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3년 10월 1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이춘수 목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추석연휴 벌초 다녀오셨습니까? 한국의 장례문화, 혼돈의 시대"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쇼핑몰 회사를 다니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목회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후에 여러 가지 생각의 변화를 겪고 지금은 장례지도사 겸 목사로 활동하고 계신 분입니다. 오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의 주인공인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님과 함께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춘수 목사님 안녕하세요.
◆ 이춘수 목사(이하 이춘수)>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 이성규>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춘수> 예 반갑습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성규> 일단 뭐 제가 직함을 말씀을 드렸지만 자기소개 좀 한번 해 주시겠어요?
◆ 이춘수> 저는 장례지도사로서 오롯이 상조라는 후불제 상조 운영하면서 또 동시에 목사로서는 탐험하는 교회라는 교회를 세우고 돌보고 있는 이춘수라고 합니다.
◇ 이성규> 탐험하는 교회...
◆ 이춘수> 네. 탐험하는 교회.
◇ 이성규> 아. 탐험하는 교회. 근데 아까 제가 잠깐 소개드렸습니다마는 쇼핑몰 회사를 다니다가 신학대학원에 가시고 지금은 이제 장례지도사를 하고 계세요. 이게 어떤 계기로 이렇게 직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진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바꾸시게 됐습니까?
◆ 이춘수> 제가 이런 삶을 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회사 다니다가 30대 후반에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심근경색을 앓게 되는 날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그 시점에 제가 가까이 지내던 중학생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두 가지 일을 겪으면서 아주 짧은 기간 내에 겪으면서 제 삶을 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고요. 직장생활도 참 귀하고 의미 있지만 이 죽음 앞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돌아보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목회와 장례지도사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네 장례지도사. 어떻게 장례지도사가 되셨어요?
◆ 이춘수> 장래 지도사라는 말이 아주 오래된 말은 아니고요. 예전에는 장의사라고 했던 그 직업이에요. 요컨대 사람들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수습하고 장례 절차 전반을 진행하고 하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제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다 했는데 그 죽음이 두렵거나 절망적이거나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한편으론 그 안에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어떤 혹은 희망 같은 것들도 봤거든요. 죽음 가운데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런 죽음을 좀 알리고 싶다. 그러려면 무슨 길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의사가 될 수는 없어서 장례 지도사가 되어서 이제 가까이에서 죽음을 계속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죽음을 나누는 장례를 통해서 나누는 그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그럼 장례지도사가 되려면 무슨 과정 밟아야 될 과정이 있나요?
◆ 이춘수> 네 공식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4년제 대학에서 이미 학과로 오래전부터 운영하고 있어서 학부에서 전공을 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도 있고요. 꼭 그 과정이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 위탁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교육과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외부 위탁기관에서 350시간 정도의 교육 시간을 이수하면
◇ 이성규> 실습 350시간
◆ 이춘수> 이수하면 자격증 자체는 취득할 수가 있긴 합니다.
◇ 이성규> 국가자격증인가요? 아니면 협회 자격증인가요?
◆ 이춘수> 국가자격증으로 돼 있습니다.
◇ 이성규> 네 30대 때?
◆ 이춘수> 네 30대 후반
◇ 이성규> 후반에 그렇게 좀 아프셨다고 그러는데 거의 죽음 가까이 갔다 오신 사연인가요?
◆ 이춘수> 감히 제가 죽었다 살아났다 이런 표현은 쓰기 어렵고요. 죽음을 살짝 맛봤다 정도 그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까 제가 이건 나중에 진단받은 거지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한 병인지 몰랐어요. 그냥 굉장히 피곤한 상황에 있었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상태여서 그냥 단순히 좀 피곤한 줄 알았는데 빨리 쉬어야겠다 싶어서 침대에 누웠다가 몸이 예사롭지 않은 걸 직감적으로 느꼈고 죽음이 나에게 다가왔구나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사실은 처음에는 종교인이기도 하고 신앙인이어서 기도를 했지만 기도 가운데 이 기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살려달라는 것도 무의미하다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인다는 게 곧 죽음을 받아들인 거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그 과정에서 슬픔만은 아니고 힘들고 괴롭지만 그 안에서 어떤 희망 같은 걸 또 평안 같은 걸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 이성규> 평안을. 회사를 그만둔 이유예요 다니실 때?
◆ 이춘수> 아니죠. 한참 열심히 다닐 때였죠. 가장 바쁘게 활동하고 할 때였는데 갑자기 그랬던 겁니다.
◇ 이성규> 죽음 이후에 이제 장례 절차나 문화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장례 문화를 보면 어떤 특징이 좀 있나요?
◆ 이춘수> 제가 죽음과 장례에 관심을 갖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하나 좀 생각하게 된 게 있는데 짧게 말씀드린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에 전후 이후에 복구하는 산업화 그리고 상업화를 아주 짧은 시간에 겪으면서 사실상 우리가 전통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례 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그래서 원형으로서의 전통은 우리가 계속 찾아야겠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거는 형식적 의미에서 유교적 장래 틀 위에 종교별로 조금씩 변형된. 그러니까 틀은 유교식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재단의 꾸밈이나 절차상의 예배를 드릴지 제사를 드릴지 연도를 할지 이런 형식이 종교별로 바뀐 그걸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컨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종교 의례로서의 장례는 실질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기보다는 형식에 많이 치우친 건 아닌가 그래서 그걸 가지고 좀 보다 보면 현장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좀 있습니다.
