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여행, 쉼표
  • 진행: 김재용 / PD: 손영주

오늘의 방송내용

2월11일(월) - 설특집 '다시 부르는 그때 그 노래' 5부 10대가수(1)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3-02-11 09:40  | 조회 : 3450 
5부 10대가수 (1)

해뜰날
- 송대관

제3한강교
- 혜은이

허공
- 조용필

신사동 그 사람
- 주현미

희망사항
- 변진섭

보이지 않는 사랑
- 신승훈

난 알아요
- 서태지와 아이들

컴백홈
- 서태지와 아이들

70년대 최고의 가수는 남진이었습니다. 연말 방송의 가장 큰 행사였던 10대가수 청백전에서 남지는 마음이 고와야지, 님과 함께, 그대여 변치마오 같은 노래로 71년부터 73년까지 최고가수상을 독식했습니다. 이 때 새롭게 등장한 젊은 가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송대관입니다.

송대관은 데뷔 후 오랜 무명생활을 전전하다가 '해뜰날'이 엄청난 성공을 하면서 온갖 상을 휩쓸며 그해 가수왕까지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고는 "그래 노래는 이렇게 신이 나야지!"하며 좋아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설운도는 이후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며, 오늘날 현철, 태진아, 설운도과 함께 트로트 4대천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70년대 중반 혜성과 같이 등장한 여성가수가 있었습니다. 귀여운 외모와 이에 어울리는 미성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바로 혜은이입니다. 지금의 아이유나 수지 같은 여성 아이돌과 비슷한 위치였습니다. 혜은이는 1975년 강물은 흘러갑니다라는 노래로 데뷔하여 큰 인기를 모았고, 1977년 당신만을 사랑해라는 노래로 10대가수 최고가수상과 최고인기가요를 모두 수상함며, 최고의 가수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제3한강교라는 노래로 다시 한 번 수상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혜은이는 이은하, 윤시내와 함께 80년대 초반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80년대 초중반 조용필의 인기는 압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1980년부터 86년까지 10대가수의 최고가수로 계속해서 이름을 올렸고, 다른 방송국의 가요제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용과 김수철이 등장하면서 단 두 번 최고가수상을 놓치기도 했지만, 사실 이는 조용필의 독주를 막기 위해 방송사측에서 다른 가수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인기투표와 음반판매량, 방송출연횟수 모두 조용필이 압도적으로 앞섰습니다. 조용필은 당시 유행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불렀고, 모두 히트시켰습니다. 심지어 조용필은 트로트 음악까지 불러서, 트로트를 듣지 않는 중고등학생까지도 트로트를 흥얼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트로트도 세련되게 부를 수 있다고 증명한 조용필 덕분이었는지, 조용필이 잠시 주춤하기 시작했던 80년대 후반 트로트 가수들이 재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의 선두에 바로 주현미가 있었습니다. 약사라는 이례적인 전직을 가진 주현미는 정식 가수 데뷰 전 쌍쌍파티라는 메들리 음반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예상 외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주현미는 1985년, '비 내리는 영동교'라는 노래로 공중파에 처음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1988년 신사동 그사람이라는 노래로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그해 최고가수상과 최고인기가요를 모두 수상하였습니다. 주현미는 이미자 이후 인기를 모으지 못하고 있었던 여성 트로트가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주현미는 이듬해 짝사랑이라는 노래로 또 다시 10대가수 최고가수상을 수상하고, 1990년에 부른 잠깐만은 최고인기가요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주현미는 가장 높은 게런티를 받는 가수였습니다. 주현미 이후 현철, 김정수 등 여러 트로트가수들이 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용필이 퇴장한 가요계에서 공석이 된 여학생들의 우상의 자리를 차지한 가수가 바로 변진섭입니다. 변진섭이 들고나온 무기는 발라드였습니다. 변진섭은 MBC 신인가요제 '우리의 사랑 이야기' 로 1987년에 데뷔하고, 1988년에 1집 <홀로 된다는 것>을 발표, '홀로 된다는 것', '너무 늦었잖아요', '새들처럼', '숙녀에게' 가 차트 상위권에 오르며 데뷔 앨범부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듬해인 1989년 그의 최고의 대표작이자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2집 <희망사항>을 냈습니다. '너에게로 또다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희망사항' 이 차트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0년 10대가수에서 변진섭은 최고가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변진섭은 이문세 이후 차세대 발라드의 황태자로 통하게 되었습니다.

이문세-변진섭으로 이어지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발라드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한 가수가 바로 신승훈입니다. 대전지역에서 통기타 가수로 생활하던 그는 작사가 신재각을 통해 프로듀서 김창환을 만나게 되면서 음반을 녹음하며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변진섭 이후의 발라드 가수로 자리를 잡았고,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발매하면서 가요계를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의 성악곡 ‘Ich liebe dich(그대를 사랑해)’를 붙여 편곡한 ‘보이지 않는 사랑’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이질적인 구성의 곡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 노래는 방송 3사 가요 프로그램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고, 그해 연말 KBS 가요대상과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했습니다.

신승훈의 장점은 노래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2집 ‘보이지 않는 사랑’과 3집 ‘널 사랑하니까’ 등 앨범의 대표곡은 모두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곡이었고, 5집부터는 전곡을 작곡하고, 프로듀싱까지 혼자 힘으로 해냈습니다. 그는 발라드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는 교과서였습니다.

달콤한 사랑노래인 발라드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 서태지와 아이들이 혜성과 같이 등장하면서 한국 가요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한국 가요계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남긴 영향력은 더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이문세와 변진섭으로 이어졌던 기존 발라드가 헤게모니를 서서히 잃어가던 시점, 신세대라고 불리우던 젊은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원했습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강렬한 이미지’와 ‘새로운 콘셉트’였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의 타이틀곡 ‘난 알아요’는 정확하게 그에 부합하는 노래였습니다. “난~~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으로 시작하는 강렬한 인트로,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부터 발을 떼는 슬로 템포의 무드, 모든 사람을 경악에 빠뜨린 회오리춤, 그리고 브릿지 부분에 삽입된 헤비메탈 연주까지, 이 곡에는 이러한 모든 요소가 버무려져 한 곡에 녹아 있었습니다. 서태지는 이 곡으로 청소년의 아이콘으로 등극했습니다. 난 알아요는 1992년 최고인기가요로 선정되었고, 1995년 컴백홈으로 다시 최고인기가요를 수상합니다.
목록
  • 이시간 편성정보
  • 편성표보기

YTN

앱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