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전성기, 오늘
  • 진행자: 김명숙 / PD: 신아람 / 작가: 조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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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토크쇼 청춘을 깨워라 -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초대 센터장 (아나파의원 원장)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7-05-18 13:12  | 조회 : 5769 
YTN라디오(FM 94.5) [당신의 전성기 오늘] 
□ 방송일시 : 2017년 5월 18일 (목요일) 
□ 출연자 :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초대 센터장 (아나파의원 원장)

감성토크쇼 청춘을 깨워라 -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초대 센터장 (아나파의원 원장)


◇ 김명숙 DJ(이하 김명숙): 오늘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합창이 아닌 제창으로 불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 잠시 서영은의 노래로 들어봤습니다. 오늘 모신 이분에게는 더 특별하게 다가가는 노래가 아닌가 싶어요. 1980년 오월의 광주를 고등학생 때 겪었고, 또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간 복역을 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치유를 위해 문을 연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맡기도 했던 서울 아나파 의원 강용주 원장 자리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 초대 센터장(이하 강용주): 안녕하세요. 강용주입니다.

◇ 김명숙: 네, 반갑습니다.

◆ 강용주: 반갑습니다.

◇ 김명숙: 오늘 5월 18일, 이 시간에 딱 맞는 분을 저희가 모셨다고 제가 앞서서 소개를 했는데요. 올해 5.18부터 방금 들으신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 아닌 제창으로 불렸잖아요. 문재인 대통령께서 제창을 지정하셨는데, 강용주 원장께서 특히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오늘 기념식을 보고 어떠셨어요?

◆ 강용주: 참 좋았어요. 이게 5.18 기념식이 그냥 추모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제 축제가 돼가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그때 희생당하신 사람을 가슴에 담고 생각하는 추모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그것이 오늘의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잔치 같은 축제가 돼야 한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그 축제의 장을 문 대통령께서 이번 5·18 때 여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김명숙: 정말,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아라. 그런데 정말 새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 5.18 기념식 장면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것 같아요. 앞서 소개해 드렸지만 우리 강용주 원장님은 5.18 당시 고등학생이셨죠? 제가 고3으로 알고 있는데요.

◆ 강용주: 네,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 김명숙: 정말 한창 어린 나이에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런데 그 당시 그, 어린 나이에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그 당시를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는데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 강용주: 저희 집이 도청 바로 옆에 있었어요. 그래서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항쟁을 아주 가까이에서 겪게 됩니다. 그날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제가 충장로 5가에 가면 궁전제과점이라고, 명동에 있는 제과점 같은 게 있어요. 거기서 전남여고생들이랑 미팅을 하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가 5.18을 겪게 됐었죠. 그래서 공수부대, 계엄군이 저지른 학살들을 보고 시위에 참가했었고요. 그때는 광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광주에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런 울분에 차서 시위에 참가를 할 때죠. 저도 그 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참가를 했고요. 그런데 5.18을 겪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제까지 내가 알아왔던 세계는 무너져내려 버렸구나. 내 영혼이 쨍하고 금이 가 버렸구나. 이제는 더 이상 옛날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그런 절망과 슬픔의 심연 속에 있었던 거죠.

◇ 김명숙: 그래서 그 당시에 이제 본인 스스로 학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그야말로 그때부터 이제 삶의 폭풍이 시작됐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고요. 그러면서 85년생에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란 것에 연루가 돼서 그야말로 그 어린 나이에 무기징역까지 선고를 받으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 당시 나이가 또?

◆ 강용주: 제가 스물세 살 때죠.

◇ 김명숙: 무기징역을 받으셨어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란 게 어떤 것인지 좀 간단하게 설명해주시죠. 유학 가신 것도 아니죠?

◆ 강용주: 유학을 안 갔죠. 저는 광주에서만 살던 사람이어서요. 유학도 안 간 사람을 구미 유학생 간첩단의 중심인물로 해서 무기, 사형 이렇게 때래서 그래서 조작이라고 제가 웃으면서 얘기하는데요.

◇ 김명숙: 웃으면서 말씀하셨어요?

◆ 강용주: 그즈음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죠. 85년 2월 12일 날, 야당들이 제1당이 된 다음에 전두환 정권이 위기에 많이 몰렸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사건들, ‘변호인’의 무대였던 부림 사건이나 삼청교육대, 부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같은 사건들을 여러 가지를 안기부에서 만들면서 정권 안보를 위할 때죠. 그때 당시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이 그 이후에 조작으로 판명이 났었고요. 저희 사건 같은 경우도 조작이라고 저희가 주장하면서 지금 재심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 김명숙: 그런데 그런 상황이면 고문도 그 당시에는 좀 많이 있었던 걸로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고문도 엄청나게 받았을 것 같고요. 그러는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이제, 전향서라고 그러나요? 이거 한 장 쓰고 자백하고 나가, 하는 시절이기도 했잖아요. 그러면 좀 쉽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전향서도 안 쓰신 걸로 유명하잖아요.