◇ 이성규> 너무 또 유족들은 그 부분에 집착을
◆ 이춘수> 중요하게 여기죠.
◇ 이성규> 많이 하시는 편이죠
◆ 이춘수> 얘기를 해 주셔서 말씀드리자면 비일비재하게 있는 일이어서 안타깝기도 한데요.
형식에 치우치기 시작하면 가족 간의 화합이나 좀 화해의 자리가 돼야 될 장례식장이 원치 않게 의도치 않게 이렇게 다툼의 자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형식에 매몰돼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현장에서 장례지도사이면서 동시에 종교인으로서 좀 지향하는 장례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 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실질적으로 추동하는 장래 화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장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제 역할과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네.
◆ 이춘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유교 장례는 사실상 3년상이잖아요. 3년상인데 지금은 70년대 가정의료 준칙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3일장으로 다 축소돼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3일장으로 축소되는 과정 중에 안치, 입관, 발인하고 화장 또는 매장 이런 절차마다 제사를 다 드렸는데 그 자리에 이제 제사드릴 자리에 예배를 드리고 제사 자리에 연두 기도를 하거나 이런 식으로 바뀐 거죠. 그 프레임 자체는 유교 의식인데 행위로서의 종교 의식이 들어와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해 주실 수 있습니다.
◇ 이성규> 네 그런데 이제 앞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라고 살짝 말씀을 하셨는데 좀 정리해서 우리 장래 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 이춘수> 계속 말씀드리지만 장례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추모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갈 수 있는 의례고 현장이거든요. 그래서 삶이 드러나야 해요. 죽음만이 아니라 근데 지금 우리가 어느 장례식장에라도 가면 다 똑같잖아요. 같은 빈소. 물론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형태는 다 비슷한 거죠. 절차도 똑같고요.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드러나질 않아요 잘. 죽음만을 위한 공간이다 보니 조문객이 추모하러 조문하러 간다고 문상을 가더라도 특별히 고인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인사하고 접객실에 가서 이제 밥 먹고 돌아오고 하는 정도로 하고 있는데 그게 좀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좀 바라고 앞으로 좀 만들어가고 변화했으면 하는 장르는 고인의 삶을 다양하게 드러내는 그게 사진일 수도 있고 영상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장소를 바꿀 수도 있어요. 꼭 장례식장에서만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실제로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집에서도 했었습니다. 그게 지금도 가능하고요. 불가능한 게 아니거든요. 물론 현실적 어려움들이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그건 우리가 장르에 대한 의미나 다양한 장르를 통해서 경험하려고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당하고 만들어가야 될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이성규>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춘수 목사님 우리가 이쯤에서 노래를 하나 듣고 가거든요. 그 어떤 노래 하나 소개하시겠어요?
◆ 이춘수> 아무래도 제가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또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좋아하게 된 즐겨듣는 노래가 있는데요. 최백호 선생님의 바다 끝이라는 노래입니다.
◇ 이성규> 이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노래죠?
◆ 이춘수> 가사 전체적으로 많은 감동을 주는 부분들인데요. 특히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노을이 나오거든요. 노을, 바닥끝 노을이 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제가 연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쯤 되면 간혹 노을이 지는 걸 한강 다리 위에서 만날 때가 있어요. 근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거든요. 아름다운 이유가 나도 언젠가는 좀 전에 입관실에서 만났던 사람처럼 죽을 수 있구나. 근데 그 죽음이 예전에는 슬프고 절망이었을 수 있는데 지금은 죽을 수 있다라는 사실 덕분에 너무 감사하고 이 삶이 한편으로는 더 의미 있고 풍성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노을을 참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바다 끝에 나오는 노을이 그런 장면을 그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노후를 바라보는 아름다움 때문에 좋아하게 됐습니다.
◇ 이성규> 이춘수 목사님이 소개한 최백호의 바다 끝 듣고 오겠습니다.
◇ 이성규> 네. 최백호의 바다끝 듣고 오셨습니다. 이성규의 행복한 신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입니다. 이 목사님 저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우리나라 매장을 하는 경우, 또 화장을 하는 경우, 이제 또 요즘 수목장 등등이 있는데 이 비율이 좀 어떻게 돼요?
◆ 이춘수> 조선시대 유교 전통 안에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요. 사실 그전에 고려시대 또 불교 문화권에서 또 화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 바뀌긴 했는데 현대 오늘날에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 관리 이런 차원에서도 그리고 또 가족들이 많이 핵가족화됐잖아요. 그래서 조상들의 묘를 그렇게 관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화장이 거의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지금 90% 이상이고요. 화장 이후에 유골을 안치하는 방식이 이제 다양하게 수목장, 해양장, 자연장이라고 하는 그런 카테고리 안에서 또 여러 가지가 있는 상황이죠.
◇ 이성규> 네. 빈소 없이 장례를 진행하는 무빈소 장례 이건 어떤 거죠?
