 놔두지 않고 일본 ‘귀족원’ 이라고 있어요. 지금의 상·하 양원제로 했을 때 상원에 해당하는 귀족원에 조선이나 대만 식민지 사람들도 배당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분도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이 돼서 일본 의회의 의원이 된 거죠. 그러니까 결국 이분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많은 지식인들 처럼 친일의 길을 걸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도 예전에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진 않았지만 독립협회 활동도 했고 독립신문 사장도 했고, 하여튼 그러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사실 왜 나중에 그렇게 친일로 갔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역사에 뜻이 있었던 분들이 왜 이렇게 갔어야 했나.. 사실 윤치호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고 할 때는 그런 분이 왜 친일파로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는가에 대한 오히려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그런 분의 말을 앞뒤 맥락없이 인용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앵커:
그리고 비숍 여사 책이 윤치호의 일기만큼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 사람 정도의 선교사 얘기가 나오는데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게 비숍 여사의 얘기거든요? 그 강연의 첫 번째 부분에 나오는데 비숍 여사의 책이 세 권정도 나와있다고 하더라고요?

강응천:
우리나라에 번역된 말로도 나와 있습니다. 당시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기행문 같은 것들이 많이 소개 돼있는데 사실 윤치호도 그렇고, 비숍도 그렇고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인물은 아니에요. 독서량이 많으신 분이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비숍 여사는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였었죠?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영국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가장 존경하는 여성 이었다고 해요.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작가 이면서 지리학자로 전세계의 풍물을 전해주던 분이었는데 이분의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 한국인이 게으르다는 말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그건 맥락을 봐야하는데 한국에 왔더니 처음에는 사람들이 지저분하고 영 인상이 안 좋았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1년, 2년이 지나고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똑똑하고 친절하고 비전이, 미래가 있는 민족 같다고 해서 한국에 대단히 호감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분이 게으르다고 했을 때의 원인도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사대부 지배층과 거기에 피를 빨리고 착취당하는 민중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러다보니 미래가 없고 자기가 열심히 해봐야 남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거니까 나태한 생각에 미래가 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땅에 조선사람들이 나와서 살고 있었는데 여기서 신분차별이 없는 곳에 와있는 한국사람들 보면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성취감도 높고 하는 걸 봤다. 그래서 결국은 당시 한국사람들이 비탄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일부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그들에게 미래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 라는 식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한국인이 게으르다는 맥락도 그러한 쪽에서 봐야하고, 아마 비숍 여사가 지금 한국에서 봤다면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한국인들이 확실하게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다고 봤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러한 맥락을 살펴야지,

앵커:
물론 거기에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비숍 여사 책 얘길 하면서, 양평에 갔더니 이방이 800여명이 있다. 비숍 여사 책에는 양평에 700호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나온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쨌든 지금 강 대표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사실 고혈을 빨아먹고 이게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게 아니거든요? 봉건제를 경험했던 유럽에서도 보편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얘기 아니에요 사실은? 그리고 비숍 여사가 있었던 영국 자체도 사실은 그런 일이 발생했었고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게 된 동기도 뭐냐면 바로 그 고혈을 빨아먹고 다 내쫓고, 그래서 일반 농민들이 유랑하면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게 됐던 배경에서 나온 얘기거든요?

강응천:
그렇죠. 그건 당시 어느 나라도 거기서 자유로울 순 없었겠죠. 그러니까 비숍 여사는 그러한 국면에서도 당시 영국은 그래도 시민계급들이 나름대로 상승하던 시기 아닙니까? 그런 시각으로 좀 낮춰봤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 이었는데, 기왕 인용을 할 거면 그런 거 까지 다 인용을 해서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그리고 선교사의 관점에서 비숍 여사가 이러한 책을 쓴 게 아니겠어요?

강응천:
그렇죠. 당연히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앵커:
제가 강연에서 한 가지 기억 남는 게 뭐냐면 동네에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는데 거기는 그렇게 깨끗하더라고 하는 내용이 비숍 여사의 책을 언급하면서 나오거든요?