◆ 강용주: 그렇죠. 사람이라는 게 아주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지만 어떤 순간에는 자기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지점 같은 게 있는 거거든요.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기를 포기할 수 없는 지점, 저는 그 지점이었다고 생각해요. 저한테 왜 전향을 안 했느냐고 하면, 저는 거짓에 굴복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는 거죠. 사실이 아닌데 제가 전향할 수는 없는 거고, 용서를 빌 수도 없는 거잖아요. 더더군다나 당시 정권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었고, 전두환에게 반성한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전향을 안 하게 됐던 거죠.

◇ 김명숙: 전향서를 안 쓴 이유가 그런 이유와 더불어서 아무래도 고3 때 겪었던 충격이 좀 많이 자리를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요.

◆ 강용주: 제가 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 앞에서 칼빈 총을 들고 있었어요. 도청이 계엄군에 의해서 함락되고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이 항복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제가 총을 버리고 거기에서 도망쳐 나왔거든요. 다른 사람이 죽어갈 때, 거기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하는 죄스러움,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그게 가장 컸고요. 또한, 제 사건이 났을 때, 안기부에서 폭력에 굴복을 해서 그 사람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돼서 MBC 방송에 나와서 한 시간짜리 특집극에 시키는 대로 주절거리고, 그랬던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거든요. 이렇게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린 내 영혼을 다시 일으켜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으로 광주 망월동에 돌아오고 싶단 그런 바람, 그거였죠.

◇ 김명숙: 그럼 그 당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서 함께 소위 말해서 잡혀갔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다 전향서를 쓰고 나왔나요?

◆ 강용주: 네.

◇ 김명숙: 그럼 우리 강 선생님 한 분만?

◆ 강용주: 네.

◇ 김명숙: 그러고 나서 그러면 무기징역에서, 무기징역이면 계속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데 한 14년 정도만 복역하고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 강용주: 제가 93년도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할 때 전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초로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을 받았고요. 그리고 98년도에 저희 사건 관계자들이 준법 서약서를 쓰고 다 석방이 되셨죠. 저는 저와 같은 관계자들이 석방될 때 정말 좋은 마음이었어요. 축하하는 마음이었거든요. 저분들이 나가니까 나도 나갈 수 있겠다, 다음번은 내 차례다,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그러잖아요. 남한테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게 곧 나에게도 생길 좋은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이 나가고 나서 제 생각에는 이제 나가는 건 시간 문제다, 그런데 제 생각처럼 8개월 만에 제가 나오게 됐던 거죠. 99년도에요.

◇ 김명숙: 나오면 좀 두려움도 많고, 누군가를 원망도 하게 될 것 같고, 또 새로운 기대감도 있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심정이 어떠셨어요?

◆ 강용주: 저는 첫 번째 드는 생각은 홀가분하다였어요. 이제 내가 세상에 빚이 없다, 80년 5월달에 총을 버리고 도망치고, 남산 안기부의 고문에 굴복해서 개가 되고, 그랬던 내가 이제 더 이상은 세상에 빚이 없구나, 이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겠다, 그 홀가분함이 제일 좋았고요. 두 번째로는 저는 제 청춘의 14년을 잃어버린 거잖아요. 그래서 나머지 인생은 될 수 있으면 즐겁고 밝고 재밌게 살아야겠다, 그런 마음이었죠.

◇ 김명숙: 그러면 지금 그대로, 지금 그 생각대로 이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 강용주: 인생이란 게 생각하는 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 김명숙: 그렇죠.

◆ 강용주: 그렇지만 마음만은 그랬다는 거죠.

◇ 김명숙: 마음만은 즐겁고 밝게. 그런데 사실 제가 우리 강용주 원장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미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그런 분위기, 스테레오타입이 있잖아요. 이분의 역사를 쭉 올라서서 되새겨보다 보면 이분이 어떤 분일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동권의 이미지도 아니고, 뵈니까요. 의사이신데 의사의 이미지도 아니고, 약간 예술가 같은 느낌이 좀 느껴져요. 본인이 그렇게 노력하시는 거예요?

◆ 강용주: 저한테 예술가라고 그러면 세상의 예술가들이 다 저한테 돌을 던지지 않겠어요?

◇ 김명숙: 아니, 이미지 자체가, 실제로 뵈니까요.