◆ 이춘수> 보통 3일장으로 한다고 하면 첫째 날 빈소를 꾸미고 설치해서 발인 이후에 정리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때 이게 좀 많이 확산되기도 했어요. 유가족들만 모이기도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또 어떤 고인의 경우에는 사회적 관계가 없는 분들이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중증장애인들이나 이런 분들은 사회적 맥락이 관계가 없다 보니까 특별히 빈소를 조문객이 없어서 빈소를 차리지 않고 안치 냉장실에 모셔놨다가 둘째 날에 입관하고 바로 발인을 하는 그런 형태의 장래가 코로나 때 본격적으로 좀 생긴 것 같습니다.
◇ 이성규> 무빈소 빈소가 없고 빈소를 차릴 수 없는 코로나 시국이라든가 이런 경우에도 이 무빈소 장례가 있고 사회적인 맥락이 없는 분들.
◆ 이춘수> 경제적 어려움도 있고요.
◇ 이성규> 예를 들면 그리고 자식이 없거나 그런 분들도 사회적 맥락이 없는 경우로 봐야 되나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 이춘수> 그렇죠. 이게 장례라는 게 돌아가신 분은 어떤 역할을 할 수가 없잖아요. 돌아가셨으니까. 남은 자들이 의뢰를 진행을 해야 되는데 얘기하신 것처럼 자녀가 없거나 혹은 또 사실은 주변에 계신 데 이제 없는 분들이 잘 모르는 분이 탈북하신 분들 이 땅에 우리 한국에 돌아오셔서 생활 새로 정착하신 분들은 지인들은 있는데 혈연관계는 없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물론 법이 좀 많이 개정이 돼서 개선의 여지는 있으나 사실은 혈연이 아니고서는 장례를 치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이런 분들이 본의 아니게 무빈소 혹은 공영장례라고 하는 그런 장례로 치러지는 경우들이 좀 있긴 있습니다.
◇ 이성규> 무연고일 경우에 정부에서 그런 부분들을 좀 해주는 시스템이 있는 것 같은데요
◆ 이춘수> 예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살다가 죽었는데 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조금 표현이 그렇긴 합니다만 보건 위생적 관점에서 시신을 방치할 수 없어서 그냥 처리하는 수준에서 화장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직화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바로 화장하는 거예요. 어떤 추모 의뢰 없이 장례 의뢰 없이. 그런데 그거는 예산을 들여서 하긴 하는데 지금은 그래도 좀 변화들이 있는 게 서울시만 해도 ‘나눔과 나눔’이라는 사단법인이 거기에 참 열의를 갖고 그런 절차들을 서울시하고 많이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오는 길에도 잠깐 스쳐 지나왔는데 벽지에 있는 시립 승화원에 가면 2층에 그리다 빈소라는 게 있거든요. 거기서 매일 두 분에서 많게는 네분. 굉장히 많은 숫자예요.
그런 분들을 작게라도 빈소를 차리고 공적 추모 공영 장례를 진행하는 경우들도 지금 만들어져 있습니다.
◇ 이성규> 여러 장례의식에 참여를 하셨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장례식이 있으신가요?
◆ 이춘수> 사실은 남는다기보다는 기억에, 기억은 하기 나름이어서요. 모든 장래가 기억하기 나름으로 다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는 장례 끝나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 기억하면서 또 제 나름대로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다 글을 써놓거든요. 그래서 그게 다 기억에 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 하나 말씀드리면 중증 장애인들 애 장래를 모시는 경우들이 왕왕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중증 복합장애인은 우리가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장애인들이 아니에요.
문 밖에서 만나는 장애인은 출입이 가능한 상태잖아요. 근데 사실은 평생을 문밖을 나서지 못하는 복합 중증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든요. 그런 분들도 살다가 길지 않은 생을 살다가 돌아가시면 비로소 집을 나와서 이제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겁니다. 제가 그런 분들 몇 분을 모시면서 참 많이 사실은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어떻게 이런 분들이 살고 있나 우리 주변에 사람의 형태로 이렇게 있을 수 있나 싶은 처음에 그런 마음을 가졌는데요. 그런 분들 몇 분 모시면서 눈에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 한 사람 자체로서 참 귀하고 의미 있다라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다고 여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죽음 앞에서 한 사람은 평등하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우리가 찾아내는 게 발견하는 게 장례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들 이렇게 만날 때마다 사실 한편으로는 귀하고 의미 있고 기억에 특별히 남게 되는 그런 것 같습니다.
◇ 이성규> 기억도 기억이지만 좀 이 장례식은 유족과의 관련이 됐든 아니든 되게 특이하다.
그런 장례식도 있었나요?
◆ 이춘수> 장례가 이별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만남의 자리가 되기도 해요. 한 사람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걸 계기로 평소에 안 보던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만나거든요. 그런데 갈등관계에 있는 가족들이 사실 많습니다. 들여다보면 없는 가족들이 없어요. 사실. 그래서 입관식을 할 때 보면 와서 고인과 갈등 관계 때문에 평소에 안 만나다가 이제 비로소 죽고 난 이후에 만나는 거죠. 그래서 근데 좀 재밌는 게 재밌다기보다는 감동 혹은 좀 안타까운 것도 있는데요. 가해자가 돌아가셨을 때와 피해자가 돌아가셨을 때 양상이 달라요. 가해자가 돌아가셨으면 피해자가 조문을 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와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합니다.