강응천:
그건 비숍 여사뿐만 아니라 윤치호의 일기에도, 세상의 중국은 너무 더럽고, 미국은 인종차별이 있고,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이 그야말로 낙원이다 아시아의 정원이라는 말을 하면서 당시 일본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국적을 막론하고 나름대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최고라는 인식이 상층 지식인들에겐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앵커:
문창극 후보자 본인 같은 경우에는 5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이북사람 이거든요? 문창극 후보자 강연하는 걸 보는데 이분이 충청도 사투리가 아니에요, 이분 말투가. 그래서 보니까 이분도 이북에서.. 전통적인 충청도 분이 아니시더라고요. 이북에 계신 분들이 아무래도 기독교를 많이 믿으시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아마 5대째인 것 같은데, 선교사를 통해서 믿게 됐다는 얘긴데, 이러한 배경이 역사관에 영향을 줬다고 보십니까?

강응천:
그럴 수밖에 없죠. 당시 기독교라는 것은 한국 전통사회에 있었던 유교라는 지배 개념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들어오지 않았겠습니까? 들어와서 당연히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당시로서는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었는데 18세기까지는 괜찮았지만 19세기 이후로 가면서 조선사회가 몰락해 가는데 유교라는 게 책임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양반들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학문이었으니까 거기서 차별을 받던 서북사람들 사이에 기독교가 많이 퍼져나간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당시의 19세기 상황을 일반화 시켜서 조선시대 500년을 우리가 다 허송세월 했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는 거고. 유교가 지배해오던 조선왕조를 무너뜨려야 우리가 좀 더 평등한 사회에서 산다는 사고방식이 생겨났겠죠. 그래서 그것을 절대화하고 신념화 했을 텐데, 그러다보니 이번에도 보니까 성균관에서도 성명을 냈죠? 성균관에서도 조선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니었고 유림들이 상당히 공평한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고 하면서 어떻게 보면 종교랄까, 사상의 전쟁이 벌어질 조짐도 보이는데 그러한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예전에 차별받던 서북지방에서 기독교에 입문했다면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게 당시로서는 당연한데 지금은 21세기까지 그러한 사고방식을 끌어와야 하느냐, 반성적으로 되돌아 봐야 하는데 그건 좀 안된 것 같아요.

앵커:
어쨌든 문창극 후보자가 인용을 했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 강연 보면 게으르다는 표현을 인용이 아니라 수차례 얘길 합니다.

강응천:
인용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 하는 거죠.

앵커:
인용 없이도 수차례 얘길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많은 분들이 그 동영상을 보고 스스로 좀 판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 부분인데. 그리고 ‘이조’, 이씨 조선이라는 단어죠? ‘민비’ 이러한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그러면서 말을 끊었다가, ‘요새는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하죠?’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표현도 사실 문제가 있다는 얘길 하는데,

강응천:
역사학회에서는 진작 폐기가 됐거나 수정된 용어라고 보겠죠? 이조는 일본사람들이 하던 말이에요. 아무래도 조선 왕조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조선 왕조가 조선인들, 한국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했을 때 조선 왕조는 조선이라는 전체의 나라가 아니라 이씨들만이 세습해가면서 자기들끼리 잘먹고 잘살았다는 뉘앙스가 있는 거죠.

앵커:
모든 왕조가 특정 성씨가 해먹는 거 아니에요? 다 그런 거죠.

강응천:
과거의 세속 왕조라는 것은 다 그렇죠. 심지어는 유럽에서는 결혼 한번만 하면 결혼한 걸로 해서 나라를 상속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에 비하면 왕의 조건을 굉장히 까다롭게 따졌던, 공적인 입장에서 왕이 되는 조건을 굉장히 까다롭게 따졌던 건 조선이나 중국 같은 곳이 다른 왕조들보다는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이조라는 것은 이씨들의 나라가 아니냐고 단순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역사관이 배어있고, 조심해서 말해야할 문제라고 봐요. 그야말로 아주 낡은, 식민지 시대의..