◆ 강용주: 저는 이제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편이죠. 자유로운 영혼이 제 바람인 거고, 그런데 이왕이면 깨끗하고 예쁘고 멋있게 다니면 좋잖아요.

◇ 김명숙: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5.18, 5월 18일입니다. 그래서 <감성 토크쇼, 청춘을 깨워라>에서 광주트라우마센터 초대 센터장이었던 강용주 원장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8581님, ‘제 생일인 오늘은 5.18 광주항쟁을 잊을 수 없네요.’ 아, 그러시군요. 이날 늘 생일 축하해란 소리를 들으면서 한 편으로는 먹먹한 느낌도 많으셨을 것 같네요. 우리 8581님. ‘제 나이 쉰두 살이지만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러갔네요. 희생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제 고향이 전라도예요.’라고 하셨네요. 5761님, ‘젊음을 꽃피우지 못하고 희생된 그분들을 오늘만큼이라도 고개 숙여 그때 그 함성을 생각해보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네, 오늘 바로 그런 날입니다. 또 2737님께서는 ‘강용주님, 마음이 아주 예쁘시네요. 정말 많은 것을 배우셨겠어요.’ 하셨어요. 마음이 예쁘시다고요, 우리 원장님 말씀하시는 것.

◆ 강용주: 저는 마음보다 얼굴이 예쁜 사람인 것 같아요.

◇ 김명숙: 하하, 역시 유쾌하십니다. 진짜 제가 생각했던 스테레오타입이 틀렸네요. 반성합니다. 이미지로만 사람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제가 오늘 또 느꼈습니다. 그런데 아직 문자 하나 또 소개하고 가야 할 것 같아요. 3167님, ‘37년 전, 저는 휴교하는 것이 좋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학 진학하면서 진실을 알게 됐고 분노하던 시절을 살았죠. 그런 시절을 지나 이제는 정말 진실되고 국민을 우롱하지 않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아마 바람대로 우리는 그런 나라로 향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원장님께서는 1999년에 14년을 복역하고 출소하셨잖아요. 그러고 나서 다시 전남 의대에 복학을 하고 의사가 되셨어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 강용주: 저랑 같이 다닌 학생들이 98학번들이거든요. 이 98학번들이 형, 오빠 하면서 저를 챙겨줘서 졸업할 수 있었죠. 얘들이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걸 전 잘 알아먹지 못하기 때문에, 애들이 학년 노트를 정리해서 주고 시험 볼 때 되면 족보를 정리해서 형, 이거는 꼭 외워, 해서 그렇게 해서 무사히 졸업하게 됐습니다.

◇ 김명숙: 그 시절이 좋았군요. 요즘은 족보 같은 것 없죠?

◆ 강용주: 있을 거예요.

◇ 김명숙: 하하, 그래요? 있어도 잘 안 보여주려고 할 텐데, 그 시절이 생각해보면 좋기도 했네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고3 때 그런 5·18 현장에 있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다시 의대를 들어간다는 것이 정말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 강용주: 저에게 의과대학을 다시 복학한다고 하는 것은, 국가 권력에 의해서 절단돼버린 나의 삶을 다시 복원한다는 의미를 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의대를 다니다가 감옥에 갔기 때문에, 제가 다시 의대를 다녀야지 제 삶이 복원되는 단초를 깰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또 하나는 제가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잖아요. 세상을 잘 모르니까, 그래서 세상과 안전망을 두고 세상을 익혀가는, 그런 소프트랜딩을 하는 시간이 저에게 필요해서 의대를 다시 복학하게 됐는데요. 결정적인 것은 그랬던 것 같아요. 80년 5월 당시에 보여줬던 의사나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모습들, 그게 제 가슴 속에 남아 있어서 다시 의사의 길을 가지 않게 됐나 싶어요.

◇ 김명숙: 그렇군요. 그래서 의대를 졸업하시고 의사가 되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셨단 말이에요.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맡으셨는데, 사실은 그곳으로 본인이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기억하는, 그 당시의 그곳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왜냐면 본인 스스로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좀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곳으로 가서요.