이제 생전에 우리가 그런 관계였지만 이제 다 지났으니 나는 용서하니 편하게 가시게나 뭐 이렇게 얘기를 하시기도 하고 그게 사실 용서할 마음이 없으면 오지도 않거든요.
◇ 이성규> 그렇죠
◆ 이춘수> 그런데 역으로 피해자가 돌아가신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가해자가 와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근데 안타까운 경우에는 전자는 용서가 가능한데 후자는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 이성규> 피해자가 그렇죠
◆ 이춘수> 누워 계시니까 피해자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잖아요. 근데 가해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용서를 구하러 온단 말이에요. 와서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내가 생전에 참 미안하네, 이제 다 잊어주게나, 다 잊고 좋은 곳 가시게나. 이렇게 용서를 구하면서 울부짖거든요. 어떤 경우에는 근데 보면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게 이렇게 느껴져요.
그래서 그게 참 안타깝고 보기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전에 살아생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 자리들을 계속 생각하고 만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좀 자주 하게 됩니다.
◇ 이성규> 근데 이 일이 지금 말씀을 쭉 얘기하다 보면 여러 가지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떤 경우는 또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 이춘수> 네 어려울 때가 있는데요. 제가 언제 어려운지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역설적인데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무뎌질 때 일이 어려운 것 같아요.
◇ 이성규>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죽음에?
◆ 이춘수> 무감각해지거나 무뎌질 때. 근데 제가 이 장례제사라는 일을 하게 된 이유와 계기가 죽음하고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 이성규> 네
◆ 이춘수> 죽음을 항상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생각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죽음에 무뎌지기 시작하면 이 일의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는 거거든요. 근데 저도 사람인지라 하다 보면 그럴 때가 문득문득 옵니다. 익숙해지는 거죠.
◇ 이성규> 그냥 하던 대로 그냥
◆ 이춘수> 네
◇ 이성규> 그냥 생각 없이 한다.
◆ 이춘수> 실제로 장례지도사 선배들이 제가 뭐 이렇게 수습하고 교육하던 과정에서 이런 얘기들 많이 주셨어요. 처음에만 어렵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금방 적응한다. 많이 들었는데 그 말씀이 틀린 건 아닌데 한편으론 저로서는 경계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이 죽음에 대해서 무뎌지고 무감각해질 때 일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거고 그러면 그냥 돈 버는 일밖에 안 되는 거죠. 물론 돈 버는 일도 참 귀하지만 중요하지만 돈만 버는 건 목적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사는 게 그래서 죽음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질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 이성규> 다시 한 번 죽음이 뭔지 좀 정리를 한번 해볼까요?
◆ 이춘수> 저는 죽음이 한 번 죽음을 살짝 맛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데 아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죽음은 사실은 의학적인 개념만은 아니구나 우리가 죽음하면 의학적 죽음만 생각을 해요. 그 먼 미래 시점에 통제 불가능한 어떤 시점에 갑자기 닥치는 호흡이 끊기고 뇌가 죽는 이 죽음만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 죽음은 의학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사실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자기 역할이 없거든요. 죽음에 대해서 그냥 기다리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좀 나누고 싶은 죽음은 의학적 죽음만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죽음 내 삶의 어떤 어려움들이나 관계 단절이나 여러 가지 죽음의 맥락들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되살려서 살아가는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컨대 죽음은 온전한 삶을 향한 관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이성규> 네 근데 이제 여러분들의 장례식에 이렇게 참여하시면서 나의 장례식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나요?
◆ 이춘수> 생각도 해보지만 사실 문득문득 이렇게 질문받을 때도 있거든요. 근데 그게 제일 어려워요. 사실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장례 자체는 제가 제 장례를 할 수가 없잖아요. 남은 분들의 몫인데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유서를 하나 써놓은 게 있고요. 유서의 내용이 다른 게 아니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대했던 죽음의 순간이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이제 자유롭다. 생전에 맛봤던 자유만으로도 참 좋았는데 이제 온전한 자유가 나에게 주어졌으니 슬프지만 이 자유를 우리가 함께 나누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 죽을 거 아니에요? 다시 만날 그날을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갖고 기대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의 유서 있는데 그거 한번 읽어주길 바라고요. 아까 최백호 님의 바다 끝이란 음악도 같이 들었는데 유해를 만약에 한다면 수목장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바다 좋아하거든요. 수영도 좋아하고 물을 그래서 바다의 해양장으로 이렇게 해주면 어떨까라는 기대도 갖고 있습니다.
◇ 이성규>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마무리 말씀해 주시죠.
◆ 이춘수> 장례지도사로 활동한다라는 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좀 이렇게 신기하게 보이기도 하고 특별한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삶의 한 부분으로서 죽음 너무 자연스럽고요 그걸 같이 이렇게 매듭하고 마무리 짓는 역할을 한다는 게 저에게 또 감사하게 여기고 있거든요. 그래서 죽음을 이 장례를 통해서 두렵지만 슬프지만 그 안에서 소망 어떤 희망,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장례 문화를 함께 한번 이렇게 만들어가보고 싶은 게 제 소망이기도 합니다.