앵커:
그럼 고려시대는 왕고시대입니까? 왕건이 고려시대 만들었으니까?

강응천:
이조니까 왕고라고 해야겠네요. 그리고 민비 말씀하셨는데, 사실 정확하게 우리가 얘길 하려면 이분들이 다 돌아가신 분들이니까 시호를 가지고 얘길 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종대왕 얘길 하지만 세종이 시호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묘호죠. 죽은 다음에 받은 호칭으로 역사적 인물들은 거론을 하게 되는 거죠. 이름이 이도였다고 해서 우리가 세종대왕을 이도라고 하진 않잖습니까? 한때는 민씨 왕비 이니까 민비라고 줄여서 부른 시절도 있었겠죠. 그렇지만 나중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이 황제가 되고 이미 예전에 죽었지만 그분을 추승해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린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적으로 호칭할 땐 명성황후라고 하는 게 옳고. 자칫하면 민비라고 할 때, 이것도 역시 일본사람들이 민비를 살해하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어떤 사람들은 시해라고 해야 한다는데 시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였을 때가 시해이니까, 일본은 외부의 강도가 들어와서 한 거니까 살해 아니냐는 얘기도 있어요. 어쨌든 일본인들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대한민국의 국모를 깎아내리는 표현으로 민비라고 했으니까 그러한 표현도 삼가야 하는데. 그것은 조선왕조를 낮춰보고 조선왕조가 우리민족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보는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사람들이 쓰는 용어를 쓰게 된 것 같아요.

앵커:
강 대표님. 그런데 몰라서 그러는데, 문창극씨 강연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고종과 민비가 미신에 찌들어있었다. 미신에 팔려서 궁궐 근처에도 점쟁이들이 많고, 그런 얘기가 나오고. 실제로 미신에 그렇게.. 점 보고 그랬나요?

강응천:
왕실에서 유교 이외의 것들은 다 사이비 신앙이라고 하고 억압을 했지만 왕실에서 개인적인 신앙이나 미신이라고 하는 것은..

앵커:
‘솥을 묶고 있었다’ 라는 표현도 나오고,

강응천:
과거 17~18세기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례들이 다 나옵니다. 거기에 빠져있었다고 일반화 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는 거죠.

앵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이, 문 후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위안부 문제는 반인륜적인 역사적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자신이 반민족적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는데. 사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는 부분이 실제로 동영상을 보면 많거든요. 어떻게 보세요?

강응천:
그러니까 왜 자꾸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느냐, 뉴라이트 역사관과의 유사성도 얘길 하는데 저는 그런 것들이 사실 1990년대 이후에 생각이 바뀌신 분들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뿌리가 굉장히 깊은 것 같아요. 우리민족의 남다른, 지정학적으로도 미국이나 일본 같은 강대국들하고 잘 지내면서 그들이 이끌어줘야 우리 같은 민족이 잘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이런 분들은 일본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하지 않습니까? 위안부 문제 같은 경우에서, 우리가 지금 못살면 모르겠는데 우리지금 잘먹고 잘살지 않느냐, 그런데 굳이 왜 옛날 거 자꾸 따져서 뭐하냐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지점에서도 역사교육이 필요하고 우리가 지금 조금 잘살게 됐으니까 우리에게 나쁜짓을 한 사람들의 아무런 사과도 없거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자신 있으니까 놔두고 가자, 사실 국제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일본과 대등하거나 추월하거나 이런 건 아직도 먼 이야기 이니까요. 이건 굉장히 경계해야할 필요가 있는 생각입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5188님 ‘저는 이번사태가 우리나라가 역사 정리 작업이 잘 안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현대사를 잘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오늘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강응천:
네. 감사합니다.

앵커:
지금까지 문사철의 강응천 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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