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뉴스 정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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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부축 이종창씨 "탄핵, 6월 항쟁 승리가 촛불 광장으로 올곧게 계승된 결과"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7-06-09 20:18  | 조회 : 2924 
이한열 열사 부축 이종창씨 "탄핵, 6월 항쟁 승리가 촛불 광장으로 올곧게 계승된 결과" 


[YTN 라디오 ‘곽수종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7년 6월 9일 (금요일)
■ 대담 : 이종창 파주가람도서관 관장

◇ 앵커 곽수종 박사(이하 곽수종)>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7년 6월 9일이죠. 당시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고 이한열 열사가 전경이 던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고 있던 분이 계십니다.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 직사포를 맞아서 뇌진탕으로 결국 숨을 거두었듯이, 이한열 군도 전경이 발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직격탄으로 맞고, 고의로 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쓰러진 후 희생당한 아픔의 역사라고 할까요. 그때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고 있던 분이 이종창 씨입니다. 고 이한열 열사 30주기를 맞아 이종창 씨와 함께 1987년 6월 9일로 되돌아가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파주 가람도서관 이종창 관장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 이종창 파주가람도서관 관장(이하 이종창)> 네, 안녕하십니까. 

◇ 곽수종> 6월 9일이 되면 친구 이한열 생각이 많이 나겠습니다. 

◆ 이종창> 네, 많이 나죠. 

◇ 곽수종> 이번에 기념식은 어떤 분위기로 이뤄졌나요?

◆ 이종창> 예전에 비해 많은 동문들과 학생들, 시민들이 참석해서 좀 더 기쁨을 나누는 분위기도 있으면서 그러한 분위기에서 이뤄졌습니다. 

◇ 곽수종> 그동안은 왜 이러한 추모 행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나요, 아니면 안 했나요?

◆ 이종창> 항상 매년 6월 9일이면 추모식과 추모에 관한 행사를 했고요. 그때그때 시기적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참석하시는 분들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 곽수종> 어떤 정부가 들어섰는가에 따라 추모식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은 모습인 것 같은데요. 그 당시 이종창 씨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맞던 당시 상황,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 이종창> 그 당시에는 80년 광주 항쟁을 계기로 잘못 들어선 군사 독재 정부 하에서 주로 학생들이 선두에서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 해온 과정이었고요.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뒤로 군부 독재 정권의 폭력성이 낱낱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학내에서는 진상규명, 4월 13일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열망을 뒤로하고 전두환 정부에 대한 규탄,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 곽수종> 그 당시 몇 학년이었죠?

◆ 이종창> 2학년 때였습니다. 

◇ 곽수종> 이한열 열사와 아는 사이였나요? 같은 동아리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이인가요?

◆ 이종창> 아니오,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 곽수종> 그 당시 연대 안에도 백골단이라고 해서 청바지를 입은 전투 경찰들이 가장 부대라고 할까요, 옷을 입고 들어와 잔디밭에 앉아있었고요. 그러한 시위가 늘상, 매일 열리던 시절이다. 지금 많은 분들은 기억을 못하실 텐데요. 그러한 측면에서 놓고 볼 때 이한열 열사와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쓰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지 않고 이종창 씨 혼자 부추기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 이종창> 그날은 도서관 앞 민주 광장에서 그다음 있을 6. 10 국민대회 총궐기를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있었고요. 그다음 날 있을 6.10 대회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정문 밖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전경들이 폭력적으로 대응한다는 느낌이 있었고요. 저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사수대 편성되어 오른쪽 맨 끝에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많은 최루탄을 쏘면서 다른 때와 달리 전경들이 바로 저희들을 잡으러 뛰어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전경들이 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시간을 늘리기 위해 앞쪽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맨 오른쪽에 있어서 맨 마지막에 교문 안으로 뛰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최루탄을 많이 던져서 뿌옇게 되어 잘 보이진 않은데 뛰어 들어가는데 왼쪽에 학생이 쓰러진 것 같아 다가가보니 한 학우가 쓰러져있어서 경찰들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로 안고 학교 안쪽으로 안고 올라가는 상황이었습니다. 

◇ 곽수종> 그때 이한열 군의 상황은 어땠나요, 의식이 있었나요? 제가 사진으로 보면 오른쪽 피를 흘리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요. 