◇ 이성규> 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와 함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춘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3년 10월 1일 (일요일)
■ 진행 : 이성규 교수
■ 대담 : 이춘수 목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요] "추석연휴 벌초 다녀오셨습니까? 한국의 장례문화, 혼돈의 시대"
◇ 이성규 교수(이하 이성규)> 쇼핑몰 회사를 다니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목회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후에 여러 가지 생각의 변화를 겪고 지금은 장례지도사 겸 목사로 활동하고 계신 분입니다. 오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의 주인공인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님과 함께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춘수 목사님 안녕하세요.
◆ 이춘수 목사(이하 이춘수)>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 이성규>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춘수> 예 반갑습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성규> 일단 뭐 제가 직함을 말씀을 드렸지만 자기소개 좀 한번 해 주시겠어요?
◆ 이춘수> 저는 장례지도사로서 오롯이 상조라는 후불제 상조 운영하면서 또 동시에 목사로서는 탐험하는 교회라는 교회를 세우고 돌보고 있는 이춘수라고 합니다.
◇ 이성규> 탐험하는 교회...
◆ 이춘수> 네. 탐험하는 교회.
◇ 이성규> 아. 탐험하는 교회. 근데 아까 제가 잠깐 소개드렸습니다마는 쇼핑몰 회사를 다니다가 신학대학원에 가시고 지금은 이제 장례지도사를 하고 계세요. 이게 어떤 계기로 이렇게 직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진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바꾸시게 됐습니까?
◆ 이춘수> 제가 이런 삶을 살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회사 다니다가 30대 후반에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심근경색을 앓게 되는 날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그 시점에 제가 가까이 지내던 중학생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두 가지 일을 겪으면서 아주 짧은 기간 내에 겪으면서 제 삶을 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고요. 직장생활도 참 귀하고 의미 있지만 이 죽음 앞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돌아보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목회와 장례지도사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네 장례지도사. 어떻게 장례지도사가 되셨어요?
◆ 이춘수> 장래 지도사라는 말이 아주 오래된 말은 아니고요. 예전에는 장의사라고 했던 그 직업이에요. 요컨대 사람들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수습하고 장례 절차 전반을 진행하고 하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제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다 했는데 그 죽음이 두렵거나 절망적이거나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한편으론 그 안에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어떤 혹은 희망 같은 것들도 봤거든요. 죽음 가운데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런 죽음을 좀 알리고 싶다. 그러려면 무슨 길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의사가 될 수는 없어서 장례 지도사가 되어서 이제 가까이에서 죽음을 계속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죽음을 나누는 장례를 통해서 나누는 그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성규> 그럼 장례지도사가 되려면 무슨 과정 밟아야 될 과정이 있나요?
◆ 이춘수> 네 공식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4년제 대학에서 이미 학과로 오래전부터 운영하고 있어서 학부에서 전공을 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도 있고요. 꼭 그 과정이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 위탁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교육과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외부 위탁기관에서 350시간 정도의 교육 시간을 이수하면
◇ 이성규> 실습 350시간
◆ 이춘수> 이수하면 자격증 자체는 취득할 수가 있긴 합니다.
◇ 이성규> 국가자격증인가요? 아니면 협회 자격증인가요?
◆ 이춘수> 국가자격증으로 돼 있습니다.
◇ 이성규> 네 30대 때?
◆ 이춘수> 네 30대 후반
◇ 이성규> 후반에 그렇게 좀 아프셨다고 그러는데 거의 죽음 가까이 갔다 오신 사연인가요?
◆ 이춘수> 감히 제가 죽었다 살아났다 이런 표현은 쓰기 어렵고요. 죽음을 살짝 맛봤다 정도 그렇게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까 제가 이건 나중에 진단받은 거지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한 병인지 몰랐어요. 그냥 굉장히 피곤한 상황에 있었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는 상태여서 그냥 단순히 좀 피곤한 줄 알았는데 빨리 쉬어야겠다 싶어서 침대에 누웠다가 몸이 예사롭지 않은 걸 직감적으로 느꼈고 죽음이 나에게 다가왔구나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사실은 처음에는 종교인이기도 하고 신앙인이어서 기도를 했지만 기도 가운데 이 기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살려달라는 것도 무의미하다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인다는 게 곧 죽음을 받아들인 거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그 과정에서 슬픔만은 아니고 힘들고 괴롭지만 그 안에서 어떤 희망 같은 걸 또 평안 같은 걸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 이성규> 평안을. 회사를 그만둔 이유예요 다니실 때?
◆ 이춘수> 아니죠. 한참 열심히 다닐 때였죠. 가장 바쁘게 활동하고 할 때였는데 갑자기 그랬던 겁니다.
◇ 이성규> 죽음 이후에 이제 장례 절차나 문화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장례 문화를 보면 어떤 특징이 좀 있나요?
◆ 이춘수> 제가 죽음과 장례에 관심을 갖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하나 좀 생각하게 된 게 있는데 짧게 말씀드린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에 전후 이후에 복구하는 산업화 그리고 상업화를 아주 짧은 시간에 겪으면서 사실상 우리가 전통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례 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그래서 원형으로서의 전통은 우리가 계속 찾아야겠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거는 형식적 의미에서 유교적 장래 틀 위에 종교별로 조금씩 변형된. 그러니까 틀은 유교식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재단의 꾸밈이나 절차상의 예배를 드릴지 제사를 드릴지 연도를 할지 이런 형식이 종교별로 바뀐 그걸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컨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종교 의례로서의 장례는 실질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기보다는 형식에 많이 치우친 건 아닌가 그래서 그걸 가지고 좀 보다 보면 현장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좀 있습니다.