◆ 강용주: 네, 그렇죠. 트라우마의 증상 중 하나가 그 트라우마를 입었던 장소나 시간 등을 피하려고 하는 회피 증상이 있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로 5월이 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망월동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그래서 제가 광주에 안 있고 서울에 와서 개원하고 서울에 있는 거죠. 광주와 거리 두기를 하면서. 그 가운데에서도 저는 국가권력 고문을 당하거나 가혹행위를 당하신 분들의 고문 피해자 치유모임을 계속 해왔어요, 인권운동가들과. 4년 정도를 해왔었고. 그러고 있는데 광주에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진다고 와달라고 그래서 저는 계속 피해 다녔죠, 못하겠다고. 그렇지만 그 잔이 피할 수 없는 잔이라는 걸 저는 알죠. 예수가 마지막 밤에 울면서 기도하잖아요. 이 잔을 제가 마시지 않고 지나갈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그런데 어쨌든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피해 갈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광주에 가서 트라우마센터를 하게 됐고요. 트라우마센터 가서 가장 좋았던 것은 그런 것 같아요. 고통을 겪은 사람,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아픔들을 위로하고 지지해주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발전하는 모습들을 5.18 유족들이나 5.18 부상자나 구속자의 모습에서 봤다고 하는 게 전 개인적으로 좋았고요. 두 번째는 광주의 아픔뿐만 아니라 세상의 아픔들과 같이 연대하고 지지하는 일들. 저 같은 경우도 안산에 가서 세월호 1주기를 만나서 세월호 기념일 반응에 관해서 강의도 하고, 그리고 2016년 초에는 세월호의 살아남은 애들이 졸업할 때, 걔들한테 너희들만 아픈 게 아니라 나도 아파, 저도 꼭 그 나이였잖아요. 저도 고등학교 3학년. 그래서 나도 그렇게 아프고 했는데 이렇게 견디고 살아왔어. 너희들은 살아남은 게 죄스러운 게 아니라 너희들이 살아남아서 그 고통과 아픔을 증거해주고 있는 거야, 너희들마저 없으면 누가 얘기하겠냐. 그래서 우리가 받은 고통은 아픈 거지만 그 고통을 진주 조개가 그 아픔을 딛고 만들어서 빛을 내듯이 우리 삶을 그렇게 만들어 나가자, 5·18 때 아픈 고등학생 강용주가 세월호에 남은 고등학생 너희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란 얘기도 했었죠.

◇ 김명숙: 우리 강용주 원장님은 예전에 조작사건의 희생자, 이것을 극복하고 의대를 졸업한 의사, 그리고 인권의 가치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인권 운동가,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을 치유하는 치유사, 이렇게 여러 가지 역할을 맡으면서 일을 하고 계신데요.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계시는 지금 이 와중에 또 발목을 잡는 일이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 일인지 간단하게 얘기 좀 해주시죠.

◆ 강용주: 보안관찰법 위반인데요.

◇ 김명숙: 보안관찰법?

◆ 강용주: 네, 보안관찰법 위반인데.

◇ 김명숙: 그걸 잠깐 어떤 건지 좀.

◆ 강용주: 보안관찰법은 국가보안법이나 형법 상에서 내란 등으로 3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랑 만났고 누구랑 밥을 먹었고 누구랑 여행을 갔고 그다음에 어떻게 살고 종교는 뭐고, 이런 시시콜콜한 내용뿐만이 아니고 기타 관할 경찰서장이 필요하다고 하면 모든 내용을 보고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프라이버시나 사생활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이 보안관찰법이라고 하는 건 전 세계에 유례가 없어요. 가까운 데에 유례를 찾자면, 일제시대 때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일제가 탄압할 때 했던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국제사회에서도 이걸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어서, 전 이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보안관찰을 거부했던 거죠.

◇ 김명숙: 지금까지도 그 재판이 진행 중인 건가요?

◆ 강용주: 네, 지금 보안관찰 신고의무 불이행으로 지금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고, 저희 변호사가 위헌 심판 제청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김명숙: 아무튼 바람대로 좋은 결과가 나오길 저희도 함께 응원을 하고요. 끝 질문을 드려야 할 시간이 너무 빨리 찾아왔는데, 이런 질문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강용주 원장님은 제가 앞서도 폭풍 같은 삶을 살고 지내왔다고 표현했는데, 우리 강 원장님의 인생에도 전성기가 있었나요? 아니면 앞으로 이런 전성기가 올 것이라고 기대를 하시나요?

◆ 강용주: 저는 지금이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내 삶에 있어서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삶은 없는 거잖아요. 지금 여기 있는 삶이 나의 전성기고, 제가 병원에서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들 타박도 하고 진료도 하고, 끝나고 나서 저녁에 친구들과 맥주 한 잔 마시고 웃기도 하고, 이렇게 나의 소박한 삶이 있는 바로 지금 여기, 그 삶이 나의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 김명숙: 네, 오늘 여러 가지 말씀하시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우리 인생의 포인트는 바로 지금이라는 말이 또 가슴에 와 닿고 또 맞다, 저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5.18 기념일이 있는 이날, 또 나와주셔서, 좋은 시간, 좋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강용주: 감사합니다.

◇ 김명숙: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광주트라우마센터의 강용주 전 센터장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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