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차이나
  • 방송시간 : [월~금] 06:38, 14:53, 20:36
  • 진행자: 임대근 교수 / PD: 신아람

방송내용

1/10(목) 금화도감에 나오는 멸화군이 지금의 소방관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9-01-10 07:25  | 조회 : 500 

안녕하세요? 이야기 들려주는 역사선생님, 김효진입니다.

지난 2018년 9월 1일, 괴산고추축제에서 괴산소방서가 조선시대 소방대 멸화군 재연 거리 퍼레이드로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즘 소방관이 조선시대 소방관의 모습을 재연한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로운데요. 그러면 우리나라 소방의 시초는 무엇일까요?

최초 소방서의 모습은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 무비사(武備司)라고 합니다. 다만 화재사고가 많지 않자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고 전해지고요. 그 이후인 세종 8년에 만들어진 ‘금화도감’을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서라 이야기하고요, 당시 최초의 소방관은 ‘멸화군’이라 불렀으며, 약 50명의 군인으로 구성되었답니다.
세종 때에 금화도감이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최악의 화재사고인 1426년 한성부 대화재 수습대책의 일환이었습니다. 1426년 2월, 점심때쯤 한성부의 남쪽 장룡의 집에서 불이나 2,000호가 넘는 집이 불에 탔고, 다음날도 잔불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인가 200여 호가 연소되었습니다. 이틀간의 화재로 총 2400여 호가 불탔는데, 이는 한성부 전체가구의 17%에 해당하는 것이었지요. 이 사고 이후, 세종은 화재로 재난을 입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대책과, 이후 화재를 예방하고 진압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금화도감입니다.

하지만 금화군의 일을 모든 관서가 협조적으로 응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광해군 때인 1619년 12월, 금화순찰을 지시받은 이가 화재위험을 살피고 있었는데, 동쪽을 지키던 위장 이유서가 자신의 일을 감시하는 듯 여겼는지 금화별감을 잡아들이고 폭행했지요. 왕은 이유서를 당장 벼슬을 바꾸고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소방제도와 기구는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었습니다. 이같은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소방서가 있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들려주는 역사선생님, 김효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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