◇ 이성규> 너무 또 유족들은 그 부분에 집착을
◆ 이춘수> 중요하게 여기죠.
◇ 이성규> 많이 하시는 편이죠
◆ 이춘수> 얘기를 해 주셔서 말씀드리자면 비일비재하게 있는 일이어서 안타깝기도 한데요.
형식에 치우치기 시작하면 가족 간의 화합이나 좀 화해의 자리가 돼야 될 장례식장이 원치 않게 의도치 않게 이렇게 다툼의 자리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형식에 매몰돼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현장에서 장례지도사이면서 동시에 종교인으로서 좀 지향하는 장례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 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실질적으로 추동하는 장래 화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장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제 역할과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성규> 네.
◆ 이춘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유교 장례는 사실상 3년상이잖아요. 3년상인데 지금은 70년대 가정의료 준칙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3일장으로 다 축소돼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3일장으로 축소되는 과정 중에 안치, 입관, 발인하고 화장 또는 매장 이런 절차마다 제사를 다 드렸는데 그 자리에 이제 제사드릴 자리에 예배를 드리고 제사 자리에 연두 기도를 하거나 이런 식으로 바뀐 거죠. 그 프레임 자체는 유교 의식인데 행위로서의 종교 의식이 들어와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해 주실 수 있습니다.
◇ 이성규> 네 그런데 이제 앞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라고 살짝 말씀을 하셨는데 좀 정리해서 우리 장래 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 이춘수> 계속 말씀드리지만 장례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을 추모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갈 수 있는 의례고 현장이거든요. 그래서 삶이 드러나야 해요. 죽음만이 아니라 근데 지금 우리가 어느 장례식장에라도 가면 다 똑같잖아요. 같은 빈소. 물론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형태는 다 비슷한 거죠. 절차도 똑같고요.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드러나질 않아요 잘. 죽음만을 위한 공간이다 보니 조문객이 추모하러 조문하러 간다고 문상을 가더라도 특별히 고인에 대해서 나눌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인사하고 접객실에 가서 이제 밥 먹고 돌아오고 하는 정도로 하고 있는데 그게 좀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좀 바라고 앞으로 좀 만들어가고 변화했으면 하는 장르는 고인의 삶을 다양하게 드러내는 그게 사진일 수도 있고 영상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장소를 바꿀 수도 있어요. 꼭 장례식장에서만 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실제로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집에서도 했었습니다. 그게 지금도 가능하고요. 불가능한 게 아니거든요. 물론 현실적 어려움들이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그건 우리가 장르에 대한 의미나 다양한 장르를 통해서 경험하려고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당하고 만들어가야 될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이성규> YTN 라디오 이성규의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춘수 목사님 우리가 이쯤에서 노래를 하나 듣고 가거든요. 그 어떤 노래 하나 소개하시겠어요?
◆ 이춘수> 아무래도 제가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또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좋아하게 된 즐겨듣는 노래가 있는데요. 최백호 선생님의 바다 끝이라는 노래입니다.
◇ 이성규> 이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노래죠?
◆ 이춘수> 가사 전체적으로 많은 감동을 주는 부분들인데요. 특히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노을이 나오거든요. 노을, 바닥끝 노을이 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제가 연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쯤 되면 간혹 노을이 지는 걸 한강 다리 위에서 만날 때가 있어요. 근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거든요. 아름다운 이유가 나도 언젠가는 좀 전에 입관실에서 만났던 사람처럼 죽을 수 있구나. 근데 그 죽음이 예전에는 슬프고 절망이었을 수 있는데 지금은 죽을 수 있다라는 사실 덕분에 너무 감사하고 이 삶이 한편으로는 더 의미 있고 풍성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노을을 참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바다 끝에 나오는 노을이 그런 장면을 그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노후를 바라보는 아름다움 때문에 좋아하게 됐습니다.
◇ 이성규> 이춘수 목사님이 소개한 최백호의 바다 끝 듣고 오겠습니다.
◇ 이성규> 네. 최백호의 바다끝 듣고 오셨습니다. 이성규의 행복한 신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입니다. 이 목사님 저는 한 가지 궁금한 게 우리나라 매장을 하는 경우, 또 화장을 하는 경우, 이제 또 요즘 수목장 등등이 있는데 이 비율이 좀 어떻게 돼요?
◆ 이춘수> 조선시대 유교 전통 안에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요. 사실 그전에 고려시대 또 불교 문화권에서 또 화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 바뀌긴 했는데 현대 오늘날에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 관리 이런 차원에서도 그리고 또 가족들이 많이 핵가족화됐잖아요. 그래서 조상들의 묘를 그렇게 관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화장이 거의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지금 90% 이상이고요. 화장 이후에 유골을 안치하는 방식이 이제 다양하게 수목장, 해양장, 자연장이라고 하는 그런 카테고리 안에서 또 여러 가지가 있는 상황이죠.
◇ 이성규> 네. 빈소 없이 장례를 진행하는 무빈소 장례 이건 어떤 거죠?