◆ 이종창> 그 당시 저는 그 전에도 시위를 하다보면 저도 그렇고 많은 학생들이 다쳤거든요. 많이 다치기도 하고요. 그 당시 저는 경황이 없어서 전경들은 저희 가까이에 저희를 잡으러 오는 상황이었고. 많이 다친 줄 몰랐고, 일단 전경들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전경들 주시하고 혹시 학생들이 저희를 발견하고 도와주러 오는지 확인하면서 경황없이 안고 올라갔습니다. 많이 다친 줄은 몰랐습니다. 

◇ 곽수종> 최루탄 맞고 이한열 열사가 얼마 뒤 세상을 떠났나요?

◆ 이종창> 7월 5일에 운명했습니다. 

◇ 곽수종> 약 한 달 정도 지났군요. 6월 항쟁 끝난 뒤 이종창 씨는 신변에 위험을 느낀 일은 없었나요?

◆ 이종창> 6월 항쟁 때문에 신변을 느낀 건 별로 없었고요. 졸업하고 대학 때 활동했던 경험 때문에 조직 사건에 연계되어 수배 생활을 좀 했습니다. 

◇ 곽수종> 전공이 도서관학과였습니까?

◆ 이종창> 네. 

◇ 곽수종> 학교 졸업한 뒤에도 연대 도서관에 남아계셨다고 하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도서관학과 전공이라서 그쪽에서 경험을 쌓고 계셨나요?

◆ 이종창> 제가 대학 다니면서 사회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민주화되려면 도서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지식 정보를 국민들에게 얼마나 정확하게 알리느냐가 국민들의 민도를 높이는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도서관에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요. 난곡주민도서관이라고 빈민들에게도 도서관 혜택을 주자는 취지에서 선후배들이 만든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사람을 뽑는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 지원해 일하게 됐습니다. 

◇ 곽수종> 청취자분들은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하시는 분도 계시는 연령대도 있겠지만,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을 보시면 학생운동 시작할 때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 유리창을 의자로 깨면서 전단을 뿌리며 시작하기도 했고요. 역사 속 하나의 광장이죠? 

◆ 이종창> 네. 

◇ 곽수종> 상경대 건물 위로 올라가 전단을 뿌리기도 하고요. 도서관 정면에 있는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바로 올라가 전단을 뿌리면 곧바로 최루탄이 터지면서 전경들이 덮치던, 혼란의 시기였는데요. 지난해 박근혜 정권 국정 농단 때 촛불 혁명,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그 당시 상황과 오버랩되는 모습도 느끼셨나요?

◆ 이종창> 80년대는 80년 광주 이후 대학 항상 경찰들이 상주했고, 학생들이 조그마한 구호 하나 외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밧줄 타고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는 엄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유화조치 이후에 전경들이 교문 밖에 나가 있었고, 그렇지만 교내에서 시위가 시작하는 순간 전경들은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기 위해 교내에 진입했고요. 그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언론도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학교가 그래도 정부에 대한 본질, 이런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지식 정보의 해방구 역할을 하면서 학생들이 선두에서 민주화 투쟁을 일으켰고요. 그러한 과정에서 어떻게 일반 학우들, 시민들과 같이 투쟁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6월 항쟁이 승리의 경험을 했고요. 이번에 촛불 광장은 선두, 이런 것 없이 모든 시민이 동시에 한꺼번에 박근혜 정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한꺼번에 참여해 큰 힘을 보여줘 평화적으로 했던 탄핵을 이끌어낸 경험이 87년 6월 항쟁의 시민 참여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한 결과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 곽수종> 이한열 열사의 사망 이후 넥타이 부대가 가졌던 부채의식을 길거리에 쏟아내며 6.29 선언을 가져왔고요. 말씀하신 대로 30년이 지난 역사적 시점에서 촛불집회라는 또 다른 하나의 시민혁명적인 모습을 보였는데요. 우리가 꼭 민주화 30년, 민주화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픔의 역사이며 치유받아야 할 역사이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 이종창> 서구 민주주의 역사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사도 보면 해방 이후 4.19, 5.18, 6.10, 촛불광장 과정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시민의 힘과 노력에 의해 주어진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되는 건 민주주의는 항상 참여하고 고민하고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후퇴할 수 있다. 항상 정치에 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항상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기회 있을 때 행동하는 시민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 곽수종> 4.19가 고등학생, 중학생의 외침이 있었다면 6.29는 대학생의 외침이 있었고, 촛불까지 이어졌으니 더 이상 이러한 아픔의 역사보다도 밝고 희망적 역사가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종창> 네, 고맙습니다.

◇ 곽수종> 지금까지 이종창 파주가람도서관 관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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