◆ 이춘수> 보통 3일장으로 한다고 하면 첫째 날 빈소를 꾸미고 설치해서 발인 이후에 정리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때 이게 좀 많이 확산되기도 했어요. 유가족들만 모이기도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또 어떤 고인의 경우에는 사회적 관계가 없는 분들이 있거든요. 대표적으로 중증장애인들이나 이런 분들은 사회적 맥락이 관계가 없다 보니까 특별히 빈소를 조문객이 없어서 빈소를 차리지 않고 안치 냉장실에 모셔놨다가 둘째 날에 입관하고 바로 발인을 하는 그런 형태의 장래가 코로나 때 본격적으로 좀 생긴 것 같습니다.
◇ 이성규> 무빈소 빈소가 없고 빈소를 차릴 수 없는 코로나 시국이라든가 이런 경우에도 이 무빈소 장례가 있고 사회적인 맥락이 없는 분들.
◆ 이춘수> 경제적 어려움도 있고요.
◇ 이성규> 예를 들면 그리고 자식이 없거나 그런 분들도 사회적 맥락이 없는 경우로 봐야 되나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 이춘수> 그렇죠. 이게 장례라는 게 돌아가신 분은 어떤 역할을 할 수가 없잖아요. 돌아가셨으니까. 남은 자들이 의뢰를 진행을 해야 되는데 얘기하신 것처럼 자녀가 없거나 혹은 또 사실은 주변에 계신 데 이제 없는 분들이 잘 모르는 분이 탈북하신 분들 이 땅에 우리 한국에 돌아오셔서 생활 새로 정착하신 분들은 지인들은 있는데 혈연관계는 없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물론 법이 좀 많이 개정이 돼서 개선의 여지는 있으나 사실은 혈연이 아니고서는 장례를 치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이런 분들이 본의 아니게 무빈소 혹은 공영장례라고 하는 그런 장례로 치러지는 경우들이 좀 있긴 있습니다.
◇ 이성규> 무연고일 경우에 정부에서 그런 부분들을 좀 해주는 시스템이 있는 것 같은데요
◆ 이춘수> 예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살다가 죽었는데 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조금 표현이 그렇긴 합니다만 보건 위생적 관점에서 시신을 방치할 수 없어서 그냥 처리하는 수준에서 화장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직화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바로 화장하는 거예요. 어떤 추모 의뢰 없이 장례 의뢰 없이. 그런데 그거는 예산을 들여서 하긴 하는데 지금은 그래도 좀 변화들이 있는 게 서울시만 해도 ‘나눔과 나눔’이라는 사단법인이 거기에 참 열의를 갖고 그런 절차들을 서울시하고 많이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오는 길에도 잠깐 스쳐 지나왔는데 벽지에 있는 시립 승화원에 가면 2층에 그리다 빈소라는 게 있거든요. 거기서 매일 두 분에서 많게는 네분. 굉장히 많은 숫자예요.
그런 분들을 작게라도 빈소를 차리고 공적 추모 공영 장례를 진행하는 경우들도 지금 만들어져 있습니다.
◇ 이성규> 여러 장례의식에 참여를 하셨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장례식이 있으신가요?
◆ 이춘수> 사실은 남는다기보다는 기억에, 기억은 하기 나름이어서요. 모든 장래가 기억하기 나름으로 다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는 장례 끝나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 기억하면서 또 제 나름대로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다 글을 써놓거든요. 그래서 그게 다 기억에 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 하나 말씀드리면 중증 장애인들 애 장래를 모시는 경우들이 왕왕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중증 복합장애인은 우리가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장애인들이 아니에요.
문 밖에서 만나는 장애인은 출입이 가능한 상태잖아요. 근데 사실은 평생을 문밖을 나서지 못하는 복합 중증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든요. 그런 분들도 살다가 길지 않은 생을 살다가 돌아가시면 비로소 집을 나와서 이제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겁니다. 제가 그런 분들 몇 분을 모시면서 참 많이 사실은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어떻게 이런 분들이 살고 있나 우리 주변에 사람의 형태로 이렇게 있을 수 있나 싶은 처음에 그런 마음을 가졌는데요. 그런 분들 몇 분 모시면서 눈에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 한 사람 자체로서 참 귀하고 의미 있다라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다고 여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죽음 앞에서 한 사람은 평등하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우리가 찾아내는 게 발견하는 게 장례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들 이렇게 만날 때마다 사실 한편으로는 귀하고 의미 있고 기억에 특별히 남게 되는 그런 것 같습니다.
◇ 이성규> 기억도 기억이지만 좀 이 장례식은 유족과의 관련이 됐든 아니든 되게 특이하다.
그런 장례식도 있었나요?
◆ 이춘수> 장례가 이별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만남의 자리가 되기도 해요. 한 사람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걸 계기로 평소에 안 보던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만나거든요. 그런데 갈등관계에 있는 가족들이 사실 많습니다. 들여다보면 없는 가족들이 없어요. 사실. 그래서 입관식을 할 때 보면 와서 고인과 갈등 관계 때문에 평소에 안 만나다가 이제 비로소 죽고 난 이후에 만나는 거죠. 그래서 근데 좀 재밌는 게 재밌다기보다는 감동 혹은 좀 안타까운 것도 있는데요. 가해자가 돌아가셨을 때와 피해자가 돌아가셨을 때 양상이 달라요. 가해자가 돌아가셨으면 피해자가 조문을 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와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합니다.
이제 생전에 우리가 그런 관계였지만 이제 다 지났으니 나는 용서하니 편하게 가시게나 뭐 이렇게 얘기를 하시기도 하고 그게 사실 용서할 마음이 없으면 오지도 않거든요.
◇ 이성규> 그렇죠
◆ 이춘수> 그런데 역으로 피해자가 돌아가신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가해자가 와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근데 안타까운 경우에는 전자는 용서가 가능한데 후자는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 이성규> 피해자가 그렇죠
◆ 이춘수> 누워 계시니까 피해자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용서할 수가 없잖아요. 근데 가해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용서를 구하러 온단 말이에요. 와서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내가 생전에 참 미안하네, 이제 다 잊어주게나, 다 잊고 좋은 곳 가시게나. 이렇게 용서를 구하면서 울부짖거든요. 어떤 경우에는 근데 보면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게 이렇게 느껴져요.
그래서 그게 참 안타깝고 보기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전에 살아생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 자리들을 계속 생각하고 만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좀 자주 하게 됩니다.
◇ 이성규> 근데 이 일이 지금 말씀을 쭉 얘기하다 보면 여러 가지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떤 경우는 또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 이춘수> 네 어려울 때가 있는데요. 제가 언제 어려운지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역설적인데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무뎌질 때 일이 어려운 것 같아요.
◇ 이성규> 다시 한 번 더 설명을 죽음에?
◆ 이춘수> 무감각해지거나 무뎌질 때. 근데 제가 이 장례제사라는 일을 하게 된 이유와 계기가 죽음하고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
◇ 이성규> 네
◆ 이춘수> 죽음을 항상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생각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죽음에 무뎌지기 시작하면 이 일의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는 거거든요. 근데 저도 사람인지라 하다 보면 그럴 때가 문득문득 옵니다. 익숙해지는 거죠.
◇ 이성규> 그냥 하던 대로 그냥
◆ 이춘수> 네
◇ 이성규> 그냥 생각 없이 한다.
◆ 이춘수> 실제로 장례지도사 선배들이 제가 뭐 이렇게 수습하고 교육하던 과정에서 이런 얘기들 많이 주셨어요. 처음에만 어렵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금방 적응한다. 많이 들었는데 그 말씀이 틀린 건 아닌데 한편으론 저로서는 경계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이 죽음에 대해서 무뎌지고 무감각해질 때 일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거고 그러면 그냥 돈 버는 일밖에 안 되는 거죠. 물론 돈 버는 일도 참 귀하지만 중요하지만 돈만 버는 건 목적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사는 게 그래서 죽음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질 때 오히려 역설적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 이성규> 다시 한 번 죽음이 뭔지 좀 정리를 한번 해볼까요?
◆ 이춘수> 저는 죽음이 한 번 죽음을 살짝 맛보고 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데 아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죽음은 사실은 의학적인 개념만은 아니구나 우리가 죽음하면 의학적 죽음만 생각을 해요. 그 먼 미래 시점에 통제 불가능한 어떤 시점에 갑자기 닥치는 호흡이 끊기고 뇌가 죽는 이 죽음만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 죽음은 의학적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사실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자기 역할이 없거든요. 죽음에 대해서 그냥 기다리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좀 나누고 싶은 죽음은 의학적 죽음만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죽음 내 삶의 어떤 어려움들이나 관계 단절이나 여러 가지 죽음의 맥락들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되살려서 살아가는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컨대 죽음은 온전한 삶을 향한 관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이성규> 네 근데 이제 여러분들의 장례식에 이렇게 참여하시면서 나의 장례식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나요?
◆ 이춘수> 생각도 해보지만 사실 문득문득 이렇게 질문받을 때도 있거든요. 근데 그게 제일 어려워요. 사실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장례 자체는 제가 제 장례를 할 수가 없잖아요. 남은 분들의 몫인데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유서를 하나 써놓은 게 있고요. 유서의 내용이 다른 게 아니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대했던 죽음의 순간이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이제 자유롭다. 생전에 맛봤던 자유만으로도 참 좋았는데 이제 온전한 자유가 나에게 주어졌으니 슬프지만 이 자유를 우리가 함께 나누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 죽을 거 아니에요? 다시 만날 그날을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갖고 기대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의 유서 있는데 그거 한번 읽어주길 바라고요. 아까 최백호 님의 바다 끝이란 음악도 같이 들었는데 유해를 만약에 한다면 수목장 할 수도 있지만 제가 바다 좋아하거든요. 수영도 좋아하고 물을 그래서 바다의 해양장으로 이렇게 해주면 어떨까라는 기대도 갖고 있습니다.
◇ 이성규>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마무리 말씀해 주시죠.
◆ 이춘수> 장례지도사로 활동한다라는 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좀 이렇게 신기하게 보이기도 하고 특별한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삶의 한 부분으로서 죽음 너무 자연스럽고요 그걸 같이 이렇게 매듭하고 마무리 짓는 역할을 한다는 게 저에게 또 감사하게 여기고 있거든요. 그래서 죽음을 이 장례를 통해서 두렵지만 슬프지만 그 안에서 소망 어떤 희망,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장례 문화를 함께 한번 이렇게 만들어가보고 싶은 게 제 소망이기도 합니다.
◇ 이성규> 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은 이춘수 장례지도사 겸 목사와 함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좋은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춘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